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작가포럼/문학작품특집52]배정순 수필 '50대에 겪는 사춘기' 외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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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작가포럼/문학작품특집52]배정순 수필 '50대에 겪는 사춘기' 외2편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9.03.05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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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 솔직하게, 느낌이 가는 수필을 고집하는 듯 싶다...<편집자>

▲ 배정순 약력: 전 서울 신대림초등학교 다문화이중언어 강사. 서울교육대학교 교육학 석사, 인하대 대학원 박사과정. 現인하대 BK대학원생 연구원. 중국연변작가협회 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동북아신문 기자. 시, 수필, 칼럼 다수 발표. 수상 다수. 한동포교사협회 회장

제1편  

50대에 겪는 사춘기

 

요즘 애들은 사춘기가 빨리 온다는데 나는 사춘기가 없이 지나간 것 같다. 그런데 50대에 사춘기가 오다니...

내 나이 올해 54세이다. 갱년기가 찾아올 나이인데 때 아니게 사춘기를 겪는 듯하다.
나는 중국 길림성 훈춘시 한 시골마을의 평범한 집에서 6남매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 둘 언니 셋이다. 그러다보니 집에 대소사를 모두 오빠와 언니들이 맡아하였다. 그러면서 항상 하는 말이“넌 몰라도 돼.”,“넌 안 해도 돼.” 하는 말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가사 일을 할 줄을 몰랐고 일솜씨가 서툴렀다.
한창 꽃나이에 주변에서 선 볼 사람을 주선해주면 부모님과 언니들이 인물, 키, 학벌, 경제조건을 따져보고는 “너랑 너무 짝이 기운다.”고 하면서 다 물리쳐버렸다. 혼기가 차도록 변변한 선 한 번 못보고 연애 한 번 못해봤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병도 있고 연로하니 오빠가 모셔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과년한 여동생까지 데려가기에는 부담이 되었다. 내가 짐이 된 셈이다.

33살이 되던 해에 그냥 떠밀려서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남자가 액취증이 있는 것도 모르고 급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이렇게 한 결혼생활이 행복할 리가 없었다. 얼마 못가서 이혼하게 되었다. 그해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시고는 언니들한테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이혼한 후 임신 2개월이 된 걸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는 이미 나이도 많고 다시 임신을 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애를 낳겠다고 했다. 어느 날 언니 셋이 동시에 집에 들이닥쳐서 펄쩍 뛰면서“너 바보가 아니야. 그 못난 남자의 애를 낳아서 뭐하냐?”, “너 그럼 미혼모가 되여 앞으로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없어.”라고 하면서 기어코 유산하라고 했다. 나는 “그만해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라고 외쳤다. 그러나 워낙 쭉 의존해서 살다보니 주견이 없고 또 지금이야 미혼모가 애를 키워도 무방하지만 20년 전에는 비난을 받던 시대라 걱정되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래도 나보다 세상을 더 많이 살아온 언니들의 말이 맞을 거야.) 하면서 결국은 병원에 가서 유산하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마음이 아파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언니들은 “잘했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애도 낳고 행복하게 살면 돼.”라고 위로해주었다. 그런 말들이 나한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슬하에 자녀가 없다.

둘째 형부는 술만 마시만 폭력을 휘두른다. 부부싸움을 밥 먹듯이 한다. 나 같으면 하루도 살기 힘들 텐데 그래도 딸도 낳고 그럭저럭 살고 있다. 그 후로 언니들이 자녀들과 희희낙락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볼 때마다 내 처지가 더욱 외롭고 마음은 허전하고 아팠다.

두 살 위인 셋째 언니는 초등학교만 조선족 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부터는 한족(汉族)학교에 다녔다. 언제 글을 쓴 거 보니 한글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엉망이고 한자도 자주 쓰지 않다보니 거의 다 잊어버렸다.
내가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줄로 알았던 언니들의 사는 모습과 문화수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48세가 되던 해에 서울교대에서 다문화 이중언어강사 양성을 받겠다고 했을 때 “너보다 젊고 유능한 애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이제 공부해서 어디에 다 써먹느냐?”고 하면서 반대를 하였다. 예전 같으면 또 언니들의 말에 따랐겠지만 하고 싶은 일이라 말을 듣지 않고 등록하였다. 양성을 받은 후 서울시교육청소속으로 다문화학생들이 많은 초등학교에 배정을 받아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때에야“너 힘들까봐 그랬지.”라고 말하면서 꼬리를 내렸다.

50세가 되는 해에는 서울교대에서 석사공부를 하겠다고 했더니 또“그 나이에 이제 석사를 해서 어디에 쓸 거냐?”, “돈을 헛되게 쓰지 말고 이제 잘 먹고 편안하게 살아라.”고 하면서 극구 반대하였다. 그래도 나는 늦게 찾아온 공부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난 여러 가지 서류를 준비하고 면접을 보고 합격하였다. 간절히 원했던 공부라 2학기에 장 수술을 받고 몸이 허약해서 요양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힘들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어려운 논문심사에도 통과하였다. 서울교대에서 가운을 입고 교육학 석사학위 수여식을 할 때 정말 뿌듯하고 하늘을 날아갈듯이 기뻤다. 이런 모습을 보고 언니들은“개천에서 용 났어. 가문의 영광이야.”라고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내친 김에 지난해에는 박사과정에 도전하였는데 국제정석장학금으로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고 입학하게 되었다. 요즘은 원 없이 공부하면서 연구 삼매경에 빠져있다.

어느덧 반백이 된 50에 사춘기를 겪는 셈이다. 사춘기는 어린애에서 어른으로 도약하는 시기이다. 사춘기의 반항은 단순 반항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설계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라도 스스로 완성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런데 나는 언니들의 과도한 관심과 간섭으로 인해 제대로 된 사춘기를 겪어 보지도 못하고 심리가 억압된 채로 어른이 되었다. 마치 어릴 때 밧줄에 묶인 코끼리와 같았다.
언니들도 실수투성이고 편협한 생각을 하는 보통 인간이고 나에게 하는 말은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또 그 말에 꼭 따를 필요도 없으며 내 생각대로 해도 일이 잘 못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추구하는 목표와 가치관이 다르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자격이 없고 대체해서 살아줄 수도 없다.
동화‘망아지가 강을 건느다’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시냇물은 다람쥐에게는 빠져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깊은 것이고, 소에게는 발목까지 올 정도로 얕고 망아지가 건너보니 무릎팍까지 왔다고 하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직접 체험해보고 실천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많이 우회해서 왔지만 뒤늦게 사춘기를 잘 겪으며 어른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겨서 성공했을 때에 자신감이 더욱 높아진다.

그런데 요즘도 헬리꼽터 맘이라는 신조어가 생긴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부모나 웃어른들이 관심과 사랑이란 미명하에 애들의 건전한 성장에 필요한 사춘기를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착한 어린이 콤플렉스로 억압을 받으면서 평생을 자기답게 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요즘 나처럼 겉모습만 어른이고 제대로 된 사춘기를 겪지 못한 애어른들이 주변에 심심찮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타인과 자기에 대한 객관적인 관망이 필요하다. 다음은 자기를 믿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실행해 나아가면 참다운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늦게나마 사춘기를 잘 겪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9. 03. 04
서울에서

 

제2편

멋진 의자나무

 

나는 며칠 전에 대만작가 량슈린(粱淑玲)이 쓴 동화책 『의자나무(椅子樹)』를 읽었다.
책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거인 에이트(埃特)의 꽃밭에는 의자처럼 생긴 이상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무는 제멋대로에다 자기밖에 몰랐다. 언제나 목을 쭉 빼고 있는 걸 좋아해서 목만 길게 늘어난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무는 새들이 떠드는 게 싫어서 가지도 없이 잎사귀 몇 개만 달고 있었다. 새들이 집을 지을 수 없게 말이다.
나무는 벌이나 나비가 놀러오는 것도 싫어서 꽃에서는 향기도 나지 않았다.
나무 열매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열렸다가 아침이면 모두 떨어져 버렸다.
나무 몸통은 애들이 올라오는 것이 싫어서 미끌미끌했다.
가지도 잎도 없는 나무는 그늘도 없어 아무도 쉴 수가 없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나무를 동물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나무는 늘 외톨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거인 에이트는 산책을 하다가 의자 모양을 한 이 나무에 걸터앉아 쉬게 된다. “아, 너에게 앉으니 정말 기분이 좋아”라고 말한다.
난생 처음으로 칭찬을 들은 나무는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한 뭐라 말할 수 없는 행복한 기분이었다. 에이트가 무거워 견딜 수 없었지만 꾹 참았다.
그 후 에이트는 자주 찾아와서 상냥하게 말을 걸기도 하고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였다.
나무는 햇볕으로부터 에이트를 지켜주려고 조금씩 가지를 키웠고 초록 잎들도 무성해졌다.
봄이 되자 많은 꽃도 피웠다. 새들과 다람쥐들도 놀러왔다. 나무는 새들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고 동물들을 친절하게 반겨 맞았다.
그러자 꽃밭에 사는 모든 친구들은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다.

딱따구리는 벌레가 파먹지 않는지 자주 살펴보고, 개미와 지렁이는 나무가 더 멀리까지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흙을 부드럽게 해 주었다.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의자나무는 에이트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다.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아래는 가장 시원한 곳이 되었다.

의자나무가 변화한 것은 진심어린 칭찬과 사랑 때문이었다.
감동을 주고 반전이 있는 재미있는 동화였다. 한 번 읽고 또 한 번 읽었다.
나무도 누군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줄 때 무성한 나무로 자라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3학년에 다니는 김준이라는 개구쟁이가 있었다. 학교에 등교할 때면 꼭 손에 장난감을 들고 온다. 수업시간에도 책상 우에 올려놓고 가지고 논다. 넣으라고 하면 또 책상 밑에서 만지작거린다. 율동을 할 때면 이상한 동작을 하거나 여학생들을 괴롭힌다.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면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달아난다.

어느 날, 신체 각 부위 명칭을 소개할 때 그림을 그리라고 했더니 아주 잘 그렸다.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면서 김준의 그림을 가지고 설명했다. 평소에 산만하던 애가 수업시간 내내 집중을 하였다.
또 어느 날, 내가 좀 아파서 며칠 학교에 출근 못하다가 나갔더니 김준이 조심스레 다가와서 “선생님 이제 다 나았어요? 괜찮아요?”라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것이었다. 내가 칠판에 준비물을 힘겹게 붙이는 것을 보고는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의자 위에 올라서서 붙였다. 전체 학생들 앞에서 칭찬했더니 쑥스러워 하면서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었다. 그 후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수업시간만 되면 가방에 집어넣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 되었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돌이켜 보니 나도 처음엔 못생긴 의자나무였다.
나의 성장에 영향을 준 3명의 거인 에이트가 있었다.
첫 번째 에이트는 아버지였다.
의사인 아버지는 항상 교훈적인 이야기로 배움을 격려해주셨다. 공부하기 싫어할 때면 당나라 유명한 시인 이백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고 꾸준히 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셨다. 아버지는 텃밭에 다양한 약초를 재배하였다. 낮에는 환자를 진료하고 늦은 밤까지 의학 서적들을 읽고 자기몸에 침을 놓으면서 연구하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보물단지라도 들어있는 것처럼 항상 자물쇠를 잠가놓던 장롱을 열어봤더니 의학서적과 처방전과 청진기와 침구들이 정연하게 놓여있었다. 동네 분들 앞에서 자랑하던 내가 초등학교시절에 타온 덕지체(德智體)가 우수한 3호학생(三好學生)상장과 우수학생 성적이 적혀있는 통신부(通信簿)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무슨 보물인양 20여년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니... 아버지의 사랑에 가슴이 뭉클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금도 나는 어지간히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을 떠올리면서 여간해서는 힘들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이겨낸다.

두 번째 에이트는 초등학교시절에 조선어문을 가르치시던 안진영 선생님이시다.
내가 조선어문 교과서에 실린 글을 읽을 때 주인공의 감정을 잘 표현해서 읽었더니 동화구연을 잘한다면서 칭찬을 해주셨다. 그 칭찬에 힘입어 교내에서 열리는 동화구연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작문을 쓰면 글짓기에 소질이 있다면서 칠판보에 써주시고 학교방송에서도 방송하고 신문에도 실어주셨다. 이것이 동기부여가 되어 지금 기자로 작가로 활동하게 된 것 같다.

세 번째 에이트는 한국에서 만난 서울중대부초 이점영 교장선생님이시다.
2004년에 고국인 한국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서울에 왔다. 그 이듬해 이력서를 써들고 무작정 찾아가 면접을 본 학교가 서울중대부초다. 며칠 후에 방과후중국어강사 합격통지가 왔다.

그때 수업하던 교실 담임 선생님이 바로 이점영 선생님이시다. 수업이 끝나면 개구쟁이 친구들을 꼭 안아주시면서 “착한 홍준이 다음시간부터는 잘 할 거지” 하고 약속을 받곤 하셨다.
나한테는 “선생님은 애들을 사랑하고 수업도 재밌게 하는 유명한 강사이십니다.”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연변조선족 특유의 억양과 사투리가 튀어나오는데 그때는 말투도 어색하고 수업 기교도 부족한 나에게 항상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격려를 해주셨다.

피그말리온(期待莠應)효과라고 기대에 부응하려고 더 노력하였다. 나는 매체활용을 잘하려고 짬짬이 시간을 내서 컴퓨터를 배우고 자격증을 땄다. 학생들의 특성에 맞게 중국어를 가르치려고 한국방송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하여 4년간 공부를 하여 졸업하였다. 또 더 나은 교사의 모습을 꿈꾸면서 서울교육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교육학 석사과정를 취득하였다. 교육전문가의 꿈을 지니고 지난해에는 인하대 국제정석장학금 전액을 받으면서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중대부초는 사립학교라 학생과 학부모들의 기대가 컸다. 준비물을 꼼꼼히 챙기고 학생들이 챈트, 동요를 부르면서 활동을 통하여 즐겁게 회화를 익히도록 하였다. 중국어회화수업은 학생과 학부모들이 인정하고 좋아하는 수업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나를 오늘의 멋진 의자나무로 키워준 많은 에이트가 있었듯이 이젠 나도 누군가의 에이트가 되어 내가 받은 것을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아낌없는 칭찬과 사랑으로 멋진 의자나무를 키우는 에이트로 거듭나기를 다짐하면서 오늘도 교단에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2019. 03. 05.


 

제3편

싱글모임

          


옛날에는 이혼했거나 미혼으로 혼자 있으면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뒤에서 수군대고 본인도 남의 눈치를 살피고 주눅이 들었다. 그러나 요즘은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많다. 4가구 당 한 가구는 1인 가구라고 한다.

1인 가구가 늘어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취업난에 결혼비용에 자녀교육비까지 모두 결혼을 어렵게 한다. 결혼을 필수로 보던 관념이 바뀌어서 이제 선택으로 되었다. 무거운 것은 배달을 시키고 햇반 같은 간편 음식에 배달음식까지 세상은 혼자 살기에 편하게 되었다. 백세 시대라 사별하고 혼자 지내는 사람도 많다. 또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산다는 말은 옛말이 되었다. 한번 사는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다 가겠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 지지고 볶으면서 함께 지낼 필요가 있겠냐 하는 것이 요즘 다수의 생각이다.

그럼 이런 싱글들의 생활은 어떠할까? 외롭고 적적하지 않을까?
대부분 싱글들은 일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과 대인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아는 A씨는 중국과 베트남에 회사를 차린 기업의 사장이다. 업무를 지시하고 점검할 때는 예리하고 빈틈이 없다. 일 외에도 다양한 모임과 행사에도 참석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지만 활기차고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B씨는 술을 좋아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과 이혼하고 중학생 아들과 함께 지하방에서 살다가 회사에 다녔다. 퇴근 후에는 중국어 과외도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아파트를 사고 보란 듯이 잘 살고 있다. C씨는 부푼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왔지만 도박에만 전념하고 신용불량이 된 남편과 더는 살 수가 없어서 정리하였다. 집도 절도 없이 밑바닥에 떨어졌지만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뜻을 굽히지 않고 석사과정을 마치고 또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국가 장학금으로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았다. 지금은 대학원생 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게 되었다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사람은 사회성 동물이다. 혼자 사는 것이 좋은 면도 있지만, 또 누군가와 함께 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살면서 어떤 때가 가장 힘든가 물었더니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명절 때, 아플 때 남들이 남편자랑, 애들 자랑을 신나게 할 때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모임에 안 가게 되고 사람들을 멀리하기도 한다. 100% 만족스러운 인생은 없다. 특히 가족을 중히 여기는 한국의 전통적 사회풍조 속에서는 아직도 왠지 다수가 하는 대로 따라 해야 옳은 것 같고 그렇지 않은 소수자는 틀렸다고 생각하거나 불편하게 여긴다.

사람들은 결혼을 성(城)에다 비유하기도 한다. 성안의 사람은 성밖이 좋아 보이고, 성밖의 사람은 성안이 좋아 보이듯이 결혼한 사람은 자유를 누리며 혼자 있는 사람이 부럽고, 혼자 있는 사람은 둘이 오순도순 지내는 것이 좋아 보이는 것은 인간의 욕심인가 부다.
요즘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다양한 싱글모임이 나타나고 있다. ‘좋은 인’, ‘플러스’, ‘귀족회’ 등 다양한 모임이 있다. 주로 명절이나 휴일에 모임을 가진다. 만남에 나가 보았더니 40~50명씩 나오는데 거의 남녀 성비가 비슷하다. 모임에서는 뭘 할까? 어떻게 만남이 이뤄질까 궁금하였다. 그래서 몇 번 나가봤다. 일단 식당에서 숯불고기에 술 한 잔을 한다. 술은 강제는 아니다. 분위기상 가볍게 한 잔 하면서 일상 오가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한다. 식사가 끝나면 노래방으로 간다. 노래방에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한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회장한테 미팅을 신청해서 잠깐 미팅을 하거나 그냥 눈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따로 나가 차 한 잔 하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한테 어떤 사람을 만나면 좋겠냐고 물으면 다들 마음에 드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여생을 함께 하면 좋겠다고 한다. 대체 그 좋은 사람이란 기준은 뭐지? 나도 몇 번 남자를 만나 봤는데 번마다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조건을 안 본다지만 학력이 너무 낮아도, 외모가 너무 못 생겨도 똑바른 직장이 없어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를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요즘 사람들은 결혼관도 달라졌다. 그냥 밥 같이 먹고 여행도 같이 다니면 된다는 사람도 있었다. 꼭 한집에서 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각자 다 큰 자녀가 있고 유산문제로 가족불화가 일어나는 사례도 심심찮게 있으니 누구를 만나고 좋아해도 꼭 책임진다는 생각도 없고 각자의 삶을 살다가 한 번씩 만나 회포를 풀고 굳이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단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졌다고 할까? 아니면 나의 결혼관이 고루한 건지 아무튼 여직 맘에 드는 짝을 못 만났다.

파랑새를 찾아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처마 밑에 있더라는 말이 있듯이 나와 맞는 사람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 있다.

결혼생활은 맞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맞춰서 사는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맞춰 줄 마음의 자세가 준비되어 있는가? 

내가 찾는 좋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이고 어디에 있을까?
나는 또 누구의 마음에 드는 좋은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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