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진함을 다
탕진하지 못했다고 하면 되겠나
저녁별이 불꽃놀이처럼 떠오르고
그 빛에 물들어 파랗게 젖는 얼굴
믿을 수 있는 건 그래도 사랑이라고
사랑처럼 무능해서 아플 수도 있다고
그렇게 말해도 되겠나
별빛이 흘러내려 적시는 두 뺨
목덜미를 지나 두손 포갠 가슴에서
반짝이며 감도는 감회의 지느러미
스스로가 빛나지 않으면
어찌 저 별의 빛남을 알아가랴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
두팔 벌려 한껏 호흡해도 되겠나
끝내 다 소진하지 못할 순진함으로
2018.09.28
민들레 홑씨
잃어버린 걸 찾아
길을 나서면
거긴 떠나온 고향이었던가
흩어지기 위해 모여있던
회고적 허공이었던가
약속 한 번 없이
여름은 가고
가을은 가고
다시 안 올 것 처럼 가고
잃어버린 한 올이
내려 앉은 언덕
어느 모서리에 바람이 분다
모든 수풀이 수런대는
바람결 소리
그렇게 이젠 고향이어라
스스로가 스스로가
2018.10.11
고양이의 길
은밀한 욕망의 무게
흔적없이
매화꽃 무늬로 찍으며
꽃잎 더 날리지 않는 고요한 길
푸른 눈에 상현달 걸어두고
바람보다 조심스럽게
바람보다 빨리
망각처럼 지나가는 저 고양이
오오 치켜든 아지랑이 꼬리
끝에서 나붓기며
털빛 미감
허공에 살짝 닿는다
파랗게 이는 파문
2018.10.10
낙엽
햇빛 찬란한 날에
푸른 청춘
맥박으로 썼지요
두팔 가득 벌려
바람이 오면
흔들며 흔들며
가거라
가서 生을 증언하기를
붉게 타오르는 심장이었기를
우수수
시름도 기쁨도 아니었다고
삶의 평평한 펼침이었을 뿐이라고
함께 한 시간을 바래주는
햇빛 찬란한 날에
2018.10.06
지금에 눈을 들어
눈을 들면 문득 거기에
꽃이 피었습니다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걸음 옮기다 보면
민들레 씨가
주변을 날았습니다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 들었던 눈과
발걸음 사이
어느 계절이 어떻게
들어 앉았는지 또 지났는지
잘 알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헤아릴 수 없는
꽃과 꽃씨와 눈길과 발걸음을
다 거두어
곰곰히 가슴에 얹어두면
빛이 놀다가는 정원 하나
환하게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내 가난이
이렇게 풍요로운 줄을
문득 고백해야 겠습니다
지금에 눈을 들어
2018.10.05
물가를 지키며
간혹
상심이란 그런 것이다
버드나무가
늘어뜨린
일제히 아래로 늘어뜨린
올올의 섬약한 결
같이 모여 물가를 지키는
침묵이나 혹은 흔들림
푸른 것과 노란 것의 뒤섞임은
종내 말이 없고
말은 없고
떠나는 슬픔이나 떠나지 못하는 지킴이나
가느다란 줄기마다에 촘촘히
상처의 비늘을 새겨야 할
소리없는 비명
수면에서 떠다니는
마른 눈물
201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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