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용-"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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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용-"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다’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6.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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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작가 강준용 안동 MBC에서 문화강좌 개최

 작가 강준용, 이라면 문단에서는 ‘괴짜’로 통한다. 아마도 사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순수문학의 길만 고집하면서 칩거 25여 년 간 작품으로만 승부를 걸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한편의 단편을 내놓기 위해 백여번씩 수개를 거듭하는 가 하면 청탁이 없으면 절대  글을 보내지 않았고, 일단 원고 청탁이 오면 최선을 다해 작품을 완성했다.   


작품이 곧 자신의 사랑이고, 자식이고, 생명이고, 인생의 전부로 여겨온 작가는 오직 작품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왔고 창작에 모든 것을 바쳐왔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인간 삶의 순수를 지향하면서도, 소외된 인간들에 대한 동정, 현대문명이 빚은 불의에 맞서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정신과 인간미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자기만의 특유 문체로 작품을 구성하면서 한 때 문단을 풍미했던 장편 ‘스콜’과 장편 ‘별나라를 지나는 소풍’을 출간했고, 주옥같은 중단편소설 90여 편을 내놓았다.

 

▲ 강의를 듣다

대표작 ‘스콜’은 작가의 지조와 인간지향성, 문학 스찔을 잘 보여주었다. ‘스콜’에서 작가는 자연을 말끔히 세척해 주는 스콜처럼 메카의 때에 찌든 채 인간본질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 인간들한테도 진실된 삶을 자각 시켜주는 비가 내려 위선과 허울로 얼룩진 때를 깨끗이 씻어 주길 바랐는바, 서울과 타이페이를 배경으로 장중하게 무대를 펼쳐면서 드라마틱한 구성과 지적인 의식표현으로 우리의 마음에 풋풋한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심정을 문학예술로 승화시켰었다.


이날 강준용의 문학 강연에는 100여 명의 문학애호가들과 작가의 팬들이 참석하였다. 뿐만 아니라 강준용 문학의 순수성과 예술성을 알리고 한국 고급독자층을 키우기 위해 발족된 ‘초설회’의 성원들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안동까지 찾아와 강연을 들었고, 특히 초설회의 김혜숙 회장은 이번 강연을 위해 여러모로 노고를 아끼지 않았었다. 

 

▲ 유민 소설가가 작가소개를 하다


  참고:  작가소개

 

<단상(斷想)-1>

                <전설의 소설가에 대한 단상(斷想)>

                               ―강준용을 말하다  

                                

                                         유민 소설가

                       (단편소설 베드- 경향신문 신춘문예당선, 한민족글마당 추천완료)    

                                                                      

작가 강준용은 1952년 12월 8일 영양 서부동에서 출생하였다. 


1978년부터 여러 산사(山寺)를 찾아 칩거하며 집필한 <날개> <개의 행복> <한 잎의 진실> <무인도> 등 많은 희곡작품을 무대로 올리며 극단 <집시>의 멤버로 연극생활에 몸담기 시작했는데, 당시에 극단이 전무(全無)했던 삭막한 청춘의 거리 서울 대학로에 다양한 연극집단을 활성화하는데 전위(前衛) 역할을 했다. 강준용 출현 이후 극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고 현재 대학로는 극단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의 메카Mecca가 되었다.


1986년까지 많은 희곡작품들을 무대로 올린 강준용이었지만 하루 라면 한 끼로 겨우 살아가는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극단이라는 예술적 표현이 전위 이외의 대중화될 수 없는 아직은 어두운 시대였다. 이에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희곡작품을 창작하면서 소설습작을 했던 강준용은 한국에서 달동네로 불리던 신림동, 봉천동 같은 빈민촌을 전전하며 소설작품을 썼고, 당시에 수준 높은 작품이 아니면 등단불가라는 엄격한 신인추천제도로 유명했던 월간문학에 <칠석골의 막장><하얀궁전>이 당선되어 본격 순수소설가로 진로를 변경했다. 

 

▲ 강연에 참가한 초설회 회원들

희곡작가에 이어 순수문학 소설가로 공식 등단한 강준용은 이때부터 두문분출, 빗물이 줄줄 새는 빈민촌 판잣집에 틀어박혀 소설쓰기에 몰두했다. 일체잡문(雜文)을 거부하고 의식적인 순수문학작품만을 고집함으로 인해 비참한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원고지 살 돈이 없어 견지를 구해다가 글을 썼고, 삭풍이 부는 한겨울 얼어버린 손가락을 입김으로 녹이며, 하루에 라면 한 끼, 또는 된장을 푼 콩나물국에 간장으로 반찬을 삼아 한 끼의 밥으로 배고픔을 달래며 <바람바퀴를 단 기형물> <핸드폰, 핸드폰> <숭선>같은 단편을 비롯한 장편소설 <스콜, 천재의 울음, 별나라를 지나는 소풍> 등 90여편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2000년 9월에 작고한 한국 현대문학의 정상을 지킨 거목이자 그 삶의 모범으로 인하여 작가정신의 사표로 불리던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선생은 열여섯에 문단에 데뷔한 이래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잡문을 쓴 일이 없었다. 또한 신문 연재소설 청탁도 거절했으며, 어떠한 인터뷰 요청에도 응하지 않은 소설가라고 알려져 있는데 강준용 소설가가 거장 황순원을 닮았다고 해도 의의를 제기하는 문학인들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흔들림 없이 순수문학의 길을 걸어왔고 한국문학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상이다.


순수의 연푸른 청초(淸楚)함이 몇 푼의 유혹 때문에 누렇게 말라비틀어지는 많은 문학인들을 바라보며 강준용은 강하게 부르짖었다.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할 뿐이다> 바로 이 불후의 명언으로 게으른 문학인들에게 날카로운 순수문학예술의 완성도를 요구하며, 잡문에 눈을 돌리지 않고 더 깊은 칩거를 통해 하루 한 끼의 라면으로 배고픔을 때우며 오직 순수문학소설의 창작을 위해 영혼을 불태운 그야말로 이 시대의 살아있는 마지막 전설의 소설가라고  단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강준용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신인작으로 투고한 작품 <해치, 그 여름의 전설> 과 <회유(回遊)>가 추천되어 제 3회 한민족글마당 시상식 및 신인추천상에 참가해서였다.


내가 막 시상식 회합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강준용입니다.”  하고 덥석 내 손을 잡더니 십년지기처럼 흔들었다.

 

▲ 꽃다발을 받다

산발에 가까운 허연 머리와 낡은 옷차림 때문인지 별 볼일 없는 추레한 늙은 소설가처럼 보였는데,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 순간 섬뜩한 날카로움이 내 가슴팍을 싹둑 베이고 지나감을 느꼈다. 순간 붉은 핏물이 뚝뚝 흘리는 듯하여 나는 가슴팍을 움찔거렸는데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밤하늘 찬란히 빛나는 샛별보다도 더 밝고 맑은 순수한 영혼이 들어 있었음을 발견했다고 판단한 순간, 섬뜩한 비수보다 더 예리한 날카로움이 문학을 향한 무뎌진 내 가슴을 거침없이 도려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 눈빛은 어린아이처럼 맑고, 온화했으나 그 온화함속에서 거역할 수 없는 순수문학예술을 향한 검붉은 용암이 단단한 지표를 뚫고 미친 듯 폭발해 솟구쳐 흐르고 있음을 감지한 순간에 아연실색하고 만 것이다. 말로만 듣던 전설의 소설가의 영혼이 저리 맑을 수가 있단 말인가. 갑자기 초라해지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 나는 그 자리에서 조그맣게 오그라들어 버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많은 소설가들이 얼마 되지 않은 원고료 때문에 배고픔과 굶주림에 허덕임은 한국문학이 자본주의 구조적모순에서 과감히 탈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문학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이 땅에 많은 소설가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초심(初心)의 순수함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자본의 요구와 강압에 못 이겨 현실에 타협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루 라면 한 끼로 순수문학의 집요한 문학예술정신을 흔들림 없이 지켜내며 살아온 강준용, 그에게 현실과의 타협이란 없었다.


근 30여년의 세월을 된장 푼 콩나물국에 간장 한 종지, 그리고 밥 한 끼로 하루를 연명할 자 누가 있겠는가.


강준용 문학이 숭고하다는 것은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할 뿐이다> 라는 피맺힌 절규를 내뱉으며 30여년의 긴 세월을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하면서 순수문학의 외길을 수도자처럼 걸어온 그 열정과 자존심 때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요즘 들어 강준용이란 작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독자들이 말들이 많아졌다. 이제 강준용 소설가는 천천히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 너무 오랜 세월 칩거를 통해 흙속에 묻힌 진주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들은 이제 덮인 흙을 깨끗이 닦아내 영롱히 빛나는 흑진주의 찬란한 빛을 맛보겠다는 열기로 가득 차 있다.


그 한편으로 강준용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30여년의 세월을 골수(骨髓) 같은 순수문학의 외길을 걸어온 그가 이제는 성한 이가 하나도 없으며, 성한 몸뚱이가 아니라고, 안쓰러운 마음에 애타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기념사진을 남기다

문학의 집필은 건강이 좌우한다. 그러나 그는 식사를 전혀 관계치 않고 집필에 몰두하고 있으니 곁에서는 그의 건강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내가 바라본 강준용은 달과6펜스의 스트릭랜드의 길을 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마지막 남은 영혼을 아낌없이 불태워 기필코 불후의 명작으로 승화시키고야 말겠다는 저 광기의 소설가는 겨울이 다가오는 이 계절에 연탄 한 장 없는 초라한 방구석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추스르며 마지막 남은 손끝의 미세한 온기마저 원고지의 빈칸을 가득 채우게 됨을 감사하며 스스로 불태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 초설회 회장 김혜숙
강준용 소설가를 위한 초설회가 태동했고 그 첫걸음을 시작하고 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한 일이다. 초설회를 중심으로 강준용문학이 한층 발전되고 현 시대의 고급독자들이 목마른 갈증을 푸는 단비가 되길 기원한다. 초설회를 결성한 김혜숙회장에게 참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끝>           

▲ 강준용 작가와 우광훈, 임병애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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