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순수한 혈통은 어디에도 없다. 중국은 혈통주의에 의한 국가적 정의를 일찍 포기했다. 다민족 국가요, 모두어 말해 중화민족이라고 정의한다. 문명을 기반으로, 통합된 지역에서 일관된, 굵직한 법치의 힘이 미치는 영역을 전부 중화민족의 범주에서 처리한다. 이 정의에 의해, 다민족이자 중화민족인 제 국민이 결국 중국의 구성원이라는 사유가 합치되는 시점에서 중국의 의미가 온전하게 성립된다.
사실 중국에서의 민족혈통주의 논의도 그렇게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가깝게는 청조에서, 좀 더 소급하면 징기스칸의 중원통일에서 극심한 고통과 저항이 따르는 쟁론과 피 흘림이 있었다. 한고조가 중국-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이라는 국가명칭이 나타난 적도 없고, 중국은 다만 중원을 지칭하는 일반명사에 불과했을 시기이기는 하지만-을 통일한 후에, 그 전까지 화하족(華夏族)으로 칭하던 무리를 漢族이라고 달리 부르기 시작했다. 통일국가의 법치질서가 혈통에 기반한 공동체 질서보다 우위에 놓이면서 민족 명칭에 질적인 변화를 보여준 것이 되겠다.
이미 국가의 질서가 이민족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을 앞에 두고, 그 현실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민족 定議, 그것은 다민족주의이자 중화주의라는 애매모호한, 그러나 그 절충으로만 해답이 가능한 실존의 기반에서 비롯된 해석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압록강을 넘으면서 울분과 감상에 젖었던 외교사절단의 어쩔 수 없던 고토회복 정서라던가, 그러면서도 오랑캐인 淸과의 외교를 위한 노정이라는 현실을 산해관 앞에서 불현듯 깨닫는 주체못할 의분감은 한없이 초라하다. 小中華로서 明의 쇠락을 슬퍼한다는 미련한 발상에,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고 수많은 문물로 압도하는 淸의 실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들은 드디어 깨닫는다. 현실은 그처럼 잔혹하다는 결론 뒷편에는, 통일되지 못한, 모순된 사유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으로 허탄한 일이다.
거침없는 요동벌판이 눈앞에서 살벌하게 그 폭과 자락을 펄럭이면, 가끔씩 박지원 어른같은 문인이 감성과 지성과 야성의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만하구나.”
박지원을 울렸던 요동을 멀리하고, 그 위쪽으로 또 한없이 역사를 달리다나면, 단군의 시대가 펼쳐지고, 그 펼쳐진 무대에서 현실은 그때를 향해 고함친다. “단군 시대여~!”
(그러나) 熊女는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매일 神檀樹 아래에서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桓雄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그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단군왕검이라 불렀다.1)
聖과 俗이 가까스로 어울리는 지점에서 단군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단군은, 차원과 차원이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흐르는 중간 쯤 영역에서 성스러운 기운을 온몸에 채우며 출생한다. 하필이면 성과 속을 논하는 현실적 공상주의자들의 공담을 따로 하고 오직 실존만을 냉엄하게 바라본다. 단군은 實在였다.
무릇 세상적인 것은 “하나가 둘로 나뉜다”는 말을 다 새겨서 접수할 필요는 없다. 하나는 둘로 나뉘는 것보다, 굳이 나뉜다고 말할 입장에서 담론을 달리하면, 당분간 셋으로 나눠놓고, 그 나눔은 결국 바라보기의 편의에 의한 자의적 나눔임을 뚜렷이 하며, 그 다음에야 “하나는 셋이다”를 자세히 바라보는 입장이 되어야 바람직하겠다.
혈통의 고귀함에 의해 환웅이 요청되었다면, 곰 역시 그 혈통의 맥을 끝까지 하여, 단군의 몸속에서 신의 형통과 동물의 실존성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면서 구체화된다. 神檀樹가 장엄하게 하늘과 맞닿아 있고, 우주나무로서 신과 인간의 재회를 감회 깊게 증언한다.
내면적 사고가 한민족에게 있어서는, 화합이 그 정수로 된다.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으로의 비약이, 신비한 힘의 도움을 받는다는 틀에 박힌 도식을 따르더라도, 좀만 깊게 살펴보면 깊이가 보인다. 낮은 차원은 높은 차원에서 아래로 흐르는 에너지를 빌어, 돛단배가 바람을 자유로 활용하듯이, 물고기가 여울목 소용돌이에서 힘찬 꼬리를 젓듯이 한없이 자유롭고 정확하다.
박지원이 거친 울음을 터뜨리기에 유감없었다면, 현실의 여기서는 또 다른 울음이 필요하다. 사유의 거친 울음, 그 울음으로 혈통의 단편과 신화에서 벗어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산해관을 지나 연경에 도착하는 길에서 감상을 점철시킨 외교사절단의 흔적은 고뇌와 실존의 아픈 기억만은 아니다. 한고조의 통일 중국에서 화하족이 한족으로 변모하는 것도 냉정한 현실에서 기인된 진실한 용단임을 기억해야한다. 한민족이 정과 한과 울분으로 그 민족적 정서만 들먹이기에는 현실이 냉혹하다. 그리고 사리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단일 혈통론은 더욱 어부성설이다.
국가란 단어를 엥겔스가 처음 언급했다는 점만 상기해 봐도, 우리의 논의가 얼마나 현실로 과거를 재단하고 있는 가를 놀랍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국가는 허깨비일 수도 있다는 점을 엥겔스의 입이 있기 전 세월이라면 어렵지 않게 내릴 결론으로 될 것이다.
그래서 단군은 실존이든 실존이 아니든 우리의 마음 속 깊게, 사고와 철학으로, 화합과 통합의 의미로서 건재하는 하나만으로 실존이다.
그때의 이야기가 지금에서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많은 단어의 나열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 현실적 논의는 그래서 아무래도 중요하다. 지금을, 우리를 그대로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