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용정중학교의 윤동주기념관 자료들
윤동주기념관은 중국 길림성 용정시 서북쪽에 있는 용정제일중학교 교내에 있다. 회색 벽돌로 된 옛 대성중학교 건물 한 채를 <역사관>으로 차려놓았는데, 윤동주기념관은 2층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좌우로 창이 6개씩 달린 2층에, 입구가 있는 중앙만 3층인 모습이다. 중앙의 3층은 누각 모양의 지붕을 이었는데, 본래 공자(孔子) 제단(祭壇)이었던 것인데 1923년 4월에 없앴다. 현재 오른쪽 2층 2개실은 교사(校史) 전시실이고, 이어서 윤동주 전시실이 있다. 중앙의 1층 입구 위에는 가로로 ‘大成中學校’라 새긴 화강암 석판이 붙어 있고, 건물 앞에 <윤동주시비>가 있다.

기념관 전시장은 전시벽을 冂자 모양으로 만들어 칸마다 연결시켜 놓았다. 첫 칸에는 <용정중학 연혁개황>이란 도표가 맨 처음에 게시되어 6개 학교가 용정중학교로 통합되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하였다. 1939년에 용정 시내에 있던 6개의 학교를 통합하여 용정중학이라 개명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각 학교별로 주요 인물과 사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중심이 된 대성중학교는 1921년 10월 8일 강훈(姜勛) 선생이 설립하였는데, 많은 항일 열사와 정일권(鄭一權, 한국 국무총리)․김책(金策, 조한 부수상)․임민호(林民鎬, 연변대학 초대교장) 등을 배출하였다.
윤동주전시실은 교사(校史) 전시실에 이어서 마련되어 있는데, 윤동주와 관련된 자료들과 사진들이 게시되어 있다. 내용들은 가족․친인척․친우․윤동주의 사진들과 친필 작품․학적부․동지사대학․후쿠오카 감옥․장례식․묘비․묘소․5곳의 시비 사진들 등이 게시되어 있다. 윤동주의 조부 윤하연(尹夏淵)․부친 윤영석(尹永錫)․큰외숙이며 명동학교 설립자인 김약연(金躍淵)․당숙 윤영춘(尹永春)․남동생 광주(光柱)․여동생 윤혜원(尹惠媛) 등의 모습도 여러 사진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윤동주기념관 옆에는 <이상설기념관>이 따로 서 있다. 이상설(李相卨) 선생은 이준․이위종 선생과 함께 구한말에 고종황제의 칙명을 받고 네델란드 헤이그 국제회의에서 대한의 독립국임을 역설하려 했던 의사로,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이다.
2. 윤동주의 가계와 친지들
2003년 봄에 여동생 부부가 윤동주 묘소에 세워놓은 개수비에는 조부모와 부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조부 尹夏鉉 : 1875. 2. 1.(음)~ 1948. 9. 4.(양)
조모 南信弼 : 1886. ~ 1955.
부친 尹永錫 : 1895. 6. 11.(음)~ 1965. 4. 20.(양)
모친 金 龍 : 1891. 8. 29.(음)~1948. 9. 26.(양)

윤동주(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7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나서 1945년 2월 16일(금요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나이가 29세라 하지만, 실제로는 만 27년 1개월 17일을 살았다.
누이동생 윤혜원(尹惠媛)은 1923년에 출생하여, 1948년에 남편 오형범(吳瀅範)과 함께 월남하였고, 지금은 호주 시드니에서 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두 딸은 일산과 서울에서 살고 있다.
아우 윤일주(尹一柱)는 1927년생으로 1946년에 월남하여, 성균관대학교 건축과 교수로 근무하였고, 1985년 11월 28일에 간경화증으로 작고하였다. 젊어서 많은 동시를 지었는데, 형 동주에게 흠이 될까 하여 출판을 꺼려해 왔었다고 한다. 작고한 뒤에 현재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있는 아들 윤인석(尹仁石)이 동시를 모아『민들레 피리』란 제목으로 1987년 5월 30일자로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둘째 아우 윤광주(尹光柱)는 1933년 양력 5월 15일에 태어나서 1962년 11월 30일에 폐결핵으로 용정에서 작고하였다. 본래 신체가 허약했는데, 일본책까지 독습하였다고 한다. 연변에서는 시인으로 활동하여 <다시 만나자 고향아> <고원의 새봄> <아침 합창단> 시 3편이 1969년에 발간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30주년기념 시선집에 수록되어 있다. 발표된 24편의 시를 수집하여 연변일보 등에 게재되었다. 시인 심연수(沈連洙)의 남동생과 는 문학친구였다.
외숙 김약연(金躍淵, 1868~1942)은 호가 규암(圭嚴)으로, 명동소학교를 창립하고, 교장을 지낸 우국 교육자이다. 아들 김정규(金定奎)는 명동소학교 2대 교장, 손자 김석관(金錫觀)은 명동소학교 학감으로 윤동주의 스승이었으며, 뒤에 윤동주 묘비를 짓고 썼다.
당숙 윤영춘(尹永春)은 부친 윤영석과 함께 후쿠오카로 가서 시신을 화장하여 용정으로 돌아왔다.
3. 윤동주의 묘소 위치와 개보수
윤동주 묘는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자치주 용정시 동북쪽 합성리(合成里) 동산(東山)의 교회묘지에 있다. 합성리 서쪽으로 긴 산등성이가 있는데, 마을 부근의 전답을 빼고는 거의가 다 공동묘지로 되어 있다. 윤동주의 묘는 이 동산의 8부 능선쯤에 있다. ‘동산교회 묘지’ ‘중앙교회 묘지’ ‘ 동산 중앙교회 묘지’ 등으로 기록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최초의 묘는 1945년 3월 6일에 가족들이 설치하였는데, 봉분만 있는 평범한 잔디묘였다. 묘비는 1945년 6월 14일에 가족들이 봉분 앞에 1미터의 화강암으로 건립하였다. 앞쪽에 세로로 “詩人尹東柱之墓”라 새겼고, 뒤와 오른쪽 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묘소의 1차 개수는 1988년 6월에 현봉학 선생이 주도하는 미중한인우호협회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에서 수선(修繕)하였다. 봉분 밑을 20여㎝ 높이로 둥글게 시멘트로 두르고, 묘비는 그 밖 정면에다 세웠다. 묘비 앞에 오석판(烏石板)을 맞춰 대어서 가로 90㎝, 세로 60㎝, 높이 20㎝ 정도의 상석을 설치하였다.
2차 개수는 2003년 7월 15일에 시드니에 거주하는 여동생 윤혜원․오형범 부부가 2달 정도 걸려서 완공하였다. 봉분 밑의 시멘트 테를 제거하고, 사방 4m 위치에다 폭 60㎝의 대리석판을 세워 둘렀다. 석판 안쪽은 모두 잔디를 심었다. 묘비는 봉분 앞에 세웠다. 묘비 대석에 이어서 가로 100㎝, 세로 60㎝, 높이 15㎝의 오석으로 상석을 새로 설치하였다. 왼쪽 앞에 조부모․부모․아우의 성명과 생졸연월일을 새긴 가로 60㎝, 높이 40㎝의 개수비를 세웠다. 대리석 테두리 앞에 가로 3m, 세로 1.5m의 크기의 계절(階節)을 만들었는데, 긴 화강암 돌기둥으로 두르고 잔디를 심어놓아 참배하기 좋게 만들어 놓았다.

4. 윤동주의 본가와 생가
윤동주가 태어난 본가(本家)는 당시 만주국 간도성(현재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 있는데, 용정에서 회령으로 가는 지신향 큰길 가에 있다. 이 집에서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에 출생하였고, 1932년 4월에 용정의 은진중학에 입학하여 용정으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고종사촌인 송몽규도 이 집에서 1917년 9월 28일에 태어났다.
본가는 팔린 뒤 1981년에 무너져 1983년에 철거되었다가, 1993년 4월에 용정시에서 명동촌을 관광점으로 지정하고, 지신향정부와 용정시문련과 연변대학 주선으로 해외조선족연구소의 후원을 받아서 1994년 8월에 복원하였다. 기와집 2채를 사서 헐어다가 그 재목으로 새웠다는데, 전면 5칸, 측면 2칸의 겹식 10칸 기와집이다. 본가는 동서로 긴 남향집인데, 나무 기둥에 하얀 회벽, 골이 진 기와를 얹은 팔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본채 서쪽에 거의 잇대어 헛간채가 직각으로 따로 있는데, 안에 디딜방아 한 틀이 놓여 있다. 두레박을 사용했던 우물은 본채 동쪽에 있는데, 2003년 방문했을 때는 무너져 내린 채 있었다. 대문은 본채의 왼쪽 앞마당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명동교회는 본채의 왼쪽 대문 밖 서남쪽에 큰길 아래로 낮은 벼랑이 있고, 그 밑 얕은 언덕바지에 교회 건물인 <기독교교회당>이 한 채 서 있다. 원래의 자리에 지금도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안에는 윤동주의 <사적도편전람>이 있다. 교회당 건물 오른쪽에 윤동주의 큰 외할아버지인 <김약연선생 기념비>가 있다. 묘소는 장재촌에 있다.
명동학교는 명동교회에서 서남쪽 200~300m 거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잡초만 우거져 있다. 사진으로는 일자형으로, 왼쪽이 소학교이고 오른쪽이 중학교이며, 중앙에 문이 있는데 그 위에 횡서로 ‘명동학교’ 간판이 걸려 있다. 현재의 명동소학교는 개울 건너 다른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명동학교는 1901년 4월에 김약연 선생이 명동에 <규암재서당>으로 차렸고, 1908년 4월 27일에 <명동서숙>으로 개칭하고, 1909년 4월에 <사립명동학교>로 고쳤다. 1910년에 중학부를, 1911년에 여학부를 설치하고, 1925년에 폐교되었다. 1973년에 대들보에서 “명동학교 건축기”가 발견되었다.
윤동주의 생가(生家)는 두 곳이 있다. 윤동주가 중학교에 입학하여 용정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이사가 살았던 생가가 두 곳인데, 지금은 집터만 확인될 뿐이다. 첫 번째 집은 용정현 기계수리공장의 정문과 정문에서 공장에 이르는 길이 되었고, 두 번째 집은 첫 번째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한다.
4. 윤동주 묘비(墓碑)
윤동주의 묘비는 1945년 6월 14일에 가족들이 세웠다. 화강암으로 크기는 가로 39.5㎝, 폭 17㎝, 높이 100㎝인데, 전면에서 보아 윗부분은 좌우로 둥글게 하여서 측면의 높이는 93㎝이다.
묘비의 앞쪽 면에는 세로 흑색 글씨로 ‘詩人尹東柱之墓’라 새기고, 좌우 1/5씩은 검은칠을 해놓았다. 뒤쪽과 오른쪽 면에는 검정 글씨로 된 김석관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왼쪽 면에는 세로로 ‘一九四五年六月十四日’, 아래에 ‘海史 金錫觀 撰書’, ‘弟 一柱 / 光柱 謹竪’라 새겨져 있다.
5. 윤동주의 詩碑들
윤동주의 시비는 현재 5개가 확인되었고, 어록비가 1개 있다. 시비는 국내에 4개, 일본 동지사대학에 1개가 있다.
① 서울 연세대학교 시비
이 시비는 1968년 11월 3일에 연세대학교 학생회에서 학교법인 인사처 앞에 건립한 것이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시절 기숙사가 있던 곳이다.
시비는 화강암 육면체 석판으로 만든 얕고 넓은 2단의 사각형 대석 위에 화강암으로 된 긴 직육면체 모양의 비신(碑身)을 세워 놓았다. 앞쪽은 U자 모양으로 파내고, 중간 좀 아래에다 한글로 “윤동주시비”라 새겼다. 위쪽에 윤동주 자필 서시를 확대해서 세로로 새긴 오석을 붙였다. 뒷면은 윤동주 약력이 새겨져 있다. 높이는 2.5m 너비는 1.5m이다.
이 시비는 친 아우인 성균관대학교 윤일주(尹一柱) 교수가 설계한 것이다.

② 원주 연세대학교 시비
이 시비는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연세대학교 구내 동산에 있다. 연세대 원주캠퍼스 측에서 2000년 가을에 세웠다. 육중한 육면체의 화강암 위에 반구(半球) 모양의 커다란 스테인리스 스틸을 올려서 붙였는데, 둥그런 스틸은 표면을 유리처럼 갈아서 주변의 나무들이 거울처럼 비쳐진다.
반구의 앞쪽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그 아래 화강암 앞면 중앙에는 “윤동주”, 그 밑에 생졸년도인 “19171945”라 새겨 놓았다. 화강암 뒷면에는 윤동주 주요 경력과 기념 시비를 세우는 뜻을 새겨놓았다. 시비 주변에는 하얀 자갈을 깔았고, 그 밖은 둥글게 울타리처럼 화양목을 심어 놓았다.
시비 앞쪽의 우측에 윤동주의 얼굴사진 동판을 원통의 스텐리스 스틸 기둥 위에 붙여 올려놓았다.
③ 일본 동지사대학교 시비
이 시비는 1995년 2월 16일 윤동주 50주기를 맞아 동지사대학 교우회인 코리아 클럽과 윤동주시비건립위원회와 윤동주를 생각하는 모임이 공동으로 건립하였다. 한 개로 된 널따란 화강암 대석 위에 밑이 두꺼운 직육면체 모양의 화강암 비신을 올려놓은 모양이다.
앞쪽 면은 여백으로 테두리를 삼고, 가운데를 넓게 파냈다. 오른쪽 여백에 ‘尹東柱 詩碑’라 세로로 새겼는데, ‘윤동주’ 석자는 윤동주의 친필로 하였다. 파낸 부분에는 오른쪽에 한글, 왼쪽에 일본 글자로 작품 <서시>를 세로로 새긴 오석을 붙여 놓았다. 뒷면도 넓고 판판하게 파내고 비문을 새겨 놓았다. 아우 윤일주 교수가 설계한 것이다.
④ 용정중학교 시비
이 시비는 중국 길림성 용정시 용정제1고급중학교 교정의 옛 대성중학교 건물 앞 우측, 곧 윤동주자료관 앞쪽 정원에 있다. 두툼한 6면체의 크고 작은 두 개의 오석을 대석으로 놓고, 그 위에 세로로 <서시>를 새긴 하얀 비신을 세우고, 다시 그 위에 거무스름한 자연석을 비갓처럼 올려놓은 모양이다. 용정중학교에서 건립한 것으로, 앞쪽에 윤동주의 작품 “서시”가 새겨져 있다.
⑤ 원주 상지대학교 <서시>비
이 비는 강원도 원주시 우산동 상지대학교 본관 왼쪽에 있다. 윤동주의 작품 <서시>에 담긴 정신을 본받고 기리는 뜻으로 상지대학교에서 1999년에 건립한 것이다. 이 작품비는 본관 왼쪽인 남쪽 주차장의 서쪽 벽면에 있는데, 그 위는 치악산을 바라보며 정기를 기른다는 의미의 작은 단(壇)이 마련돼 있어 <서시>가 그 밑받침을 하고 있는 셈이다.
서시비는 수직으로 돌로 쌓은 벽 중간에 벽돌 모양의 화강암으로 기다랗게 ㅍ자 모양으로 박고, 그 중앙의 네모 속에 파란색 동판으로 서시 작품을 붙여 놓았다. 동판 안에는 노란색 글씨로 <서시> 작품 전문이 세로로 새겨져 있는데, 끝줄에는 ‘1941년 윤동주’라 새겨 넣었다.
⑥ 천안 독립기념관 윤동주 어록비
윤동주 어록비(語錄碑)는 천안 독립기념관에 건립되어 있다.
<2005. 2. 12. 윤동주 60주기 추모문학제, 일본 후쿠오카 클로오코트 호텔>
<2005. 6. 30. 신길우 수필집『새와 인간』도서출판 박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