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백부님의 묘 12호를 찾았다.
백부님의 산소에는 장군님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기념비 정면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육군중장 김 동빈의 묘’
기념비 옆에는
‘兵器 同友 會 一同’
이란 한(漢)글이 씌어져 있고 작은 꽃도 그려져 있었다.
기념비 아래에는 후대들이 남긴 글이 이렇게 적혀 있다.
‘항상 자애로우시고 인자하시던 아버님! 이제는 뵐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6.25때 다부동, 영천, 운산, 번천, 백마고지전투, 평양입성 등 수많은 전투에서 줄곧 승리하여 태극무공 훈장 등11개의 무공훈장을 받으신 불패의 명장이셨고 덕장이셨던 아버님!
아버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기념비 뒤에는 백부님의 간력과 후손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는 아침, 점심도 먹지 않은 채 30도가 넘는 폭염에도 아랑곳없이 백부님의 영전에서 한 시간 가량 참배하였다. 눈물인지 땀인지 분간 할 수없이 온 얼굴이 범벅이 되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백부님을 만나는 순간, 문화대혁명시기에 백부님이 한국에 있다고 ‘남조선특무’로 투쟁 맞고 제명에도 못사시고 돌아가셨던 아버지가 생각나 대성통곡이라도 터져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하긴 울어서 무엇 하랴! 그래도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고…
묘지에서 내려오는데 길옆에 삼삼오오 떼 지어 함께 있거나 또는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아줌마들이 “왜 혼자서 오셨어요?”하고 의아한 어조로 묻는다. 나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어 보였다. 산에서 내려오자 나는 ‘꽃파는 아저씨’ 한테 장군묘에 꽃을 두 묶음 드려야 하는데 한 번 더 갔다 와야겠다고 했다. 온통 젖은 나의 옷을 보던 그 아저씨는 자가용으로 손수 나를 태우고 함께 산소로 향했었다.
“백부님, 이제 더는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명년 재입국할 이때에 다시 찾아뵐게요. 불체자가 아닌 떳떳한 동포로 살아갈게요!” 나는 가만히 속삭이었다.
대한민국은 이제는 우리 동포들에게 잘사는 나라로 기억된다. 그것은 우리 한민족이 보여준 부지런함과 근면, 성실함이 심어놓은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의 행복은 목숨 바쳐 자유를 지킨 지사들의 덕이 아니겠는가!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단 하루라도 전쟁이 없는 세계를 위해서 묵념해 보자.
아직 아물지 않은 ‘6.25’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의 ‘3.8선’도 잊으면 안 되겠다. 휴전은 휴전이지 종전은 아니다. 5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통일이 안 되면 불행한 전쟁은 또 이어질지 모른다. 어디에 살아도 우리는 백의민족의 후손이며, 결국 죽어서도 잊지 못할 모국은 대한민국일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태어나서 자란 조국도 잊지 않을 것이다.)
꽃다운 청춘을 평화에 바친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한다.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영혼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새삼 다짐하면서 현충일을 보내고 싶다.
2006년 8월15일
김 순애
<본문은 '동북아신문'의 편집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