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지난 2003년 두만강 여울목에서 연변처녀 김소군, 소설가 전용문 박명호(왼쪽부터) 그리고 필자(피리부는 이). |
|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는 없고 '나'의 껍데기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삶의 회의감 때문에 하루하루를 견디기 어려워진다. 모든 걸 훌훌 떨치고 자기 탐색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간혹 외진 곳으로 발길을 떼어놓곤 한다.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자기 존재의 참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2003년 여름에 북간도의 외딴 곳으로 흘러간 적이 있다. 식민지의 그늘과 분단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러나 한없이 평화로운 두만강 여울목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그곳에는 조약돌이 많았다. 세월에 깎인 조약돌 하나하나마다 연륜의 무게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껍데기가 아닌, 자기 몸을 스스로 깎아서 만든 옹근 알맹이였다. 일행은 오랜 시간 그곳에 앉아 자신의 내면을 반추했다. 물살에 씻기는 조약돌의 질감이 온몸 구석구석에 새살로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일행을 그곳으로 안내한 사람은 미모의 아가씨였다. 심양에서 연길 가는 야간열차에서 만난 그녀는, 처음 박명호 소설가의 눈에 걸려들었다. 박 소설가는 작품 소재를 찾듯 어디를 가든 한 '건수' 올리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탐색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한 그의 눈에 곱상한 그녀가 포착된 것이다. '작업'에 들어간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녀는 28세였고, 이름이 김소군이었다. 천진에서 사업하다가 그만두고 연길로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박 소설가는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부채를 선물하고 사진도 찍어주는 등 갖은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승용차로 훈춘을 거쳐 두만강 여울목을 여행하는 행운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대단한 집중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한밤중의 작가초대소(여관)에서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니, 이럴 수가?" 박명호 소설가가 자다 말고 일어나 부스럭대며 혼자 중얼거렸다. 잠을 방해받은 일행이 인상을 찌푸리며 왜 그러느냐고 푸념하자 참으로 어이없는 대답을 했다. 그녀에 대한 '황홀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었다. "아니, 사춘기 지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런 꿈을 꾸냐?" 전용문 소설가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핀잔하며 끙, 몸을 모로 돌려 눕혔다.
하지만 박 소설가에 대한 비난이 오래 갈 수는 없었다. 그의 생뚱맞은 언행 덕분에 미인의 승용차로 두만강 여울목을 인상 깊게 둘러보고, 또 그녀의 아파트에 초대되어 저녁식사까지 대접받은 것이다. "하여튼 박명호의 능력은 알아줘야 해. 만주에 와서 저런 선녀 같은 아가씨를 만나다니…." 전용문 소설가의 발언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칭찬 일변도로 바뀌어 버렸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박 소설가는 김소군과의 물밑 작업을 계속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이메일을 다른 사람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혼자서만 애용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우여곡절 끝에 다른 일행도 그녀의 이메일을 알아내어, 서로 경쟁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만주벌판의 신데렐라였다. 하지만 이쪽의 열의와는 달리,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메일을 가끔 보내던 그녀는 1년도 지나지 않아 소식을 끊고 말았다.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우리가 김소군을 다시 만난 것은 2006년 2월 초순이었다. 설 직후라 만주벌판은 온통 눈에 덮여 있었다. 날씨도 꽤 추웠다. 연길의 시장골목 어느 찻집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한층 성숙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기까지 낳았다고 했다. 우리는 박 소설가의 가슴에서 한숨 새는 소리를 들으며 가져간 화장품과 기저귀를 선물했다. 그녀도 남편이 준 선물이라며 중국산 양주 두 병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오랜만에 재회한 우리는 인근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겨 밤늦도록 회포를 풀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우리 모두의 누이동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 같았다. "참 곱다…." 그녀 곁에 앉은 서규정 시인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