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푸른 생각을 숙살하여
열매는 익어갑니다
나무의 새치잎은 별이 되고
꽃은 시들어서
이야기를 남깁니다
2
애비죽인 대여섯놈이 한상에 앉아
애비를 그리고 애비를 읽는다
한잔으로 그리고
또 한잔으로 읽다가
어차피 세상은 돌아야 한다며
죽어야 산다고 한다
3
산은 한발한발 다가가요
추조의 형벌에 한 몸을 내어놓아요
은색의 살침들을 꽂고 절정으로 달음질해요
한올의 숨도 남기지 않아요
4
봄향기를 터뜨렸던 그대 얼굴이 보이지 않네
정열적인 여름을 만지던 따뜻한 그 손이 차갑게 스쳐갔네
깊은 발자국들이 나의 원망으로 흐르기만 하네
2018.9.5
컵
그때는 봄이였네요
촉촉한 땅속, 질척한 어둠이 좋아
기쁨 한가득 물고 나팔꽃을 피웠지요
나비의 십자가에 매달려
여자의 꿈을 열달동안 꾸면서 말이죠
그뒤로 여자는 바빠요
땅은 서서히 말라가고 잊혀가고 버려졌지요
검푸른 고독의 시간들이
선분홍 잎들로 왕성하게 뻗쳐 나가고
성난 핏줄들이 불거지고
2002년 월드컵에
한국이 4강까지 흔들리고
온 천지가 빨갛게 물 들었을때
여자의 가랭이로 참고참았던 울분을 토했지요
경기도 양평 길 병원의 가위와 메스로
도가니탕집의 변기통에 쏟은
선분홍의 시간들을 자르고
피와 살을 나눈 여자를 버리고
불법체류자를 죽였지요
목마른 사막의 계절을 서울에 남기고
울산의 바다바람에 꾸덕꾸덕해진
수정컵이 지금, 러씨아 월드컵으로 시려서
쟁그랑 소리냅니다
2018.6.17.
아버지
그 뒤를 쫓던 시선은
어느새 낙엽 되어 바닥을 몸부림치고
癌석으로 일어서는 죽음과 내통하는 숨
언니의 손으로 완성한 녹두볶음이
그렇게도 맛있다더니
말똥말똥 서너알 양똥그림 그리는 긴 밤만
내 팔에 걸쳐놓고 자꾸만
자꾸만 미안하다 하셨다
강하지만 가난했던 56년 질긴 삶
옆집 여자라도 좋아하시지
가슴 아픈 사연이라도
만들어보시지
그냥 스치는 행복이라도 느껴보시지
이제는 허망한 전설이 되어버린
울 아버지
마침내
분노할 줄도 사랑할 줄도 행복할 줄도 몰라버린
울 아버지
누가
울 아버지께 미안하다고 해줄까
2018.5.23.
엄마
내가 누워있던 궁전이다
爱의 결핍으로 슬픈 궁전에
아버지의 欲을 뿌려
性전을 이루었던
자유롭지 못한 땅에
소외된 채로 탈색되여
보슬비에도 폴싹 내려앉을 것 같은
그런
구닥다리 같은 궁전을
나는 비웃었다
파괴된 사랑과 행복을...
멸 해가는 옛 것에 야유를 던지며
새로운 창조력을 과시하여 완성된 나의 궁전은
허울처럼 감싸주고 있는 궁전안에 있었다
궁전이 흔들린다
세상이 흔들린다
가슴찢기는 고통과 함께 벗겨져 나아가는 새로운 궁전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겹겹히 쌓여가는 궁전들속에 울려퍼지는 사랑의 노래
새로운 세상이 창조되고
또 다른 세상이 이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미래나
다르지 않은 궁전
영원한 모성애로 차고 넘치는
엄마!
2018.5.15
꽃
목욕탕 바닥의 젖은 무덤에서
허연 시체들이 떨어져 나와 하수구를 붙들고 통곡을 합니다
빽빽한 문장 사이들을 흘러내린 쉼표들은 검은 꽃술 속으로 숨어 들었습니다
즐거운 고통으로 흐느끼던 해독 불가의 언어들을 엿듣고 빈 둥지의 사연들도 알았습니다
세월을 전세 낸 일기들이
설움으로 얼룩지고 멀고 먼 길을 에돌아 온 마디마디에 몽우리가 맺혔습니다
하얀 순백을 잃은 상하고 시든 이야기 하나가 질기게 늘어져
섬 이 되였습니다
2018.4.17.
튤립은 알고 있다
새벽 6시
떨리는 입술이 위태하다
제발...반쯤만...반쯤만 피어라*
아침 9시
머피의 법칙이
튤립으로 활짝 피어버렸다
동공 안에 피어난 검은 속살에
당황한 듯 그대로 굳어지고
철근을 짊어진 초침의 황소걸음으로
하루가 길다
또다시
새 아침이 오고
시간이 촘촘히 주름지더니
반쯤 열린 입술로
튤립이 선명하다
벼랑 끝 까지 가봐서일까
투박한 시어가 다듬질해가는
그 짜릿함을
절정보다는 절정으로 가는 길의
그 황홀함을
튤립은 어떻게 알았을까
2018.4.7
*송나라 시인 소 옹의 시중에 "好花看到半开时"
개나리꽃
그래 그때가 초봄이었지
찜통이 된 주방은 연신 너를 녹이고 있었지
빽빽이 들어서는 고층건물로 유일한 창구마저 한 뼘도 안되는 몸뚱이를 가누지 못해 희미하게 사라지고
육체의 피로와 삶의 고단함은 너를 중얼거리게 했고
개나리는
듣고만 있었지
그냥
들어주고 또 들어주고만 있었지
그러던 어느날
개나리는 노랗게 한 잎으로 널 감동시키더니
또 노랗게 한 아름이 되어 가더니
노오란 물결 출렁이며 다가섰지
어느새 너의 가슴은 노랗게 차오르고
너도 노랗게 피어나고 있었지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노랗게 노랗게 노랗게
홍아
연아
숙아
저기에 개나리들이 무더기로 피어나고 있어
2018.4.2
풀잎
남긴 것은 초고뿐인
형편없는 시인
나비의 날갯짓에도 드러눕지만
왕성한 애욕으로
초야를 거느린 칼이다
저 하늘을
저 우주를
밤낮 쉬지 않고 쓰다듬어주는
부처 같은 손길
여기저기 너부러져 있는
초고들을 줍는다
2018.4.27
말발굽 소리 찍힌 밤하늘
아저씨의 자취방 골목에는
나의 출퇴근 길이 좁게 나 있고
내가 한밤중에 퇴근할 무렵이면
골목길 옆에 쪼그린 아저씨가 가끔 화상 채팅을 한다
여자목소리도 들리고 아이들 목소리도 들리는데
나는 엄마를 생각하고
딸을 생각한다
전화에서 들려오는 숨결들에는 한결 같이 그리움이 담겨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골말이지만
내 심장에서는
새파란 초원의 말들이 요란하게 투덕거린다
달리는 말등에서 자라나
말달리듯이 두루루루 두루루루
발음으로
부드럽게 한 줄로 올라가고
또 한 줄로 내려오는
음악 같은 리듬이 나를 사정없이 숭숭 뚫고 지난다
아저씨는 모르겠지만
이 밤 처럼 그 누구도 새카맣게 모르겠지만
대문이 타당! 하고 닫혀도
계속 이어져 그 화상 전화속으로 빠져든 밤들이 하얀 종이 위에
말발굽으로 또렷이 찍힌다
2018.4.12
커피
중독되었다
자살인 것 같기도 하다
수분을 빼앗기는 줄 알면서도 물리칠 수가 없다
오랫동안 그래왔다
전생에서도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푸석푸석한 살이 되고 걸죽한 피가되어 말라가는지도 모르겠다
금단에 허기진 욕망은 살모사의 혀로 실룩거리며 솟아오른다
70%의 수분을 굽 낸다
너에 미친 나는
아프기를 갈망해 보면서
더 깊이 중독되어 가고 있다
2018.4.5
벚꽃
참았지요
오래오래
그러니까
작년 여름부터
초가을 늦가을
긴긴 겨울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도록
지나가는 이들을 다 그냥 흘려보냈지요
봄바람이 사타구니를 익숙하게
슬슬 어루만지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군요.
햇빛 기껏 따스한 봄에
아예 홀랑 벗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속살을 내보였죠
자 이제 얼른 들어오세요
꿀샘 마셔보세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우리 끈적하게 서로 녹아들어요
이제 닥칠
여름
가을
겨울
을
이겨요, 우리
2018.3.28
청맹과니
저는 잘 넘어집니다
묵묵히 똑바로 가는 이들이 참 부럽습니다
따라 하고 싶은데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목표물이 늘 불투명합니다
어려운 게 싫어서
그냥 청맹과니로 살아갑니다
저는 잘 넘어집니다
삐뚤삐뚤 가다가도 요란하게 넘어집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버둥대다가 꽃으로 피어납니다
어려운 게 싫어서
그냥 청맹과니로 살아갑니다
이번에 또 넘어졌습니다
길에는 걸림돌이 왜 그리 많은지요
어려운 게 싫어서
그냥 넘어진대로 있습니다
꽃들이 새여나오는 하얀입술의 저는
뛸 데 없는 청맹과니입니다
2018.3.28
이 봄날에
삐걱~
방 안에서
밤새 곯았던 염증들이
반지하의 계단을 타고 오른다
그 뒤로 졸아든 네가 탈탈 낡은 구두에 담겨 오르고
따뜻한 봄 빛에 파르르 떨며
구석구석 털리고 있는 얇고 낡은 외투는 미세먼지 기상주의보에 짜증을 날린다
친정엄마가 보내준 청국장 냄새가 산수유의 야릇한 물 거품을 그리며 희미한 데생 속에 널 담는다
햇빛 받으며 오래오래 걸어봐
답이 나올거야
공식으로 펼쳐진
이 봄날에
2018.3.26
동병상련
음식물 쓰레기 헤집는 들고양이
의 피고름이 말라붙은 칙칙한 눈
에 비친 세상
의 한 모퉁이
에 길들어져 걸식하는 몰골
이 누추하다
2018.3.13
목련
딱딱한 나무침대에
전라의 자세로 누워
어느 화가가 그려주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지친 몸은 생기가 가시고
보잘것없이 평범하다
윤기 흐르는 장밋빛이기를
아름답고 환상적인 나신이기를
고대하고 고대하다가
기갈된 눈에는
부연 혼돈 속에
추한 삼류 모델로
진실되어 있다
비탄의 몸부림과 통곡은
짐승 같은 신음으로만 겨우
비집고
파르르 파르르 새어 나온다
2018.3.22
진주귀고리 소녀의 편지
350년이 흘렀어요
당신은 아직도 저를 바라보고 있네요
그때도 그랬죠
감추고 지켜야 할 무언가도 남아 있지 않았죠
그렇게 당신은 저의 전부를 그려버렸죠
저는 항상 당신앞에서는 정숙한 여인이 되지 못했어요
바늘로 귀방울을 찌르고
귀고리를 달아달라며
당신의 애무를 원했죠
당신은 나의 귓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줬죠
귀고리를 달아주고도 손을 거두지 않았죠
턱과 목을 쓸어내리고
얼굴선을 따라 뺨으로 부터 아래쪽 입술을 만졌죠
난 소금맛이 나는 당신의 손가락을 핥았죠
당신은 이내 손을 거두고
젖은 입술 벌리고 이렇게 당신을 바라 보는 저를 그렸죠
우리는 눈을 맞추고 있었지요
당신이 저를 훔쳐보고
세오리의 머리카락을 그려넣던 날
저는 골목길에서 스커트를 말아 올렸어요
그 리드미클한 움직임속에서 당신을 떠올리며 희열을 느꼈어요
그렇게 저는 당신이 예상못하는 놀라운 아이였어요
당신은 저의 주인이였죠
그림만 다 그리면 절 잊어버릴거라고 생각했어요
다시는 절 찾지 않을 거라고요
그래서 도둑 처럼
아이들 처럼 뛰였어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였죠
별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어김없이 달려 갔죠
오래동안 당신을 잊으려고 했어요
지난 삼백여년간 무척 힘들었어요
아주 가끔 당신의 모습을 그려봤죠
내 몸은 얼어붙고
가슴이 옥죄이고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그럴때마다
당신은 나보다 그림에
더 많은 애정을 기울였다고
스스로 납득 시켰죠
지금
당신이 절 찾는다면서요
진주귀고리를 주려고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군요
제가 그 귀고리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가요
하녀도 그렇지만
푸줏간의 안해가
어찌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나요
성내지 마세요
신교회 뒷길, 안쪽 깊숙한 곳에다
우리의 진주귀고리를 팔았어요
20길더*랍니다
남편에게 진 빚을 청산하고도 5길더가 남는 거죠
더는 남편에게 치를 것이 없어요
한 하녀가 비로소 자유를 얻은 거죠
이젠 당신을 찾아 갑니다
하녀가 아닌 여자로 당신곁으로 갑니다
다들 저의 눈길이 슬프다고 해요
또 유혹하는 듯 하다고 해요
당신이 원했던 표정이잖아요
지금
이렇게 야릇하게 바라보며 당신의 입술을 찾습니다
어서 오세요
나의 남자여
2018.4.9
*네델란드 화페단위
외식
오리고기 주물럭이 뽀글대며 이야기가 끝이 없는데
얼어붙은 말들은 녹지 않는다
오리고기 주물럭이 바알갛게 잘 익었는데
입안에서 곰팡이는 꽃을 피운다
사위, 결혼을 서둘렀으면 좋겠어
멍든 시간이 헉헉 숨 가쁘게 질주한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사방에 창문들이 깨지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어쩌지요
난감한 외식입니다
마주 앉은 눈빛은 허공에서 헛발을 딛습니다
여기를 벗어나려고 갈팡질팡 헤매지만, 딱히 갈 곳이 없습니다
오리 집 가게 안은 시끄럽게 들끓고 있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29번 테이블은 한구석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어쩐다지요
2018.4.16
연장체류
천 일을 동천강과 연애를 하며
천 일을 태화강과 불륜을 지르며
가벼워 지고 헝클어 지고 이상해 지고
가버린 3년*
구겨진 이야기를 애써 읽으며
반듯하게 납작하게 복사되여
집문서와 결핵확인서 사이로 들어가
오는 3년
그 사이에 떠 있다
새 처럼 떠 있다
날지 못하고 떠 있다
*장기체류비자는 3년에 한번씩 연장한다
30년을 떠돌던 이승과 저승에서의 작별인사
이 가을 새벽에 기다리는 잠 사이로 살며시 들어옵니다
어릴 때의 내 짝지가 양태머리를 촉촉 드리우고 옆에 앉습니다 기여드는 한숨에 의자가 끙 소리를 내고 우르르 일어서는 뒤줄의 주먹들이 그 애의 등을 부수며 1교시가 끝나갑니다 우리들의 중학교 생활은 그렇게 멋없이 끝나갑니다
마을 안으로 도랑물이 흐릅니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각시가 빨래를 합니다 칭얼대는 서너살 계집애를 툭툭 달래며 방치질을 합니다 누구의 등을 부수듯이 탕탕 내리칩니다 우연히 친척집에 놀러 갔다가 짝지를 멀리 두고 봤습니다 푸시시한 파마머리로 바뀐 내 짝지는 아마 아직 1교시를 마치지 못했나 봅니다
또 친척집에 갔더랬습니다 궁금해 하지도 않았는데 친척이 알려줍니다 내 짝지가 죽었다 합니다 남편에게 맞아서 죽었다고 합니다 바람을 피우다가 남편에게 맞아 죽었답니다 얌전한게 뒤로 호박씨 깐다고 친척이 말합니다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답니다 소리도 치지 않고 담담하게 죽어갔답니다 그때도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냥 떠도는 이야기처럼 흘러 들었습니다 그냥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흘러듭니다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냥 들어옵니다 내 짝지가 옆에 와 앉습니다 괜찮다고 이제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 잊어도 된다고 합니다
30여년이 지나서 작별인사를 합니다. 이제야 1교시가 끝난 모양입니다 바보 같은 내 짝지는…
2018.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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