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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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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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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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3-12-3
“올 것이 왔다.”

박정희 일당이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하려고 ‘신축군란’을 일으킨 1961년(신축년) 5월16일, 당시 내각책임제의 실권 없는 대통령 윤보선씨가 했던 말이다.

윤보선씨는 이듬해 3월 대통령직을 그만둘 때까지 박정희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는 등 반란을 합리화하는 여러 조처를 취했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거의 이 말만 남았다.

윤보선씨는 뒷날 자신의 본뜻이 잘못 전해졌다고 했지만 “올 것이 왔다”는 단순한 예측의 표현이 아니다.

거기에는 기대와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의 변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말로 먹고사는’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은 합격선을 넘기 어려울 듯하다.

지난 월요일 새벽 이라크에서 전해진 비보는 예견 가능한 것이었다.

이라크 저항세력은 오래 전부터 한국인도 공격대상이 될 것임을 예고하였거니와 이라크에 파병했거나 파병 예정인 나라들의 군인과 민간인들을 여러 차례 공격하여 살상시켰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번에 희생 당한 노동자들이 속한 오무전기가 이라크에 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이라크 주재 한국대사관도 오무전기는 물론이고 그 밖의 한국인들의 이라크 출입국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미 지난봄 군대를 파견했고 또 10월 중순에 추가 파병 방침을 확정한 정부와 이라크 진출 기업들의 안전 불감증과 무대책은 기네스북에 오를 경지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사건은 군대나 공공기관이 아닌 민간인을 상대로 한 비인도적 행위로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지난 3월 이래 미군의 포격과 폭격으로 고귀한 목숨을 잃은 이라크 민간인들에게, 또 10여년 미국의 경제봉쇄로 희생당한 이라크 어린이들에게 노 대통령이 어떻게 애도했는지, 미국의 비인도적 만행에 대해 어떻게 분노를 표했는지 과문한 나는 알지 못한다.

이번 비보에도 “파병방침 변화 없다”라는 말만 되뇌는 파병론자들을 보면 그들 머릿속에는 “올 것이 왔다”라는 생각이 들어 있을 것만 같다.

우리 한국인들이 희생되었으니 ‘정의의 복수와 응징’을 위한 전투병 파병의 명분이 선다는 생각과 함께. 희생당한 오무전기 노동자들을 애도하면서 더 이상 한국인과 이라크인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파병은 안 된다는 반전평화 세력에게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죽음을 멋대로 이용하지 말라”라는 파병론자들의 공세가 있지 않을지 손배소송, 가압류, 비정규직 차별 등으로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이 고귀한 목숨을 앗길 때 “노동자들이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지났다”라는 말로 응수하던 대통령을 떠올리면 기우만은 아닐 터이다.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하니 일개 경찰서장의 다음 발언이 나오는 게 아닐까. “과거 학생운동이 거셀 때를 생각해 보면 요즘도 거기에서 기획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중요한 건 한 개인의 분신이 아니라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등의 머릿속에 뭐가 있는가 하는 거다.”

10여년 전 군부독재 시절 시인과 신부님이 하던 역할을 참여정부 시대에는 대통령과 서장이 하고 있다.

단 위원장의 머릿속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증언할 수 있다.

지난 10월 30일 오후 4시, 서울역 앞 농성천막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휴대전화를 받던 단 위원장의 얼굴은 일순간 애통과 비탄으로 일그러졌다.

잠시 뒤 떨리는 목소리로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투신사망 소식을 전하는 단 위원장의 모습에서 나는 그 서장이 궁금해하는 점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더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부안군민, 이주노동자, 조선족들을 낭떠러지로 모는 만행과 망언을 거두어라. 아무 죄도 없는 한국인과 이라크인들을 서로 원수로 만드는 파병 방침을 철회하라.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올 것이 왔다”라고 외치자. 이것이 한해 전 대통령 선거 결과의 진정한 메시지일지니.

황상익/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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