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싶은 모교, 그리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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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모교, 그리운 선생님
  • 문민
  • 승인 2006.08.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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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스승의 날'을 맞으며

▲ 가운데 흰 와이셔츠를 입은 분이 담임선생님이다

스승의 날은 다가 오고  

 9월 10일은 스승의 날이다. 중국에서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이날만큼은 어려서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을 떠올리고 모교를 그리워 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중국에서 12년간 교육을 받았고, 그 과정에 적어도 20~30명의 선생님들로부터 따뜻한 배려를 받았었다.

 16년 전까지만 해도 학생의 신분이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스승의 날’에 특별히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굳이 이유를 묻는다면 여러 가지로 있겠지만, 나의 기억에는 시기적으로 새 학기가 시작 된지 며칠 되지 않아 교실도 낯설고 새로 만나는 선생님들도 서먹서먹하던 느낌이 오래도록 앙금으로 남아 감사의 마음이 부족했지 않나싶다. 그만큼 내성적인 애였다.  그때 선생님께 꽃 한 송이도 선물하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된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나의 모교, 나의 선생님

 20년 전 나는 흑룡강성 벌리조선족중학교를 다녔다. 중 3 때 담임은 김정호선생님이었는데 선생님은 시력이 좋지 않아 두꺼운 안경을 끼셨다. 그때 같은 학년에 3개 반이 있었는데 나는 2반에 배정받았다. 1반은 대체로 벌리현 시내 혹은 근교에 사는 학생이었고 2반과 3반은 농촌에서 온 학생들이였던 것 같다. 그래서 1반 학생들 중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1반이 중점 반이라고 여기고 1반에 편성되지 못한 것에 은근히 불만과 질투심을 가졌지만 1학기 기말시험 결과 3반의 학급성적이 막상막하라는 것을 알고, 1반은 결코 중점반이 아니며 다만 도시에 생활하는 학생들이라고 생각해서 경계심을 풀었다. 지금도 궁금하지만 적어도 최초 반 편성이 되었을 때는 1반의 성적이 월등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우리 반의 성적을 끌어올린 주인공은 두꺼운 안경을 낀 담임선생님이란 것을, 나는 믿어마지 않는다.

 나는 담임선생님의 의향대로 사범학교를 지망했고, 또 입학통지서를 받고 함께 기뻐하였다. 그러나 벌리중학교에서 더 이상 공부할 수 없었고 더 이상 안경 낀 담임선생님을 만날 수 없었다. 사범학교 다닐 때 방학이 되어 기차타고 집으로 올 때는 학교가 있는 벌리역을 지나지만 선생님도 방학이 되어 집에서 쉬고 계실거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어언간 20년이 지났다. 선생님은 아직도 벌리중학교에서 재직하고 계시는지? 아니면 퇴직하셨는지?

입학통지서를 갖고 오상조선족사범학교로 가던 날, 난생처음 10시간 기차를 타보았다. 학교에 가려면 할빈역에서 환승해야 했다. 그런데 환승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기차에 올라 짐정리를 하고 좌석을 찾아 앉으려고 보니까 기차를 잘못 탄 것을 알게 되었다. 하차하려고 보니 기차는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안내방송에서 내가 탄 기차는 북경으로 출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당황한 나는 안내원에게 알렸고 또 안내원의 친절한 배려로 바로 역에서 하차하여 다시 할빈으로 와서 오상시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를 잘못타서 함께 온 선배 일행과 떨어져 당황한 나는 계속 눈물이 나왔다.

 먼저 온 선배언니는 학교에 곧 바로 이 소식을 알렸고 학교에서는 몇몇 선생님을 오상역에 급파하여 역내에서 사람 찾는 광고를 연속 방송하는 한편 역 밖에서는 여기저기 사람들속에서 나를 찾고 있었다. 예정되로라면 오후 5시쯤에 도착하게 되지만 밤 9시쯤에야 도착하게 되었다. 할빈에서 다시 오상으로 가는 기차를 제대로 탔지만 캄캄한 밤이라 학교를 찾아갈 길이 막막했던 나로서 그때 당황했던 마음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으랴. 기차에서 내려 출구로 나오는데 방송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 순간 얼마나 고맙고 기뻤던지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나의 4년간 사범생활은 이렇게 학교의 따뜻한 배려와 관심으로 시작되었다.

 4년이 지나 졸업파티가 있던 날, 평소에 그토록 근엄하시던 유남현 교수께서 춤을 청하셨다. 선생님께서는 “내일부터는 너도 선생님이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사범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잘 활용하기 바란다. 선생님이 되었다고, 학생보다 더 많이 안다고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편지를 써서 물어봐.”라고 나의 귀에 대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생님께 편지 한통 드리지 못했다. 그래도 선생님의  당부대로 배움에는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선생님, 저는 아직도 졸업하지 못한 학생입니다.”

▲ 오상조선족사범학교 재학시절

교사가 되어

 사범학교 졸업 후 발령받은 첫 직장에서 지금까지 근무했다면 아마도 중견 교사가 되었겠지만 보다 나은 교사가 되려는 일념으로 계속 공부를 하다보니 학생신분을 벗지 못했다. 지금은 비롯 중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지 않지만 교육이 필요로 하는 곳, 한국국제노동재단에서 중국동포취업교육 교사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교수내용, 교학장소는 달라도 교육대상이 바뀐 것은 없다. 물론 중국에서 학교 교사로 있을 당시 교육대상은 미성년 학생이었다면 지금은 25세 이상 성년 교육생일 뿐, 모두가 중국동포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落葉歸根하고 싶지만

 2002년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서울대학교 교육학 석사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모교에 그리움이 점점 커갔다. 이제 1년만 지나면 졸업하게 된다. 졸업 전 꼭 모교에 가서 선생님을 찾아뵙고 싶다.
한번은 한국의 모 방송국에 스승을 찾는 프로그램에 방송출연을 의뢰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스스로 찾아뵈려고 동기생들에게 문의하던 중 뜻밖의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오상조선족학교가 폐교되었다니, 이게 정말 인가? 난전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선생님을 찾아 자초지종을 정확히 알고 싶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9월 10일, 난 이날을 그냥 보낼 수 없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모교와 선생님의 사랑과 배려가 두터웠었다. 한 아름에 달려가고 싶은 모교여, 그 곳에 계시고 있을 그리운 선생님, 정말 보고 싶습니다!  ‘스승의 날’  불효제자가 먼 한국에서 큰 절 올립니다. 부디 행복하시기를 빌고 또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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