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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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덕목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6.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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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조성일 회장을 말한다 /김 호 웅

 조성일 회장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한국의 독지가(篤志家)들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나는 구구히 설명하지 않고 “연변의 대표적인 지성이요, 최후의 애국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조성일 회장만은 좀 도와달라고 청을 든다. 고작해야 대학교의 평교수인 내 힘이 얼마나 먹혀들어 갈가마는, 윤동주사상선양회 박영우 회장과도 그렇게 청을 들었고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한양원 리사장과도 그렇게 말씀을 드렸으며 심양 한국총영사관 오갑렬 총영사와 함께 한 자리에서도 그렇게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

왜냐하면 조성일 회장은 지성의 덕목을 갖춘 우리민족사회의 참 지도자이기 때문이요, 내 개인으로 말하면 김학철, 정판룡 선생 이후로 가장 존경이 가는 원로이기 때문이다.?

불의에 저항하는 지성

지식인과 지성인은 다른 개념이다.
지식인은 어느 한 분야나, 지어는 여러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과 기능을 갖고있는 사람을 말한다. 경제학을 전공해 대기업의 안방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도 지식인이라 할수 있고 언론학을 전공해 큰 일간지의 사장이나 편집국장 직을 맡은 사람도 지식인이라 할수 있으며, 대학교의 교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교수도 지식인이라 할수 있고 시를 쓰고 소설을 엮고 평론을 하는 문인도 지식인이다.

공자는 인(仁), 의(義), 례(禮), 지(智), 신(信)이라는 선비의 덕목에서 의로움을 최고의 가치(義爲最上)로 삼았다. 공자의 말씀은 여전히 오늘날 지식인과 지성인을 가르는 시금석으로 된다 하겠다. 지식인은 정의감과 사회적 책임감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완연히 성격이 다른 두 부류의 인간으로 갈린다. 어느 한 분야의 권위자라 해도 그 지식을 팔아 일신의 부귀와 영달만을 꾀한다면 그야말로 단순한 지식인에 머물게 된다. 개중에는 부패한 권력에 빌붙고 조동모서(早東暮西), 조진모초(早秦暮楚)로 간에 가 붙고 쓸개에 가 붙는 지식인들도 적지 않은데 그들은 썩은 선비, 더러운 지식인이라 하겠다.

지성인은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진리를 추구하고 민중을 대변해 악에 저항하는 의로운 사람이다. 지성인이라면 아무리 존귀한 임금이라 해도 그가 벌거벗었다면 벌거벗었다고 말하고 아무리 무서운 왕님이라 해도 그의 귀가 말귀면 말귀라고 말한다. 지성인은 천만 사람이 서쪽으로 달릴 때 홀로 해 솟는 동쪽으로 걸어가는 사람이다. 지성인은 고리끼의 소설에 나오는 단꼬처럼 자기의 심장을 뽑아 횃불을 만들어 높이 쳐들고 민중의 앞장에 서며 권력과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판의 화살을 날린다.


지식과 의로움의 결합이라는 지성의 첫째가는 조건으로 볼 때 조성일선생은 무엇보다 먼저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학자이다. 그는 천품이 총명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출신들가운데서 손꼽히는 수재로 정평이 나있다. 연변대학교의 교수로 발탁되였지만 사교성과 활동성이 강한 자기의 기질과 능력을 잘 알았기에 교수직을 버리고 사회에 진출했다. 그는 발로 뛰는 연구를 해서 《시론》(1979),《민요연구》(1983), 《조선민족의 다채로운 민속세계》(1986), 《조성일문화론 1-3》(2003)등 무게 있는 저서를 펴냄으로써 민간문학연구에서도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1958년부터 조선족문학사 편찬사업에 몰입해 갖은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조선족력사상 최초로《중국조선족당대문학개관》(1988),《조선족문학사》(조성일, 권철, 김동훈, 최삼룡 공저, 1990) 등 장편논문과 저서를 펴냈다.

문인의 무대는 문단이요, 문인의 정의감과 사회비판성은 그의 글을 통해 구현된다. "문화대혁명” 시절 조성일선생 역시 많은 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른바 '계급투쟁’의 리론에 기대어 문학작품에 대한 정치적 평가에만 급급”1)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반성할줄 아는 문인이었으며 탈퇴환골의 변화를 가져올줄 아는 문인이었다.

우선 그는 개혁개방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문단의 중심에 서서 작가들을 선도해나가고있다. 우리는 1985년 용정에서《당대문학평론좌담회》를 열어 고루한 문학관을 깨고 새로운 문학관을 정립할데 대해 호소하던 조성일 선생의 열띤 목소리를 잊을수 없다. 특히 2001년 눈 먼 망아지 워낭 소리 따라가듯 일부 얼빠진 문인들이 친일문인 김문학씨를 세기적인 영웅으로 추대하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할 때 "노!" 하고 제동을 걸고《‘김문학현상’과 비교문화의 시각과 방법론》학술회의를 발기하고 조직한 사람 역시 조성일 선생이였다.

다음으로 그는 언제나 약한 자의 편에 서주고 시비가 전도돼 양지가 있고 재능이 있는 작가들이 부당한 대접을 받을 때 무섭게 항변한다. 그는 문단의 비리, 비정과 타협할줄 모르며 언제나 부패한 권력에 도전장을 던진다. 한 때의 실수로 직업마저 잃은 리광인과 같은 문인을 거두어 주고 그의 재능과 열정이 빛을 발하게 한 사람이 바로 조성일선생이며 김관웅과 같이 진리를 고수하다가 피해를 입은 학자를 위해 항변을 하고 그를 우리문단의 재능 있고 용감무쌍한? "흑마”라고 공정하게 평가한 사람이 바로 조성일선생이다.

그래서 조성일 선생이 있는 자리는 기본과 상식이 통하고 조성일 선생이 기치를 들면 군사가 모인다.


위기 극복의 해법을 찾은 지성

사회가 발전을 하자면 지성인들이 주축이 되고 중산층을 바탕으로 각양각색의 민간단체를 결성해 탄탄한 시민사회를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시민사회 내지 시민단체는 민주주의적인 대화와 논쟁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고 목표를 설정하며 그 실현을 위해 매진함으로써 하나의 자율적인 사회적 역량으로 부상한다.

시민단체는 대중의 힘과 지혜를 모아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과 특정 영역에서 전반 사회의 발전을 위해 일을 벌이기도 하고 또 정부의 권위는 존중하되 일부 지도자의 도덕적 부패를 꼬집고 사회의 비정과 비리를 고발하면서 시민의 권익을 대변하고 보호한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건전한 사회는 정부와 시민단체가 갈등과 충돌을 통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공존, 공생한다. 하기에 국가나 지역의 현명한 지도자는 시민사회의 역할을 중요시하며 열린 행정을 구사해 시민사회의 건설적인 의견을 수렴해 당국의 정치를 개선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민사회의 구축은 해당 국가나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의 주춧돌이 된다.

우리 조선족사회의 경우, 이러한 시민단체의 효시(嚆矢)로 되는 것이 언제 어디서 발족했는지는 좀 더 깊이 있는 조사와 비교를 해야 하겠지만, 아무튼 그간 그럴듯한 민간단체가 많이도 나왔었다. 혹자는 출범잔치만 요란하게 하고 우야무야 자취를 감추었고 혹자는 인격이나 자격 미달의 문인이 만든 단체라 폐가(廢家)처럼 썰렁하고 또 혹자는 비슷한 단체들을 이중삼중으로 만들어 공연히 정직한 시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1996년 조성일 선생이 최일균, 김기형, 림원춘, 박서암, 김경암 등 원로들과 손잡고 만들어낸《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이하 추진회로 약함)는 풍전등화 같이 흔들리는 조선족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출범했고 조선족공동체 살리기의 해법을 시민의식과 시민운동에서 찾은것이다. 그런즉 추진회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전형적인 시민단체요, 우리 시민운동의 실적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추진회에서는 간행물《문화산맥》을 펴냄과 아울러 사이트 koreancc.com을 열었고 해마다 무려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는《중국조선족소학생중학생글짓기경연대회》,《우리말 웅변대회》,《조선족전통음악제》,《연변지용음악제》,《민족교육진흥상 수여식》등 굵직굵직한 행사를 10여 차씩 거행했다. 비정기적으로 하는 행사지만 소설가 정세봉, 최홍일, 시인 김학송, 작곡가 한정자의 작품토론회나 《21세기조선족인구문제학술심포지엄》,《21세기 다원공생시대와 민족문화 살리기 특별 강연회》등 행사에서 보다시피 문단에서 소외를 받은 작가예술인들을 발굴, 홍보하고 첨예한 사회문제나 맹점들을 포착해 좌담회나 학술회의를 함으로써 명실공이 조선족시민사회의 구심점으로 되였다.

물론 이러한 멋진 행사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조성일 선생이 있었다. 그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매번 행사를 기획하고 자금을 유치했으며 맹호 같이 날렵한 젊은 일꾼들을 거느리고 진두지휘(陣頭指揮)를 했다. 지난 해 처음으로 연길체육장에서 열린 글짓기경연대회를 견학한적 있는데 높은 단상에 올라 5000명 글짓기신동들의 모습을 굽어보는 조성일 회장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선 사령관에 다름 없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미국의 국민은 국가가 자기에게 무엇을 해주는가를 생각할것이 아니라 국민으로서의 내 자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는데 민족과 국가를 위한 자각적인 봉사, 이게 바로 시민정신이요, 이러한 의미에서 조성일 선생은 시민정신의 화신이다.??


초인적인 정열과 행동하는 지성

시시비비를 가를수 있는 명철한 판단력을 가졌다 한들, 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한들 그것을 실천할수 있는 용기와 행동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모두 한 장의 백지로 남고 만다. 오늘 우리문단에는 화려한 꿈과 기획은 갖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나태하고 우유부단한 오블로모프주의자2)들이 적지 않다. 체면이 서지 않아서 못하고 시간이 없다고 못하고 나이를 먹어서 못한다고 한다. 권력자의 비리와 비정을 보고 속으로는 끙끙 앓고 있으면서도 명철보신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한다. 분명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겠지만 광동의 원숭이들처럼 슬슬 남의 눈치만 본다. 남이 선불을 놓고 승산이 있어야 소리를 치고 참여를 한다. 이게 우리문단의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하지만 조성일선생은 다르다. 조성일선생은 연설할 때 "역동적”이라는 수식어를 많이 쓰지만 실제로 그는 행동하는 지성이다. 그는 분명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참선비의 덕목을 갖추고있다. 말과 행동이 가지런하고 자신의 판단과 기획을 현실화 할수 있는 용기와 정열, 행동력을 갖고있다.

추진회를 경영하자면 뭐니 뭐니 해도 자금을 끌어들여야 한다. 하지만 남의 호주머니의 돈을 쓰기가 어디 쉬운 노릇인가? 추진회는 지금도 햇빛이 들지 않는 연변도서관의 구석진 단칸방에서 곁방살이를 하고있지만 애초에는 자금난으로 다섯 번이나 쫓기듯이 이사를 해야 했다. 조성일 회장은 체면을 무릅쓰고 한 해에도 두세 번씩 한국을 드나들고있고 수십 일씩 사구려 여인숙에서 나면으로 끼니를 에우면서 지내기도 했다. 고관대작이나 독지가를 만나가기 어디 쉬운 노릇인가? 명함도 내지 못하고 코를 떼이기가 일쑤였고 건방진 자들의 냉대와 괄시를 받기도 다반사였다. 조성일선생에게 무엇을 좀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일부 한국인들이 그를 마치 소학생처럼 훈계하는 장면을 나도 몇 번 보았다. 하지만 조성일 선생은 추진회를 위해 분노를 참을 줄 알았으며 언제나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낮추었다. 하지만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객기를 부리고 화를 내는 게 용기가 아니라 바로 조성일 선생처럼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을 욕보일 수 있는게 진짜 용기라고 생각한다.

조성일 선생은 시대의 추이와 변화에 민감하며 로익장의 정열로 전자네트워크시대에 적응하고있다. 그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라는 낱말이 없다. 시민단체가 전자네트워크시대를 외면하면 도태된다는것을 직감한 조성일 선생은 몇 년 전 끝내 컴퓨터 타이핑 기법을 익혔고 이젠 메일을 주고받거나 지기(知己)들이 보내온 첨부파일을 받아 사이트에 올리는 일까지 무난하게 해낸다. 조성일 선생이 꾸리는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조선족사회의 최근 움직임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 일반과 국제문제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어 그야말로 큰 도움을 받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조선족 역사와 문화 관련 사이트 1번지로 언제나 koreancc.com을 추천한다. 자고로 인생 칠십은 고래희(人生七十古來希)라고 했거늘 70십 고개를 넘은 분이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룬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초인적인 열정과 행동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조성일 선생은 칠전팔기(七顚八起) 좌절을 딛고 일어선 사람으로서 자신의 신념과 철학대로 살아가는 줏대가 있는 사람이다. 이 몇 해 사이만 해도 사랑하는 둘째 아들을 잃었고 외할아버지네 집에 놀러 온 외손자가 베란다에서 뛰놀다가 떨어져 절명하고 말았다. 살붙이들을 연이어 잃은 조성일선생의 아픔을 누가 알랴. 더더구나 부인은 지병으로 자주 병원 신세를 지고있다. 하지만 가끔 부인을 배동해 쇼핑을 하고 외식을 하면서 잠간의 "행복 만들기”를 하는 외에는 주말에도 어둠침침한 추진회 사무실에 나와 컴퓨터와 씨름하고 사이트를 경영한다. 그의 유일한 조수요, 참모는 한정자녀사이다. 조성일선생은 한정자녀사를 막내누이처럼 아끼고 한정자녀사 또한 조성일선생을 큰 오라버님처럼 따른다. 이들 둘은 손발이 척척 맞아 둘이서 열 사람, 스무 사람의 일을 거뜬히 해낸다. 세상의 소인배들은 이들 둘의 사이를 시샘하고 질투한다. 하지만 조성일 선생은 배짱이 두둑하다.《한정자아동음악작품발표회》를 열고 국내외 출장도 둘이 그림자처럼 함께 다닌다. 로장군이 아름다운 비서를 두고 있음은 고금의 통례, 무엇이 나쁜가. 멋있지 않은가. 뒤에서 험담을 하는 소인배들은 열 번 죽었다 살아도 그런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

이만하면 조성일 선생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겠고 나 같은 제자, 후배들이 왜 조성일선생을 사령관처럼 모시는가를 알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이들에게, 특히 국내외 기업인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다. 추진회의 사령부를 하나 번듯하게 짓는데 좀 도움을 달라는 부탁이다. 사령부가 너무 비좁고 초라하다. 일을 좀 더 통이 크게 벌리기에는 이젠 한계를 넘어섰다. 우리 로회장의 임기 기간 우리 시민정신의 산실이요, 우리 민족문화의 구심점인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청사 하나 지어보자는 제안을 한다.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출자를 하고 국내외 독지가들이 도와준다면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겠는가.

청기와에 곱게 단청을 입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청사 옥상에서 꽃구름 피는 연변 땅을 굽어보는 우리 조성일 선생의 모습을 보는게 내 한 사람의 소원일가. 두 손 모아 빌고 빈다.


 2006년 국경절연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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