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센지 앞 뜰, 그 들꽃 한 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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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센지 앞 뜰, 그 들꽃 한 다발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6.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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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센지 앞 뜰, 그 들꽃 한 다발

                                                                      유 금 호(소설가/ 목포대 교수)

고국을 떠나보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사실 평소에는 무심하게 대하던 태극기를 외국 어느 엉뚱한 공간에서 보거나, 애국가를 듣게 되는 경우 가슴이 뭉클거린 경험은 외국에 나가는 경우 한 두 번씩은 있었을 것이다.

공기나 물처럼 늘 우리 곁에 당연한 듯이 있어 와서 고마움을 못 느끼던 것들이 어느 순간 우리 생명에 직결되어 있었음을 확인하고 놀라는 것처럼 조국 역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삶이란 지난 뒤에야 되돌아 보면서 확인되고, 잃은 다음에야 사라져버린 것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 우리들 보통 사람들의 인식 한계일지 모른다.

과거 월남 패망이후 바다를 떠돌던 보트 피플이나, 요사이 유고 코소보 난민들의 끝 없는 피난 행렬을 보면서 그것들을 우리와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극들은 특수한 민족이나 지역만이 겪는 숙명이 아니다. 지키는 사람과 의지가 없을 때 그것들은 어느 민족이나 집단에게도 가능한 보편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나는 이름없는 들꽃으로 만든 작은 꽃다발 하나 때문에 참으로 많은 충격과 부끄러움을 느낀적이 있었다.

작년 10월, 소설가들 몇 사람과 취재차 쓰시마(對馬島)에 며칠 다녀 온 적이 있었다. 입국 절차 때문에 부산에서 뱃길로 바로 들어갈 계획을 바꾸어서 후꾸오카로 나갔다가 거기서 밤 배편으로 네 시간을 내려가 그 작은 섬을 찾았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가을비에 젖어 가던 들꽃 한 묶음을 보았었다.

부산에서 맑은 날이면 육안으로도 건너다 보이는 섬, 쓰시마는 일본 땅이면서도 제일 가까운 저희들 땅과의 거리가 141km인데 비해, 부산에서는 49.1km밖에 안 되는 지리적 조건이 우리 한국인에게는 묘한 복합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다. 더구나 현재도 섬 곳곳에 너무 많은 우리 역사의 체취가 묻어 있는 곳이어서 우리는 섬에 닿기도 전에 그 섬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더구나 그 무렵 다시 독도 문제가 떠 올라 있었고, 한일간의 어업 문제 역시 현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상상력은 소설가들답게 수많은 비약을 했었다.

에도(江戶)시대, 4,5백명의 조선 통신사들이 에도(지금의 東京)를 향하면서 일단 상륙했던 그 섬에는 당시 통신사들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행렬도가 16.58m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보관되어 있고, 이쓰하라쵸(嚴原町) 시가지 곳곳이며, 이즈하라쵸 강의 작은 돌난간에도 그 행렬도 부분 그림들이 여러 곳에서 눈에 들어 와 우리와의 오랜 애증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 쓰시마이다.

거기에 국권을 빼앗긴 고종(高宗)이 그토록 사랑했다는 덕혜옹주를 대마도주, 소오(宗)가에 정략적으로 결혼을 시켜야 했고, 옹주의 비극적 생애가 주는 상징성까지 묻어 있는 땅이어서 우리는 쓰시마에 발을 딛기 전부터 많은 감회에 한꺼번에 휩싸였다. 그 정략 결혼의 비극은 3년 만에 끝났지만 비참했던 덕혜옹주의 일생이 우리에게 조국이며, 국권이라는 게 무엇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화두로 떠올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 사이, 딸이 하나 있었던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 딸 역시 철이 들면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났다는 역사 뒷편의 아픈 이야기를 되뇌이면서, 우리는 아버지로써 고종이 겪었을 연민과 그 숙명적인 비극 속의 어린 소녀를 화제에 올렸었다.

국력이 있었다면 덕혜옹주의 비극도, 한 소녀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 아니었겠는가. 우리가 진즉 그 쓰시마 땅을 차지 해버렸다면 한일간의 비극적 역사의 판도나, 어업협정 역시 어느 부분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조선 초까지만 해도 쓰시마는 우리 조정에 조공을 바쳐 왔고, 지금도 당시 조선 왕의 하사품들을 국보로 보관하고 있는 땅이다. 그런가 하면 원나라와의 연합군이었긴 했지만, 이미 우리 고려 군사들이 두 번이나 점령을 했던 땅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무관심 속에 일본은 그 땅에 죄수들을 보내 자기들의 영토로 확인한 것이 아니었던가.

최근 계속 뉴스의 중심 속에 있는 코소보 쪽 사태를 생각하면서 문득 나는 그때 가을비가 내리는 늦은 오후 빗물에 젖어가는 비석 한 개 앞에 오랜도록 묵념을 했던 기억을 떠 올린다.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大韓人 崔益鉉先生 殉國之碑 ) 앞이었다.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는 절, 수센지(修善寺)의 앞뜰에는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비석 한 개가 있었다. 조선말의 유학자이자, 의병대장이었던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거기 서 있었다.

이미 그날 오전, 박물관 경내의 조선통신사지비(朝鮮 通信使之碑)와 1703년 2월 5일 108명의 조선국 역관사들이 부산을 떠나 쓰시마를 향하던 중 와니우라 항을 목전에 두고 풍랑 속에 전원 사망한 것을 위무하는 조선국 역관사 조난 위령비를 섬의 북쪽 끝, 카미쓰시마쵸 한국

해풍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을 것 같던 기분이 가시기도 전이었다.

우리는 적국, 일본에서 나는 곡식으로 지은 밥을 먹을 수 없다고 포로로 잡혀 갇혀 있는 상태에서도 끝까지 항식을 했다는 지조 강한 선조의 비석을 그 일본 땅에서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석 앞에 누가 가져 다 놓았는지 시들어가는 들꽃 한 다발이 가을비에 젖고 있었다. 누군가 생각 있는 한국 관광객이 있었겠거니 했다.

그런데 일행이 절을 막 빠져 나와 좁은 골목길을 걸어 내려 오던 길에 동행이었던 H형이 눈짓을 하는 거였다. 우리와 스쳐 길을 비켜 올라가는 허리 구부러진 노인 한 사람의 손에 들린 들꽃 때문이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우리 두 사람은 이미 나왔던 절 입구 쪽으로 되돌아 올라 갔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본 노인이 손에 들고 왔던 들꽃 다발을 거기 최익현 선생 비석 앞에 놓아두고 합장, 묵념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존경하고 말고요. 대단한 어른 아닙니까? 얼마나 지조 있고, 훌륭한 선비입니까? 쓰시마 사람들, 최 선생님 이야기는 거의가 다 알고 말고요. 우리 일본 사람 중에 한국의 안중근 선생을 추모하고 존경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최익현 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는 가요?”

일본 노인은 우리를 도리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밀려오던 부끄러움을 생각하면 지금도 귓볼이 붉어진다.

최익현 선생의 꿋꿋한 선비정신과 절개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일본 땅, 쓰시마에 그의 비석이 서 있는 것도, 자기들 기준으로는 적이 되어야 할 선생의 비석에 꽃을 바치는 일본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일행은 심한 부끄러움으로 그날 늦게까지 가을비를 맞았었다.

그곳 쓰시마에는 신라시대 박제상의 비석도, 역관사들의 조난 위령비도 서 있다.

우리들 모두가 그분들 비 앞에 까지 찾아 가 들꽃을 바치고 묵념을 올리는 것이야 쉽지 않겠지만 바로 우리 곁 가까운 곳에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해준 많은 분들이 있었음은 기억하며 주변을 돌아 볼 일이다.

우리가 물처럼, 공기처럼 우리 곁에 당연하게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조국이 지켜져 온 뒤편에 얼마나 많은 분들의 자기 희생과 애국심이 뒷받침되었는가를 한번쯤 진지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계절에 지금 우리는 와 있다. 지금 세계의 이목 속에 갈 곳이 없이 국제 미아로 내몰리고 있는 코소보 피난민들의 이야기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만이 아닌 보편적 상황일 수 있다는 것을 한번씩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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