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조선족 ‘코리안 드림의 전개와 성과(1)
상태바
연변조선족 ‘코리안 드림의 전개와 성과(1)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6.06.0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Ⅳ.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 


     1. 여권위조  


조선족 중국인 등 외국인들이 여권을 정교하게 위조하거나 변조하는 수법으로 김포국제공항 등을 통해 국내 입출국을 기도하는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 여권 사진 바꿔치기 등 전통적인 수법 외에도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리거나 훔친 차명, 도명 여권까지 등장하는 등 위변조 수법이 갈수록 고도화되었다.1)

위조여권 적발건수를 보면 90년에 170건이었던 것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95년에는 556건에 이르렀다.2)   여권위조가 가장 심했던 96년은 1/4분기에는 김포공항에서 적발된  위변조 여권 소지자도 185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76명보다 무려 2.4배, 109명이나 늘어나는 등 여권 위변조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었다. 95년 위변조 여권으로 입출국을 기도하다 김포공항에서 적발된 외국인중 중국인이 전체의 절반을 넘는 55%(304명)에 달해 중국인들이 여권 위변조를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중국인들의 여권 위변조가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는 것은 한중 수교 이후국내에 취업한 조선족 중국인들이 상당한 부를 얻게 되자 중국인들이 국내에 입국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96. 6. 12).

여권위조 수법은 국제조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위조된 한국여권을 이용해 중국인이나 조선족을 제삼국으로 불법입국 시키는 국제 여권 사기단이 있다고 북경서 포착된 바도 있다. 미국 애리조나에 주소를 둔 범죄조직은 가짜 한국여권을 만들거나 분실된 한국여권을 변조해 중국인이나 조선족에 파는 수법을 사용해왔다.3)

이 사기조직은 한국이 유럽 등 선진국들과 비자면제협정을 맺고 있는 점을 이용, 가짜 한국여권으로 이들 나라들에 불법체류 혹은 이민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중국인과 조선족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96. 7. 9)



2. 불법체류  


중국 조선족들은 흔히 남한은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한다. 남한을 방문하고 오면 잘못해 망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엇인가 달라지는 사람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남한기업에의 취직을 기회로 인식하여 1994년 7월말까지 한국을 방문한 인원은 12만 300명인데 그 중에서 불법 체류자가 20,784명으로서 전체 방문자의 17.27%를 차지한다. 불법체류자는 취업이나 자녀교육, 사회복지의 수혜대상에서 제외되고 산업재해나 사고 발생시에 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으며 벌금을 물고4) 강제출국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불법체류자의 증가는 사회적 불안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불법체류 이기 때문에 과다노동을 하거나 체불을 당하게 되어 한국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표 1>   哿불법체류자 및 강제출국자 현황

  

                                                                  (단위; 명)

 

1992

1993

1994(7월)

불법체류자수

강제출국자수

22,128

27,026

21,387

12,980

20,784

2,819

     자료: 외무부 재외국민 영사국, 구소련 및 중국 교포 입국조건

           완화 문제 검토여부, 1994  



국내 불법체류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 불법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95년 3월 국내에 불법체류중인 중국교포 3만여 명중 2000여명을 규합해 󰡐중국노동자협회'를 결성한 뒤 96년 5월 1일 보라매공원에서 전국민주노총이 주최한 세계노동절대회에 참가, 외국인노동자보호법제정 촉구시위를 하는 등 재야단체들과 연계해 대정부 압력활동을 해왔다(96.7.18).5)

정부는 이에 대해 주모자에 대한 강제출국 등 강경조치를 취했는데 이러한 강경조치에 대응하여 6월 10일부터 항의농성을 벌였으며 그들은 실제로 3-4년전부터 네팔, 인도, 방글라데시인들 사이에 숱한 친목모임이 결성돼 국경일이나 종교축일, 민속절 등의 행사 때 모여 친목활동을 펴고 있다󰡓며 당국의 무리한 법적용을 비난했다(한겨레 신문, 96. 7. 20)

이러한 중국 조선족을 중심으로 한 불법체류 문제는 근본적의로 한국의 인력난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소득수준이 높아지자 소위 3D직종을(Danger, Dirty, Difficult; 위험한 일, 더러운 일, 힘든 일) 피하게 되거나 임금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부득이 이러한 현상은 조선족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한국에 입국하고 불법체류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인데 한국사람들이 기피하고, 짧은 시간에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고용하는 기업들이 사업기반이 단단하지 못한 중소기업들이 많았으며 악덕업주인 경우에는 조선족의 불법체류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임금 체불등 각종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조선족들을 울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한국의 심각한 인력난을 해결하고 또 조선족들의 불법체류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족 연수생들을 대거 초청하게 되어 해결하고자 하였다.



3. 농촌총각 결혼  


한국산업의 공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이농현상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농업비중의 하락을 포함하여 농촌 총각의 만혼내지 결혼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젊은 세대들의 이농과 도시진출은 남성보다는 여성들의 진출이 활발하여 농촌의 성비는 불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농사일이 육체적 노동이 심하다는 일반적 인식과 고향을 지켜야한다는 가족주의적 사고가 젊은 남성들의 농촌잔류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반면에 젊은 여성들은 도시에서의 취업, 특히 서비스산업에의 취업이 남성보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에 도시로의 진입이 활기를 띄우게 되었다.

그 결과 혼령기의 남녀 성비가 지역적인 불균형을 가져오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여성의 혼령기의 여성비율이 높아지면서 여성의 만혼 내지 독신녀의 비율이 높아졌고 농촌에서는 총각들의 만혼이 보편화되면서6)  도농간의 혼령기 성비에 불균형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래도 도시에서의 혼령기 여성들은 농촌총각과의 결혼을 회피하게 되었고 농촌 총각들은 배우자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반면에 중국 조선족 처녀들은 한국으로의 한국진출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으로의 취업이 선망의 대상인 상황에서 한국남성과의 결혼은 본인의 한국 진출은 물론이고 친정식구들까지도 한국초청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한국 총각과의 결혼은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농촌총각과 연변 처녀들의 결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 지게되었다 .7)  그러나 한편에서는 한국총각과의 결혼을 위하여 수많은 초청장 사기사건과 위장 결혼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변처녀들의 한국행으로 연변총각들의 결혼이 어렵게 되었고8)  그 동안 주류를 이루지 못했던 연변 조선족 총각들과 중국 처녀들과의 결혼이 많아지면서 조선족들의 중국인 동화 현상을 우려하게까지 되었다. 나아가 조선족 집단촌과 사회의 기반이 붕괴되기 시작하여 조선족의 정체성 유지까지 우려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조선족 처녀들과 결혼한 경우에도 순수한 결혼동기가 아닌 경우에는 위장결혼, 결혼후 도주, 농촌에 남지 않고 도시로의 진출, 이혼사태 등이 나타나면서 역시 부작용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Ⅴ.  맺 음 말 



그 동안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약장수, 보따리 장수, 3D 취업, 국제결혼 등으로 코리안 드림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조선족 사회기반이 균열되고, 연길시는 소비 도시화하였으며, 사기피해로 적지 아니 시달리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도 여권위조, 불법체류, 농촌총각 결혼과 같은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동시에 미치게 되었다.

어쨌던 200만에 이르는 중국연변의 조선족들은 한국의 기업가들이 중국의 사업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와 더불어 부유한 한국과 기업가들은 중국의 조선족에게 울타리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체제전환과정에서 시장경체제제에 앞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중국을 어느 정도 알게되고 중국어도 할 수 있는 한국유학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한국어를 곧 잘하는 한족들도 늘어났다. 결국 중국을 잘 모르고 언어에도 문제가 있었던 진출 초기에는 통역은 물론 사업알선에 이르기까지 조선족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김태홍, 57) 언어소통 가능하고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지자 조선족의 초보적인 도움의 필요성이 적어지자 조선족은 서서히 초기적인 역할을 마무리하면서 역사적인 사명을 다하게 되었다.

물론 조선족들은 열심히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리한 대우를 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한국인 사업가와 조선족간에는 이해상충이 발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수요자 시장 성격인 한국인 기업가 측에서는 같은 값이면 영어나 한국어가 가능한 중국인을 쓰는 것이 낫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조선족과 한국 기업가들과의 협력은 중국이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화과정에서 상호 협력자로서의 역할은 중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변에 진출한 한국의 자본은 투자자본의 성격이 미약하다. 연변의 외국투자기업 가운데 한국업체가 약 75%를 차지하지만 대우호텔, 갑을 방직, 동일, 쌍방울 현대 강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이 수십만 달러 규모의 보따리 장수 수준에 불과했다. 중소규모의  자본은 대부분 소비재나 유흥 향락산업으로 단기이익에 집착하면서  연변을 소비지역으로 변화 시켰다.9)

이러한 환경을 가져온 이유로서는 조선족이 한국에서 대개 3 D업종에 일하다보니 기술축적이 안되었고 벌어온 돈으로도 제조업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노래방, 식당 등에 한하였기 때문이다.10)

조선족들은 한족에게 조선족이라고 하대 받는다. 북조선에서는 자본주의에 물들었다고 비난받는다. 남한 사람들에게는 못 산다고 업신여김을 당해 설자리가 없다. 그래서 조선족은 끈이 끊겨나간 연이라고 자탄을 하고 있다. 200만의 조선족, 그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조국통일의 항일전사로서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던 일송정 푸른 솔의 선구자였으며,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던 울밑에 선 봉선화이었다. 푸른 솔의 독립정신과 봉선화의 붉은 핏물과 같은 선혈은 우리 독립의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잊지 말고 200만 동포에게 따뜻한 애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냉전시대와 조국분단시대를 함께 겪어온 중국 동포들에게는 성장한국을 바라보면서 민족적 우월감으로 다소 어깨를 펼 수 있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또 체제상으로 연변은 남북한을 연결시키는 위대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연변사람들은 연변을 방문하는 1만 5000명의 북한인과 매년 연변을 찾는 수만 명의 한국인들과 모두 접촉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을 연결시키면서 조국통일은 물론 민족경제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위대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부강한 통일조국이라는 먼길을 가는데 발에 걸리는 돌 몇 개를 두고 서로 얼굴을 붉히지 말고 어떠한 문제라도 진지하게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조선족과의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