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발까마귀, 일명 삼족오(三足烏)는 한동안 잊혀졌다. 소수는 기억하고 다수는 망각했던 상징이 백의민족에게서 고유한 그것이라는 하나만으로도, 오늘날 특별히 주목되는 현실이다.

모두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명맥은 줄곧 이어져 왔고, 솟대 위에서 지금도 깃을 펼치고 있다. 스스로의 문화에 대한 비하를 서양 문명의 혜택에 대한 찬양과 동경의 일환이라고 무의식적으로도 느꼈다면 반성의 시작이 된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미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마저 느끼면 감동이 온다. 내 것을 아끼는 것이 나를 아끼는 것이라는 자각의 끄트머리에서 부끄러움이 일어난다. 부끄러움은 가슴을 사나워지게 한다.
고려벽화에도 있고 청동유물에서도 발견된다. 과거로 되돌아갈수록 세발까마귀는 더욱 늠름하다. 하필이면 세발이라고, 하필이면 까마귀라고 경악하며 의아한 세련됨으로 일관하는 세간의 저의가 경박하다. 그런 것쯤은 모르는 편이 차라리 혼란을 줄이는데 일조하는 것이요, 고상한 정취를 들먹이는 해괴한 낭만주의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요, 정체가 불분명하여 심히 수상쩍고 케케묵은 것이라고 가볍게 무시하는 우아한 분들에게도 세발까마귀 이야기를 마저 권한다.
전통은 시공간에서 전개된다. 시간이 멎고 공간이 갈라지지 않아 아직 원초적인 곳에서는 전통마저도 없다. 그래서 전통은 결국 세속적이다. 세속을 저급과 비슷한 분위기로 파악하면 큰 오류가 된다. 세속은 저속이 아니라 인간의 삶, 달리 말해 휴머니즘과 비슷한 뜻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 세속적이다.
신화는 시공간을 초월한 곳에서 전개된다. 거기에서는 시간도 역행되고 시간 전의 세계로서의 大시간 내지는 無시간, 혹은 시공간을 생성하기 위한 질서가 먼저 있다. 그러나 결국 시공간은 펼쳐졌고, 삶은 지속되며 가치에 대한 판단 또한 계속된다. 가치는 상대주의를 만나 각자의 주장을 다르게 만든다.
주장이 다른 것은 관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관념이 다른 것은 인식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식방법이 다른 것은 기본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백의민족의 기본태도를 유추하기 위해 세발까마귀를 요청한다.
두루 닿는 것을 한곳에다 모아 면밀히 따져보면서 기본 속성을 찾아가는 방법이 귀납이다. 귀납에서 찾아낸 단계적 마지막 원리를 적용하여 더욱 많은 대상을 관찰하여 검증하는 방법을 소위 과학이라고 한다. 찾아낸 원리가 맞아주면 가설이 성립되어 진짜라 하고 그 반대가 되면 거짓이라고 한다.
귀납에 귀납을 거듭하여 인식의 깊이와 폭을 넓혀 가다나면 더 귀납할 것이 없어진다. 인식의 끝에 도달한 것이다. 이때 마지막 귀납된 원리를 주장하여 다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최종의 법칙은 존재론이 된다. 존재론은 인식론의 최종 단계에서 생성되며 인식론의 최종단계, 즉 존재론을 통해 모든 것을 단 한 가지 법칙으로 통일하여 바라보고 설명할 수 있다. 이 방법을 연역이라고 한다.
귀납과 연역이 하나가 되면 더 찾아낼 원리는 없다. 그 원리로 현상을 해석하는 일만 남게 된다. 세발까마귀는 귀납에 사용되는 전통의 그 무엇이라는 가설을 일단 세워둔다. 실증사관은 증거를 생명으로 여긴다. 그 실증사관에도 부합되는 방식으로 고구려 벽화의 세발까마귀를 선정한다. 적절성 여부는 귀납과 연역의 통일이 일어나느냐, 인식론과 존재론의 합치가 과연 있느냐에서 판가름 나게 된다.
세발까마귀와 3태극, 귀납을 위해 지금까지 내려온 민속의 것을 두루 나열한다. 여기에서 유도되는 공통의 것을 찾아내기 위해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하나하나 다 열거하기 전 먼저 세발까마귀를 살펴보고, 여기에서 찾아낸 원리가 3태극, 3족구 등등의 내적 연관성과 일치시켜 가면 무엇인가 원리로서 명명 될 만하다. 어마어마하게 말하면, 전통의 내적 속성 중 일부라고 감히 설정해볼 수 있는 원리라고 보아도 별 하자가 없다.
도출된 의미만을 적어본다. 세발까마귀는 太陽새로서 광명을 뜻한다. 새의 기본 속성을 상징하는 상승의 의미도 갖는다. 날아오름으로 생명을 내포한 영물로도 통한다.
중요한 것은 세발에 대한 의미해석이다. 3의 원리로 적용할 수 있는 내적 근거를 따져보기 위해 3태극을 요청한다. 3태극 의미는 단군신화분석을 참조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는 이러하다. 첫 번째 발은, 우주적 근원을 의미한다. 즉, 카오스다. 두 번째 발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넘어가는 과정의 단계이다. 세 번째 발은 코스모스이다. 카오스는 역동적인 에너지와 물질의 혼합이 질서에 의해 정렬되기 위한 태초의 상태가 된다.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혼합체는, 일부 진행이 있어 정형화가 되는 과정의 단계이다. 코스모스는 질서 지워진 단계를 의미한다.
이 셋이 같이 달렸다. 그래서 세발까마귀가 된다. 태초의 상태인 코스모스에서 시공간을 전개하여 두 번째 단계로 되고 세 번째 단계로 되는 것으로 전환되었고 또 지금 이 시각 역시 전환되고 있다는 이해도 맞고, 이 세 가지 상태가 모두 공존한다는 말도 맞다. 즉, 존재론적으로 3단계가 모두 동시에 있으며 그러면서도 이러한 분화와 전개는 지속된다. 존재론과 과정론의 동시성이다.
세발까마귀는 이러한 세발을 가졌다. 그리고 상승을 도모한다. 또한, 빛을 향한 날개 짓이다. 결국, 세발까마귀로 우주론을 나타낸다는 어마어마한 결론이 도출된다. 확대해석만은 지양한다. 의미의 자의적 부과도 지양한다. 다만, 가설 중 하나를 좀은 무모할 정도로 오늘 이렇게 들먹여 본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전통 속에서 세발까마귀가 건재했다는 사실이다. 세발까마귀의 날개 짓을 전통과 오늘 속에서 그려본다.
디자인만 이쁘다고 환호하는 정도에서 벗어나, 조상의 삶에 체화된 세발까마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 또한 좋은 일일 것이다.
백의민족의 삶에 면면히 흘렀고, 또 흘러가게 될 세발까마귀의 깊은 뜻을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처사로 여겨진다.
전유재(全宥再, Quan YouZai)연변과학기술대학 생물화공학과 학사. 상명대 정보통신대학원-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STEPI) 협동과정 기술경영학과 석사졸업. 현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 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