檀君神話를 말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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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神話를 말한다(1)
  • 전유재
  • 승인 2006.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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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因 뒤편의 카오스-
 

하늘이 열린 날 기념하기도 전에, 게으른 시간은 그냥 지나가고 언제나 다름없이 하루가 평안하였다. 檀君을 기려 한쪽에서는 國祖檀君像을 세우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목을 쳐 그 외람됨과 우상숭배를 꾸짖는다. 대개는 부질없는 짓이다.


실증주의적 사관에 함몰된 일군의 학자들이 근거를 들먹여 단군의 실체를 증명하라며 근엄한 표정이 되기도 하고, 그 맞은 켠에서 열의는 있되 설득의 조리만은 부족한 대다수가 거룩한 민족주의를 빙자하여 조상의 덕을 모르는 자들에게 크게 분노한다.


文化의 우매다. 별것 아닌 문화에 별것인 내면의 德이 침해를 보고 있는 형국이다. 문화를 논하다나면, 그 뜻부터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 文化란 다름 아닌 문자화를 의미한다. 문자로 기록되기 전에 것을 허망하게 취급한다면, 내 또한 따로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 역설을 딛고 文을 말하고, 化를 말해봄이 檀君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일 듯 싶다.


文도 좋고 文을 文이게 한 내면의 사고는 더욱 좋다. 내면의 사고는 인간의 삶에서 나와 인간의 손을 거쳐 종이에 적혀왔다. 단군을 말하자면, 단군의 사고가 먼저 있었고, 단군의 신화 전에 단군化된 삶이 선행되었으며, 그 선행된 삶이 단군의 사고를 만들었음을 미리 알아두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그리고 문명이 여기 있다. 아마 文化를 통한 그 밝음을 존경하여 文明이라 할 것이다.


고기(古記)에 일렀다. 환인(桓因)의 아들 가운데 환웅(桓雄)이 있어 천하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탐구(探究)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1)


桓因은 이름이기도 하고 뜻이기도 하다. 헤아릴 뜻을 먼저 보면 알아가는 내면이 보인다. 나무가 있다. 木이다. 나무로 이어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알아가야 할 것이다. 해(日)를 에워싼 위편과 아래편이 있다. 두 개의 一이다. 태양 위의 영역으로서 하나의 一이요, 태양 아래 영역으로서의 하나 一이다. 무릇 세상은 그러하게 이루어졌다는 소박한 인식이다. 태양 위의 것을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면 크게 잘못이다. 그것은 그것 하나의 영역으로 존재할 뿐, 세계만은 아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는 세계를 이룰 수가 없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태양 아래 한 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는 역시 세상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 그래서 태양은 그 위와 연결되고 그 아래로 연결되며, 그 간결한 질서가 나무를 세움으로써 상징된다. 桓의 의미다. 桓因은 그 이름으로서, 그러한 이치가 이루어지는 原因 자체를 상징한다. 세상이 흐르는 원인으로서 桓因이 그 아버지로 된다.


桓雄 역시 이름이기도, 뜻이기도 하다. 雄은 순 우리말로 곰이다. 곰은 검과 통한다. 검다는 암흑이 아니요, 힘의 원천을 의미한다. 굳이 또 언급하자면, 카오스(Chaos)의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깜박깜박”은 불빛의 명멸이라는 단순한 뜻이기 전에 훨씬 깊게 그 내적 근거가 있다. 감, 검, 곰은 같은 내면의 뜻으로서 역동성과 태초의 우주 상태를 의미한다. 混沌으로 잘못 인식되어 “검”을 수용한 불쌍한 이해를 걷어내고 속 것은 보아야겠다. “깜박깜박”은 우주가 그 질서대로 흘러가는 순서와 전개요, 그 영원한 방식으로서 “검 - 밝”을 지속하며, 그리하여 그 거대한 에너지를 진지하게 머금고 桓雄으로 표상된다. 가장 높은 차원세계에서의 실상에 대한 뚜렷한 표징이다. 桓의 因이 먼저 있음은 물론이요, 그 아버지의 바통을 이어받아 桓의 雄이 됨으로써 곰으로 의미화 되며, 곰은 곧 雄으로서 카오스, 즉 에너지이자 원천이 된다.


아버지와 아들은 갈라질 수가 없다. 아버지 역시 낳은바가 아니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 아버지를 낳은 것은, 원래부터 스스로 그렇게 있은 카오스(Chaos)가 아니면 아니 된다. 누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누가 허물어가는 것도 아니다. 원래 그렇게 있는 것으로 카오스가 있다. 말하자면 存在 그 자체이다.


聖經을 위수로 한 서양의 신화이자 철학,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것이기 전에 천지는 미리 있었음을 새삼스럽게 기억해둔다. 이제부터, 서양은 “창세신화”로 고등하고, 우리는 “건국신화”의 전 단계인 “창세신화”가 없어 우리의 천박함을 스스로 드러낸다는 열등감을 그대로 거둬들이는 용기와 슬기쯤은 있어야겠다. 원래 그대로 있는 것을 또한 어떻게 본질적으로 만들어 갈 수가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


갈라져 있는 듯이 보이면서도 실상은 그 하나인, 진짜 우리 것을 되돌아보며 도안 하나를 덧붙인다.  

 


개천절은 여전히 평안했다.




- 2006년 개천절을 기념하여

 

1) “삼국유사”, ‘기이편’ 고조선 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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