2004년7월30일, 나는 이종4촌 여동생의 소개로 중국길림성 연길시에서 한국인 이계주씨를 알게 되었다. 그는 약 10일 정도 우리 집에서 머물러 있었다. 같은 해 8월2일부터 백두산관광도 함께 하면서 교제를 하였는데 나는 그에게 가정상황을 상세히 얘기 하면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들의 뒷바라지도 해야 하고 빚도 한화로 약 5백만 원 있기에 한국에 가더라도 이 빚을 갚으려면 일할 수밖에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였다.
이계주씨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아들의 생활비는 한 달에 30만원씩 내가 대줄 것이고, 당신이 한국에 오면 돈을 벌 수 있도록 음식점을 차려줄 테니 열심히 돈을 벌어서 갚아요. 음식점이 잘 안 되면 나가서 일해도 괜찮고.”
“혹시 사업에 한번 실패를 했다는데 신용불량자는 아닌가요?”내가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10여 년 전의 일이라 지금은 잘 마무리가 됐다. 전처가 집에 있는 돈을 모두 가지고 미국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한국에 300평짜리 집이 있으며 건설업을 하고 있기에 자동차도 3대나 갖고 있다. 자식은 남매가 있었는데 아들은 지난 2004년 1월에 차 사고로 죽었고, 22살짜리 딸 하나가 있지만 자립을 하기 때문에 부모들이 걱정을 안 해도 된다고 하였다.
2004년 8월부터 우리는 혼인수속을 시작하였고 이듬해 1월22일, 나는 결혼비자를 받고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남편의 본적지인 대전광역시 동구 00동 00번지로 가 본격적인 결혼생활을 하면서 보니 남편이 약속한 모든 것은 나를 한국에 데려오기 위한 하나의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었다. 집은 눈이 감길 정도의 허름한 조립식 건물이고, 자동차 3대를 가지고 건설업을 한다는 것도 모두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한국의 실정을 알 리가 없었고, 남편을 믿고, 남편이 하는 모든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나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배신감마저 들었다. 이런 남편을 믿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니? 두렵기까지 하였다. 그렇다고 중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기에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어렵게 맺어진 인연인 만큼 참고 살기로 마음을 정리하였다. 집이나 자동차가 혼인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부부관계를 가지지 않았던 남편은 입국 8일 만에 관계를 요구했다. 부부라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나는 성실히 응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술도 마시지 않았고, 건강에도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남편의 것이 발기가 되지 않지 않는가?
나는 황당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다. 남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밖을 나갔다.
(자식이 있다고 하기에 부부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차라리 중국에서 부부관계를 요구할 때 했으면 미리 알았을 걸…)
별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남편은 새벽 1시경에 술에 만취하여 귀가하였다. 오랫동안 여자와 관계하지 않아 그러니 너무 걱정 말라 했다. 그러면서 발기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부부관계를 하겠다고 또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이런 생활이 3개월간 지속되었지만 병원을 가보자고 해도 듣지 않았다.
남편은 발기 부전으로 번마다 실패를 하였지만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부부관계를 할 수 없으면 니가 보따리를 싸가지고 도망이라도 간다는 거야 뭐야?”
결혼하여 사는 동안 나는 남편의 이기적인 생활방식과 불신으로 말미암아 마음대로 밖을 나가지도 못하였다. 남편은 나의 결혼동기를 의심했고, 늘 짜증스러운 말과 욕설을 해댔다. 가정기물을 부수다 손에 피가 나도 계속 물건이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면서 나를 심한 공포심과 두려움 속에 떨도록 만들었다.
나는 남편의 이런 폭력적인 행동에 가슴이 뛰고 밤잠을 설쳤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생뚱 맞는 20살짜리 남자애를 데려와서 통보하듯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친구의 아들인데 내가 양자처럼 키워야 하오.”
도저히 이대로는 같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또 한 번 참았다.
함께 사는 동안 나는 남편이 돼지저금통에 모아놓은 동전까지 꺼내 쓰는 것을 보았다.
2005년 5월 22일, 나는 남편과 이렇게 상의하였다. “지금부터 취직해 일을 하면 12월까지 중국에 있는 빚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정살림에도 보태고 중국에 있는 아들의 학비도 보낼 수 있어요. 당신이 저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니 멀리 가지 않고 이 대전에서 일자리를 찾아 퇴근하면 귀가해 당신을 돌봐드릴게요.”
남편은 골을 흔들었다. “대전에서 일을 찾아하면 사람들이 다 나를 아는데 내 체면이 어떻게 되지? 그러니 다른 곳 멀리 가서 일자리를 찾아보오.”
나는 결국 이런 방식으로 허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서 일을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일을 하면서도 나는 늘 남편에게 전화로 안부를 전했으며 빚을 갚고 나면 꼭 집으로 돌아 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였다. 월급을 받으면 달마다 60만 원 씩 꼭꼭 남편에게 보내주었고, 선물로 옷도 사서 집에 갈 때마다 갖고 갔었다.
2005년9월15일 대전으로 내려간 나는 집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남편이 나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제기한 소장(訴狀)을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났다.
귀가한 남편에게 이것이 무엇인가고 물으니 남편은 얼굴을 붉히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적반하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2005년9월17일, 나는 부득불 답변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세 번의 법원출두로 2006년 4월 27일 원고(남편)의 귀책사유로 혼인파탄에 이르게 되었다는 판결을 받았다.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서울조선족교회를 방문하여 여러 가지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판결 받은 날 남편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난 내 몸 상태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욕심에 여자가 옆에 있으면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너와 혼인을 했다. 소송을 한 이유는 니가 나에게 위자료를 요구할 것 같아서이다. 부디 중국으로 돌아간 후 이 못난 사람을 다 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 말에 나는 지금까지 당해온 억울함이 싹 가셔진 듯 했고, 남편의 처지가 안타까워 나기도 하였다. 당시 홧김에 맞소송을 했었는데, 이런 판결을 받으면 한국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는 법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미 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기다리며 열심히 살아가고 하고 있다.
글쓴이 한서연
서울조선족 교회 인권센터 협조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