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아래 수필은 중국 조선말 표기법을 한국표기법으로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편집자 주)
1. 독서하는 처자
아침 산책길에 노란 달맞이꽃에 발목을 잡혔다. 가을도 다 가는 시점에 어쩌면 저렇게 모질게 피여있는지 모르겠다. 그 옆에 왕골도 한포기 굳게 자라고있는게 보였다. 전에도 저 자리에 있었겠건만 나는 왜 보지 못했을가. 할아버지는 저 왕골로 바구니도 이쁘게 만드셨었지.
양재천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한달전까지만 해도 붉은 빛을 자랑하던 목백일홍(紫薇-배롱나무)은 뼈만 앙상하니 남아있고 푸르게 푸르게 젊음을 뽐내던 옥란도 꽃을 떨군지 이윽했다. 대신 金银木만이 언제 어떻게 맺었는지 앵두같은 빨간 열매들을 주렁주렁 많이도 달고 섰다. 산수유도 한창 열매를 익히고있는중인데, 강 량옆으론 능수버들 수양버들이 예이제없이 키재기하고있었다.
슬슬 돌고 도는데 아하, 이건 또 뭔가? 글쎄 명년봄에나 피울지 하던 오동나무가 자주색 꽃망울을 이쁘게 입술을 내밀고있지를 않는가?! 오동나무가 아니면 봉황도 깃을 펴지 않는다고 하더니… 여기 양재천관리를 맡은 관리원도 오동나무가 꽃을 피우는걸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참 행운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스적스적 걸었다. 불어오는 공기가 신선하다. 여기저기서 까치울음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오고 이리저리 흥겹게 뛰여다나는 고양이들도 보인다. 이제 반달쯤 지나면 무궁화꽃도 질것인가?
그때였다. 내 눈을 뚫고 들어오는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그림이였다. 바로 독서하는 처자.
나는 한동안 넋놓고 바라보았다. 그 그림을 묘사하자면 이렇다.
강옆에 억새밭이 있고 그 억새밭 변두리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젊은 처자는 강을 의지라고 바위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있었다. 긴머리를 뭉텅 뒤통수에 꿍져매고 정신없이 책장만 들여다보고있었다. 처자는 내가 자기를 몰카하는줄도 모르고있었다.
참 나한테도 책읽고싶은 시절이 있었었지. 그 시절엔 그렇게도 책이 귀했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더럽게도 책 읽는 사람을 구경하기가 힘들어… 특히나 우리 조선족들한테서는… 언제부터일가, 우리 조선족이 책과 멀리하게 된것은….
독서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시대를 앞서가는 능력도, 사물을 판별하는 지혜도 모두 선인들이 물려준 덕분이고 그 지혜를 섭취하고 두뇌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것을 습관화하는 길밖에 없다.
하루에 15분만 읽어도 일년에 20권이나 읽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루에 2시간씩 규칙적으로 읽어 아주 유식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전에 나는 한달에 적어도 200원어치는 책을 샀었다. 다 읽지 못하더라도 산다. 사면 일단 읽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산다. 책을 읽지 않으면 그만큼 시대에 뒤떨어지기때문에라도 산다.
흔히 바빠서 독서할 시간이 없다고 핑계대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시간이 없는게 아니라 의욕과 마음이 없는것이다.
책이 민족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책이 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줄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어렸을적부터 독서하는 습관을 들여 생활화한다면 분명 훌륭한 지식인으로 남보다 앞서 경지에 도달할것이 분명하다.
부엌에서 밥짓는 아낙이라고 해서 책을 읽지 말라는 도리는 없을것이다. 오히려 책읽는 아낙이 국도 더 맛있게 끓일지 모른다.
솔직히 나는 4대명작을 읽지 않은 녀자하고는 말도 섞고싶지 않다. 조선족의 후예로 태여나 세종대왕조차 모른다면 나는 정말 그 녀자의 얼굴에 침을 뱉고싶어질것이다.
그래서 나는 권하고싶다. 피카소의 그림은 감상하지 못하더라도, 베토벤의 월광곡은 듣지 않더라도 안데르쎈의 동화책은 읽어달라고….
언젠가 “아이와 청룡도”란 소설을 쓴적이 있다. 그 소설이 발표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문단에 꽤 알려진 어떤 시인이 나보고 이렇게 묻는것이였다.
“소설을 참 재밋게 잘 읽었는데… 그런데 거기서 나오는 청룡도는 뭐지?”
나는 야채 써는 칼이라고 말할가 하다가 그만두었다.
2. 마지막 콩서리
아버지와 함께 마을앞 산비탈로 소 풀러갔다.
헌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며 비탈로 올라가던 아버지가 갑자기 길을 틀어 콩밭쪽으로 걸음을 트는것이 아닌가.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는 통통하니 잘 염근 꼬투리들을 가득 단 콩포기들이 손아귀에 넘쳐나게 뽑혀지고있었다. 그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아버지가 왜 저러신다는것을. 왜 소 풀러가는데 굳이 나를 대동하게 하셨는지를.
나는 말없이 삭정이와 다북쑥을 주어다가 길옆 편편한 곳에 쌓아놓았다. 그리고 좀 있다 거기에 불이 달렸고 또 조금뒤에는 콩꼬투리들이 터지는 소리가 피앙! 피싱! 귀맛좋게 들렸다. 우리는 지금 콩서리를 하고있는것이다.
1983년, 호도거리생산책임제가 실시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는 가을만 되면 한번도 거르지 않고 나한테 콩서리를 해주셨다. 왜 그러시는지는 나도 그 리유를 딱히 알지 못한다. 단, 아버지가 콩을 유난히 반겨하시고 나 역시 콩을 좋아한다는것이다. 조선 평안도에서 살길 찾아 따라즈(지신)로 월강했던 할아버지도, 여기 연풍촌에 태줄을 묻고 평생을 살아오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콩서리를 하면서 커왔다는것을 알고있을뿐이다.
요즘같이 풍요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뭘 먹어도 입맛이 없어한다. 도무지 자신의 입에 맞는 음식맛을 찾을수가 없는것이다. 부자병인가. 언젠가 어느 음식석상에서 맛있는 음식을 찾다가 그래도 가장 맛있는 음식은 남의 집 닭을 훔쳐먹는것이라는데에 하나같이 입을 모으고나서 크게 개탄한적도 있었다. 훔쳐먹는게 맛있다니! 남의 녀편네가 이쁘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농촌에서 살아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한시기 농촌에서는 닭 한두마리쯤은 청년들이 후무려다 잡아먹어도 죄로 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저 한낱 젊음의 방기나 장난쯤으로 무슨 성장기처럼 당연지사로 여겼다. 그래서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척하는것이 상례였다. 심할 경우 펀펀하던 개도 미친개로 몰아붙여 잡아먹는 수도 있었다. 그래도 주인은 어이없는 웃음만 지어보일뿐 별 소란은 피우지 않았다. 그러던것이 개혁개방의 봄바람과 더불어 경제정책이 실시됨에 따라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일변도를 한것이다. 닭은 고사하고 고양이새끼 한마리를 품속에 넣자 해도 돈을 지불해야 하는 세월이 된것이다. 주인의 동의없이 행하다가는 도적놈이 돼버리기가 일수였다.
봄이면 앵두를 훔쳐먹는것이 그렇게도 좋았었는데… 여름에는 살구, 왜지, 참외… 가을에는 과수원 들이치기… 겨울에는 남의 집 김치움 들어내는게 얼마나 재미있고 스릴 넘치는 일이였던지.
콩서리는 콩알이 아직 덜 염글어 파릇파릇한 기운이 살아있을 때가 가장 적격이다. 꼬투리에 습기가 많이 남아있어서 콩알이 쉽게 타지 않고 노랗게 잘 구워진다. 그리고 맛도 달콤하고 고소하고 향기로운게, 일품이다. 너무 일찍 따면 물렁해서 맛도 없이 물만 튕기고 너무 늦게 따면 딴딴해서 자칫 타버리거나 익히기가 조련치 않다. 안익은 놈은 비리고 탄 놈은 쓰다. 랑비를 피할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해먹는 서리의 맛은 세상 그 무엇에도 견주지 못한다. 아무리 입맛을 잃은 도시인들이라 하지만 서리음식앞에서는 입맛이 확 살아나리라.
초중시절 나는 룡문중학교까지 하루 20여리길을 왕복하면서 무던히도 콩서리를 해먹었던것 같다. 왜 그랬을가? 그렇게도 할 지랄이 없었을가? 하여튼 나는 먹고남저지까지 호주머니에 담아와 학교에서 먹었다. 가지가 보이면 가지도 먹었고 배추가 보이면 배추를 먹었다.
“아무래두 이게 아부지가 너한테 해주는 마지막 콩싸개일것 같다.”
“예?”
“명년엔 밭을 안부칠란다…”
(아, …)
그제는 나도 뭔가 알것 같았다. 아버지는 더이상 논과 밭을 부칠 기력이 없으신것이다. 나이에 비해 농촌로인답게 너무나 로문한 아버지.
“요즘은 나도 허리가 아파서 걷기조차 힘들어.”
콩을 잡수시다 말고 아버지가 몸을 일으켰다. 량손으로 엉심께를 누르고 다리를 구부정한것이 가뜩이나 작은 키가 한뼘은 더 작아보였다.
“많이 먹어둬라. 앞으로는 구경두 못할지 모르니깐.”
콩서리에서는 아직도 파란 연기가 피여오른다. 픽, 픽, 소리를 지르며 콩꼬투리를 뚫고 하얀 김을 내쁨는 놈도 보인다. 헌데 이게 내게는 마직막 콩서리란다,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그럴수도 있으리라. 아버지가 밭농사를 짓지 않는 한 이러한 반쪽짜리 콩서리조차도 나는 더는 하지 못하리라. 이것으로 나와 아버지의 콩서리력사는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것이리라.
“다 먹지말고 조금 남겨두거라. 뒤에 오는 사람들두 맛보게.”
해가 지려는가, 어느새 서쪽하늘이 붉은 물을 한박스 들쓰려고 한다.
나는 내 아들 은비를 떠올리며 이제 나는 그애한테 콩서리에 대해 뭘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지? 하는 참 아름답고도 슬픈 생각을 했다.
아 굿바이, 콩서리여!
3. 커피를 마시며
맥심이 있고 췌쵸가 있으며 꼴롬비아가 있다. 혹시나 해서 인스턴트도 빨간 양철통에 가득 담아놓었다.
커피잔은 투명한 유리잔보다 평범한 머그잔을 애용한다.
남들은 커피를 많이 마시면 잠을 못잔다는데 나는 하루에 열잔을 마셔도 끄떡 없다.
커피로 아침을 열고 커피로 저녁을 닫는다.
언제 커피를 배웠던가?
영자아줌마(소설가 김영자선생을 나는 영자아줌마라고 부른다).
그랬다. 평강벌 3총사중 한명인 차룡순선생이 계시던 연안촌을 지나서 5리가량만 더 가면 옛적에 삼하진이라 불리웠던 투도진이 나온다. 거기서 영자아줌마는 씨암퇘지 두마리를 기르면서 소설을 쓰고계셨지.
“커피 한잔 마셔 볼라우? 내 녀동생이 로씨아에서 가져온건데…?”
설탕도 없고 프림도 없다.
블랙, 내가 상을 찡그렸던가.
“하도 쓰거워서 난 마시지 않는다우. 그런걸 사람들은 무슨 멋에 마시는지…”
그렇게 시작한 커피였지, 아마…
커피 마시는 풍조가 개성의 시대 20세기말을 누룩 퍼지듯 조용조용 누비기 시작했다.
H는 인스턴트커피를 커다란 물병에 풀어마셨다. 오래 마시기 위해서다. 말로는 자기는 연한걸 좋아한다고 했다.
J는 커피를 물에 풀지 않고 봉지를 쭉 찢어서는 그대로 입에 털어넣고 씹어 먹었다. 입안에 커피향이 피여나는게 자기는 좋다고 했다.
나는 진한걸 좋아했는데, 그마저도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H의것을 자주 얻어먹었다.
J도 H의것을 얻어먹었다.
지금은 커피의 시대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병원이나 은행, 호텔 같은데 가면 커피자판기는 물론이고 안마원같은데는 무료서비스인것이다.
소설가 정세봉선생네 집에 가면 선생은 커피를 거의 강박에 가깝게 권한다.
“싫어요. 안마시겠습니다.”
해도
“마셔라!”
이러는것이다.(커피가 떨어졌는지 인스턴트커피를 타주면서 그랬다.)
선생님은 청자잔에다 커피를 타준다.
연길시내에서 어느 커피점이 제일 마음에 드는가고 묻는다면 나는 더 생각할것도 없이 락원커피숍을 꼽겠다.
성보호텔뒤골목, 명주쇼핑몰 바로 우에 자리잡고있다.
오전 10시가 넘어야 개업을 하는 이 곳은 커피전문점인데 커피를 마시면서 열람할수 있도록 한켠에 책꽂이도 놓아두었다.
성보호텔에 비해 값도 훨씬 싸고 바리스타까지 있는 이 곳은 메뉴도 구전한바 나는 그중에서도 카푸치노를 좋아하다.
이딸리아로부터 번져왔다는 카푸치노는, 계피막대를 거품속에 꽂아넣고 금방 내린 커피콩의 비릿한 내음과 함께 녀인의 가슴을 훔쳐보듯 쫄짝쫄짝 야금야금 축내는것도 가히 일품의 향수라 하겠다.
뭐니뭐니 해도 이런 커피점은 남자 홀로 가는건 일이 아니다.
그러고보니 갑자기 악세사리 하나 없는, 눈섭이 되게 이쁜 어떤 녀자가 떠오른다.
4. 살춘각 연동
괜히 강동무에게 미안해지는 시간이였습니다. 차라리 제 집에 들어박혀 마누라 있는 놈은 마누라 젖을 주무르고 없는 놈은 아시안챔피언스리그나 보면서 가슴을 달리면 될것을 굳이 없는 돈을 팔아가며 개고기를 먹자 한게 사단이였습니다.
먹지 못한 문인들이 술이 한순배 돌아가자 그만 정신이 홀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알맹이 있는 말씀들이 나올 까닭이 없습니다. 이 세상 온갖 허접스레한 소리는 다 주어모아 술상을 풍성하게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살아무개가 미니동영상 한편을 위챗그룹에 올려놓은것이 그룹을 아주 말아 먹는 쪽으로 몰고 갔습니다. 나갔던 정신이 제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었던것입니다. 회원들은 이미 자기네 운동장을 잃어버렸고 그룹장 혼자서 그 큰 그룹을 떡하니 지키고 앉았습니다.
개고기를 맛있게 먹어줄 권리가 있었건만 우리는 그 권리를 향수하지도 못한채 헤여져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미안한지도 모른채 강동무에게 마냥 미안했습니다. 사실 강동무에게도 우리에게 맛있게 먹히워줄 의무는 있습니다.
쓸데 없는 말은 생략하고-
그런데 그렇게 죽여버렸던 그룹이 이틀도 안지나서 되살아났습니다. 많아서 일년 적어도 반년 하면서 자숙하자 했던건데 겨우 이틀이라니요! 아마도 그룹장이 엉덩이가 좀이 쑤셨던가 봅니다. 하여튼지간에 경하할만한 일이긴 합니다만- 그누무 개고기, 이럴거면 그날 개고기를 마저 먹어야 하는건데...
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내가 들어갈수가 없습니다. 그룹에서 아무리 나를 초대해도 도로 튕겨져 나옵니다. 내 위챗이 그룹문턱을 넘을수가 없었던것입니다. 위챗지갑과 은행카드를 연동해야만 넘을수 있다는것입니다. 이런 환장할.
그룹에 백명 되기전에 초대하면 카드를 연동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존경하는 그룹장님은 무슨 비뚤어진 마음씨로 그리 하셨는지 나를 101번째 회원으로 딱 초대를 했던것입니다. 내가 폴짝 뛰지 않게 생겼습니까?!
“어이, 저기서 누기 당신을 모질 찾는데, 내 당신이 벤소 갔다고 했소.”
“야, 내가 네명 초대했는데 다 들어왔어. 왜 너만 못들어오냐?”
“우정 안들어오는거죠?”
이런저런 말들 가운데 의심의 눈초리도 있습니다. 내가 카드를 연동할줄 모른다고 해도 안믿습니다. 그것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글을 쓰냐는 뜻일가요?
아무리 애써도 안됩니다. ID카드가 정확하지 않다고 나옵니다. 나로서도 더이상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포기하기로 마음 먹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시도해봅니다.
그런데 이건? 보지 않던게 하나 더 나와있습니다. 카드번호란 아래쪽에 실명확인란.
이게 어디서 왔지?
방금전까지도 없었는데??
그러면서,
터치, 터치, 터치, 터치...
연동이 되였습니다. 아, 길이 여기 있었네! 곧은 길을 놔두고 나는 에돌아왔었네.
나는 어이가 없습니다. 한동안 혼자서 실실 웃었습니다.
인생도 이런게 아닐가 잠간 생각해봅니다. 딴에는 옳게 간다는것이 게처럼 옆으로 갔다 물만 잔뜩 처먹고 찬란히 부서져 제 자리로 돌아오는. 퍼즐이 맞춰졌다는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행운입니다.
종당에 나는 또 이런 얼빠진 결론을 도출해내기에 이릅니다. 인생은 결국 연동이다, 위챗지갑과 은행카드의. 연동해서 같이 가는게 인생이다. 그러고는 큰노릇이나 한듯 너덜거립니다.
“그룹. 초대. 요함.”
존경하는 그룹장님께 톡 하나 쳐보내며, 종으로 가던 횡으로 가던 서울만 가면 되지 썅!
5. 시래기를 줍는 손
농촌에서 태여나 농촌에서 커와서 그런지 나는 손이 고운 녀자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농촌녀인네들이 언제 손에 신경을 쓸 겨를이 있으리오. 농사를 지으랴, 때시걱을 끓이랴, 빨래를 하랴… 생계유지팔수수단으로서의 농촌아낙네들의 손은 말그대로 일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손이 곱다는것은 일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일것이다. 우리 엄마도 인물은 그냥저냥 괜찮게 썼으나 손은 못생기기가 짝이 없었다. 갈라지고, 굳은살 박히고, 마디가 툭 불거지고… 아마 도시인들의 눈에는 그게 손이 아니라 발로 비쳐들지도 모른다.
후에 어쩌다 도시라는데 와서 도시인의 삶을 살면서도 나는 그렇다고 할만한 아름다운 손은 보지 못했다. 살결이 젖빛같이 유난히 희고 뽀얗고 거침없이 쫙 빠지면 아름다운 손인가? 작고 아담하고 움켜쥐면 따스한 그런 손이 고운 손인가? 아니면 커다란 진주알이나 금강석따위를 매단 그런 손인가? 양귀비의 섬섬옥수는 왕의 진상품이 아니였던가?!
“내 손이 곱지 예?”
“나한테서 손 하나만은 자신 있슴다.”
이렇게 손자랑하는 녀자를 몇명 만난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그 손을 보면서 쉬이 곱다는 말을 흘릴수가 없었다. 손이 결코 이쁘지 않아서가 아니다. 손은 예뻤다. 그런데도 그 손은 뭔가가 꼭 빠져있다는 것을 시사해주고있는 듯해서 허전한 마음이 감도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올가을 들어 나는 정말로 이쁘고 고운 아름다운 손을 보게 되였다. 그것은 늦가을의 어느 바람 많은 저녁무렵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24번 뻐스가 굽이를 잦는 어귀까지 온 나는 길옆 공터에서 그만 멈춰서고 말았다. 빨간 등산복을 입은 아직 애티나는 젊은 녀인네가 바람속에 보였는데― 빠르게 움직이는 손, 뭘 하는가 했더니― 버려진 배추잎무지에서 예쁘고 파랗고 상하지 않은 잎사귀들만 골라 집어내고있는게 아닌가. 그렇게 골라낸 잎사귀가 커다란 비닐주머니로 반주머니는 착실히 되여보였다. 옆에는 배추 팔러 나온 밀차도 두대 있었는데, 장사군 한족아낙네도 가만히 서있지만은 않았다. 밀차우의 배추들을 들고 이리저리 번져보다가는 괜찮은 잎사귀들을 한두잎씩 뜯어서는 젊은 녀인네에게 건네주고있었다.
“이렇게 한주머니 골똑 가져가봤자 꿰여 달아매면 얼마 안돼요. 그러니 마르면 얼마나 되겠어요. 아직도 한번은 더 가져가야 겨울을 거뜬히 날수 있어요. 얼마나 좋아요, 돈도 안들고. 버리는걸 주어가는데.”
녀인네의 얼굴에서는 부끄러움이나 체면따위는 전혀 찾아볼수 없었다.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자호감이, 걱정하던 월동준비가 만족스럽게 되여가고있다는 뿌듯함이 얼굴 전체에 고루 퍼지고있었다.
“배추시래기를 무척 좋아하시나보군요?”
“네. 그런데 전에는 시래기를 몰랐어요. 전 도시에서 태여나 쭉 도시에서 컸거든요. 신랑이 농촌사람입니다. 시래기를 먹는 법은 그이한테서 배운거예요.”
“아, 그렇군요.”
―배추시래기.
그러고보니 나도 배추시래기를 먹고 자란 놈임에 틀림없었다. 배추시래기를 골라내는 그 얼굴 걀쭉한 젊은 녀인네의 손앞에 내 발길을 멈춘것을 보면. 그리고 해마다 가을이 오면 나 역시 꼭꼭 시래기를 만들어 저장해두는것을 보면. 많이 먹으면 질리기라도 할법한데 저놈의 시래기는 왜 그리 먹어도 질리지를 않는지 이상했다. 혹시라고 뒤울안 달대에 소들이 들어와 시래기를 뜯어먹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걸 그렇게 아까워하시던 어머니…
시래기는 생배추와 달라서 겉잎일수록 맛이 좋다. 가장 겉잎은 우거지라 하는데 이것은 돼지갈비찜에 가장 잘 어울린다. 거기다가 풋고추 잘 말린것으로 맛을 보태주면 그렇게 입이 짧은 나도 밥 한공기는 후딱이다.
우선 시래기는 푸른색을 유지하는것이 중요하기때문에 될수록이면 강한 해빛을 피해 그늘에서 말리는게 좋을것이다. 한번씩 삶기에 적당한 량으로 가지런히 꿴 다음 달대에 걸어둔다. 거기서 시래기는 낮과 밤을 소화하며 바람을 맞기도 하고 눈을 뒤집어쓰기도 하면서 얼고 녹고 마르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이렇게 해서 남는것은 예전의 그 끓는 물에 데쳐낸 물렁한 배추잎사귀가 아니라 극복과 의지의 미학인 강인함으로 다져진 질기디 질긴 인내력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수련과정을 통해 시래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맛과 영양소를 제공해주는것을 잊지 않는것이다.
잘 삶긴 시래기는 쌈장을 만들어 그대로 쌈을 싸먹어도 좋다. 쌈 싸먹는 시래기는 아무래도 팔팔 끓는 물에 데쳐서 푸른색을 보존하는것이 포인트일것이다. 얼큰한 육개장에 이 시래기가 듬뿍 들어간다면 얼마나 맛이 기막히겠는가! 가마솥에 시래기를 살살 볶다가 만든 시래기밥의 그 쫀득거리는 맛이란 또한 먹어본 사람만이 알것이다.
헌데 요즘 세월엔 이 시래기를 먹어보기도 참 조련치 않다. 어쩌다 음식점에라도 가서 시래기국밥이나 시래기무엇무엇을 청하기라도 할작시면 시래기가 아닌 생배추를 데친것이 번듯이 얼굴 들고 나온다. 그것이 시래기라는것이다. 대부분의 가정집들에 가봐도 그렇다. 생배추를 데친것을 그대로 랭장고에 얼려놓고서는 그게 시래기라니 어디 말이 되겠는가. 맛이 나겠는가 이 말이다. 시래기는 온갖 눈바람속에서 풍상고초와 혹독한 시련을 이겨낸것일진저! 살갗 할퀴고 피를 말리는 아픔을 통해서야 비로소 얻어진 시래기라는 이름이 아니던가! 아, 시래기도 모르는 요즘 녀인네들이여….
장갑을 벗고 배추잎사귀를 고르고있는 젊은 녀인네의 손을 다시 본다. 보고있노라니, 물고 빨고 놓고싶지 않을 정도로 이쁜 손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결과 가락은 갖추고있는 손이였다. 그 손에도 알이 굵은 다이아몬드반지를 착용한다면 역시 멋진 손이 되리라. 그런 손이 지금 반지는 착용하지 않고 손시림을 무릅쓰고 배추잎사귀더미를 헤집고있다. 그러고보니 지금 녀인들은 얼마나 자기 손을 아끼고있는가. 마치 손이 장식품이나 되는듯이. 그 손을 아껴서 무엇에 쓰려고 그러는것인지? 금은보석도 굳이 녀인네의 손가락을 빌리지 않더라도 제 빛을 뿌릴수 있거늘.
햄버거요 스파게티요 피자요 하는것들이 참 요즘 녀자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김치도 슈퍼에 가서 사오면 그만이고 된장찌개도 식당에 가서 시켜먹으면 그만이다. 남편이나 애한테 돈만 뿌려주면 절로 알아서 먹거리들을 해결한다. 그렇다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햄버거나 피자를 먹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김치 담글줄 모르고 된장찌개를 끓일줄 모른다고 탓하는것도 아니다. 할줄 모르고 만들줄 모르더라도 먹을줄이라도 알아달라는 말씀이다. “화면(花面)”이나 “향애단(香艾團)”이나 “탕평채(蕩平菜)”나 “화양적(華陽炙)”…같은 선조들이 지혜를 모아 만들었던것들도 이름만이래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사람에겐 참으로 아름다운 도구가 있다. 그게 바로 손이다. 이 자유로운 앞다리는 걸어다니는데 쓰이지 않고 로동이나 의사표현, 예술적인 창조운동에 쓰인다. 그 손가락끝에 사랑을 담으면 사랑이 나올것이요 악을 담으면 악이 나올것이다.
한낱 시래기에서도 내 정성과 조상들이 물려준 수쳔년지혜와 한 가족의 건강을 위한 참사랑을 엿볼수 있다니 이걸 어찌 그냥 시래기라고만 부를수 있으리오. 그런 의미에서 시래기는 분명 인간의 손을 통한 하나의 창조일것이다.
한때는 우리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시래기여!
시래기 먼저 내 눈에 들어오는 젊은 녀인네의 손, 그 손을 뒤로 하며 나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싶었다.
당신의 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입니다!
6. 무제
제목이 없다.
달기 싫다.
어렵다.
그래서 무제다.
무제니까 제목도 아닐터.
그런데도 제목이노라고 타이틀을 지킨다.
―이른바 무제.
화가․시인치고 이 “무제”를 써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 있을가?
이의를 달 사람 별로 없을줄로 안다.
얼마나 제목이 메말랐으면 아직도 무제가 횡행할가?
류행인가?
멋인가?
나도 한번 써볼가?
멋있어 보인다.
개성이 있다.
참으로 게으르면서도 현란한 반어법이요 수사다.
제목이야 아무려면 어떠한가 하는 분들도 종종 만나보게 된다.
그럴수도 있으리라.
작품제목은 고사하고 작가마저도 기억 못하는 요즘 세월이 아닌가.
어차피 독자 스스로 해석하고 리해할 작품인데 동네집 강공자면 어떻고 이웃집 고아씨면 어떠하랴.
무제란 제목도 너무 벅찬건 아닐지…
편집부에 작품을 보내도 수정 괜찮고 제목을 바꿔도 상관없다.
여기서 고민할줄 모르는 작가의 공허한 정신세계라고 질타하면 나만 괜히 죽일 놈이 돼버린다.
자식을 낳아놓고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 “누가”로 십여년을 살아온 녀자가 우리 동네에 있었다.
“××”로 지었다가, “÷÷”로 고쳤으면 좋겠다는 이웃의 말에 그러지 뭐 하고 바로 자식의 이름을 뜯어버리는 어른도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식 이름짓기에는 도사들이다.
개이름이나 고양이이름도 아주 잘 짓는다. “오바마”, “박지성”, “김연아” 등.
제목은 작품을 고도로 압축해놓은 작가의 의지요 미학이라고 배웠다.
독자는 이 제목 하나만으로도 벌써 작가의 혼을 은근히 엿볼수 있고 마음에 접근할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시제1호”나 “작품번호7” 같은 제목들은 이런 고루함에 맞선 실험의식의 발로가 아닐가 생각한다.
초현실주의적인 제목으로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가 하면 작가 자신도 잘 모를 간편주의 제목도 등장하는 요즘이다.
외국 어느 회사에서는 지어 작품제목을 공모하기까지 한다고 하지 않는가.
무제를 흉내내서 써보니 머리 앓기 싫은 사람들이 쉬여가기에는 제창 좋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으기 고개마저 끄덕거려진다.
무제작품엔 무명작가가 가장 잘 어울리지 않을가 하는 건의.
그런데도 어째 내 이름 빼버리기는 좀 그렇다.
7. 아들과 나눈 대화 한토막
“아빠.”
“왜?”
“모자처럼 생겼다 해서 모아산인가요?”
“네 생각엔?”
“그런것 같아요. 모자라는 모(帽)자잖아요.”
“그런데 그건 왜 갑자기 묻지?”
“그냥요. 좋아서요.”
“뭐가 좋은데? 우리한테 놀 자리를 제공해줘서?”
“그것두 있구요. 봄이면 산나물 내여주지, 가을이면 버섯도 따게 하지... 그리구 우리가 마실 음료수도 떠가게 하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모르겠어요.”
“모아산은 말이지... 아빠가 얘기해줄가?”
“네.”
“이 곳은 말이다, 옛날엔 변방요새였단다. 료나라, 금나라는 물론 발해국, 동하국도 들어왔었단다. 아빠의 말이 다소 어렵더라도 그렇거니 하고 들어주렴.”
“알았어요.”
“모아산은 해발 517메터 되는 산으로서 아주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단다. 즉 봉화를 지펴 신호를 알리는 통신지점이였던 셈이지. 남에는 비암산이 있고 북에는 마반산, 지금의 연길인민공원에는 소돈대라고도 있었단다. 그게 다 신호를 전하는 통신수단의 련락고리였던 셈이지. 아빠가 이제 올라가면서 모아산 돈대 자리를 알려주마. 잘 기억해둬야 한다?”
“그럼 여기서도 옛날엔 전쟁이 있었단 말씀이네요?”
“당연하지. 아빠가 전번에 데리고 갔던 소하룡이 생각나냐? 맞은켠 산이 바로 유명한 성자산산성이란다. 쉽게 말하면 동하국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다른 한 수도 행도남경이였단 말이지. 실제로 동하국 국왕 포선만노가 성자산산성에 거주했었다는 력사기록도 있어. 그 산성에서도 다 이 모아산의 봉화대를 리용했었단다.”
“그럼 포 무슨 왕이라는 사람은 어찌 되였나요?”
“몽골군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포로가 되여 망했지. 포선만노는 거란족이였단다. 1233년까지 18년간 통치하였다고 했으니 꽤 오래 버틴 셈이지. 리선아라는 거란추장의 딸을 후처로 맞아 왕비로 앉혔는데 나라가 멸망하면서 강에 몸을 던져 자결했단다.”
“그런 일도 있었어요?”
“확실한건 모르겠고, 아빠도 공부 많이 못해서 아는게 적어. 너도 알잖아, 아빠가 초중도 채 못다녔다는걸. 그냥 여기저기서 귀동냥하구 책쪼가리에서 본것뿐야.”
“알죠. 아빠가 초중 3학년을 중퇴했다는걸.”
“산성이 고구려때 축조되였다는 설도 있고 하여튼 연구하고 발굴할게 많아. 이 모든것은 니들이 이제 커서 해야 할 일이란다.”
“그럼 모아산에 뭐가 또 있어요?”
“너 혹시 말대황제라고 들어봤냐? 청나라 제일 마지막황제 아이신죠로 부의.”
“아빠가 언제 말해준것 같아요. 만족이고 안해가 완용황후라고요.”
“그래 맞아. 그 완용황후가 바로 이 모아산에 묻혔단다. 그런데 그 무덤을 아직도 못찾았단다.”
“네?”
“조선의 마지막황후였던 명성황후가 일본인 손에 처참히 살해당한것처럼 청황후 완용 역시 일본의 손에 무너졌단다. 하지만 완용황후의 결말은 훨씬 비참하지.”
“어떻게요?”
“완용은 17살때 황후로 책봉되여 생면부지 남편과 결혼했고 2년후 자금성에서 쫓겨나 남편과 함께 황제와 황후자리를 뺏기게 된단다. 그후 일본이 침략해 들어오면서 부의를 황제로 내세우게 되는데 결국 꼭두각시였지. 대문밖으로 한걸음도 내딛지 못하였단다. 완용은 아편에 손을 대게 되였고 끝내는 마약중독자로 되였어.”
“황후란 사람이!”
“그렇단다. 1935년인가, 친오빠가 완용을 일본인 군관에게 팔아버렸어. 일본인에게 넘어간 완용은 어찌 됐을가?”
“애기 낳았나요?”
“수치스럽게도 그리 되였단다. 자신의 원쑤와 같은 일본인 군관에게 한 나라의 황후가 아이를 배버린것이란다.”
“그래서요?”
“분노한 부의는 그 오라비를 시켜 완용이 아이를 낳자마자 데려오게 하여 화로에 던져 죽여버렸다고 한단다.”
“아!”
“황후는 절망했지. 정신이 완전히 나간 상태였지. 부의가 일본에 투항하면서 법정에 함께 섰고, 부의는 장춘감옥에 완용은 연길감옥에 오게 되였단다. 끝내는 연길감옥에서 죽고 주검은 모아산에 묻었다고 하더라만...”
“그렇구나... 그런데 아빠.”
“말해봐.”
“그 무덤 찾아내면 돈 주나요? 돈 많이 벌어요?”
“예끼 이놈아, 돈이 중요하냐 우리 문화유산이 중요하냐?”
“돈이 있어야 문화유산도 발굴하죠. 전 돈을 벌거예요. 그리고 완용무덤도 찾아낼거예요.”
“그래, 숙제는 앞으로 너희들것이다. 이 언덕을 넘을 때나 모아산을 오를 때나 항상 생각해야 한다.”
“넵. 오늘따라 모아산이 영 좋아졌어요, 아빠. 히히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