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고을 -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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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고을 - 序
  • 전유재
  • 승인 2006.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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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 모든 비

  하늘은 땅과 교감이 있어 어김없이 비를 뿌린다. 창이 흐려지면 밖을 바라보다 추억을 하나씩 꺼내보니 내 또한 정녕 비를 좋아하는 탓이리라. 추억이 쑥스러워 추억이라 아니하고 다만 하찮은 기억 따위라 넌지시 생각을 바꾸어도 추억을 역시 추억일 뿐이다. 내 이제, 추억을 적어야겠다.

  하늘은 가끔 흐리고, 비는 그냥 올뿐인데 내 거기에 너무나 많은 것을 기탁함이 가당치는 않을 것이라. 안개비로부터 폭우에 이르기까지, 맞았던 비나 맞지 않았지만 창밖으로 바라보았던 비나 해마다 오긴 왔다. 그 비를 내가 다 기억 못함이 내 기억력 탓만은 아닐터이다.

  작게 내려 온순하고, 많이 내려 사나워지는 것, 비가 내린 뒤 그런 것들로 가득 남는다. 반두에 미꾸라지 비린내를 바르거나 맨발을 진흙 속에 박아보기도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해오던 노릇이다. 이쯤 생각되면, 폭우가 남긴 피폐한 참상 따위에 대한 번민의 기분마저도 대충 가셔지고 마음에 어렵지 않게 위안이 온다.

  아마 안일하고도 무난한 성격 탓인 것도 있겠다. 그렇다고 성정이 유순한 자처럼 마냥 웃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비가 자주 내렸고, 해마다 내렸고, 또 한동안 이 후에도 내릴 것이기에, 다 내린 후 비에 대한 감상 정도를 남기려면 너무 아름차다. 차라리 비는 그렇게 온다고 몇 자 적어 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안개비, 는개, 이슬비, 가랑비, 보슬비, 부슬비, 가루비, 잔비, 진비, 실비, 싸락비, 날비, 발비, 작달비, 장대비, 주룩비, 달구비, 채찍비, 여우비, 먼지잼, 개부심, 바람비, 도둑비, 누리, 궂은비, 보름치, 그믐치, 웃비, 해비, 꿀비, 단비, 목비, 못비, 약비, 모다깃비, 우레비, 마른비, 오란비, 건들장마, 일비, 잠비, 떡비, 술비, 비꽃, 소나기..

  옛 어른들이 이미 많은 것을 말해두었다. 그 이름 하나에 비 하나가 있고, 그 비 하나가 사실 그 이름 하나를 부르게 한 탓이겠다. 그렇다면, 그 비에 그 어른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했을 것이고, 그 말들은 많이 사라졌는데 비는 그래도 계속 온다.

  내 또한 마찬가지다. 해두었던 말들은 씻겨가고 지워질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비는 또 온다. 내가 그 비를 보고 그 말을 했듯이 누군가는 또 그러할 것이다. 그냥 그래서 좋다. 그 비들을 나는 내 고을에서 봤다. 그 고을은 내가 살던 곳이요, 머물던 곳이요, 머물 곳이다. 한곳에 비가 뿌려지기만 한다면, 그건 비가 아니다. 비는 두루 내리고, 여기서도 저기서도 내린다. 내가 그 비를 맞을 때, 그쪽 고을에서는 무지개를 보고, 무기개가 없는 곳에는 햇빛으로 즐거웠음이 분명하다. 햇빛 아래 빛고을 이야기나, 나의 빗고을 이야기나 서로 하기에 두루 통한다.

  빗고을 이야기를 빛고을에 전한다. 빛고을 이야기는 빗고을로 전해질 것이다. 빗고을 무지개를 빛고을에서 봄즉 함을 나도 안다. 빛고을 비 이야기가 아름다웠을 것을 마저 안다.

 윗동네와 아랫동네는 그렇게 살아왔다. 비를 보고, 빛을 보고, 비와 빛의 무지개를 보고 살아왔다.

  오늘, 무지개가 보고 싶다.

 

 

 

전유재(全宥再, Quan YouZai)연변과학기술대학 생물화공학과 학사. 상명대 정보통신대학원-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STEPI) 협동과정 기술경영학과 석사졸업. 현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 석사과정

메일: yzquan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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