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금의환향'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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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금의환향'을 아느냐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6.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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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나는 ‘동포자진귀국프로그램’ 시행일을 통보받고 평소 알고 지내던 고향 후배한테 급히 전화를 걸었다.

1999년 3월에 국제결혼으로 온 후배는 당시 나이 스무 세살, 그녀는 혼인파탄의 원인을 남편의 잘못도 크지만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자기한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천이년 4월, 그녀는 한국남편이 혼인을 정리(이혼)하는 바람에 불법체류신분으로 마음을 조여 가며 하루하루를 살아왔었다. 그러다 이년 후에 동포남성을 만나 이성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설상가상 이천년 팔월에 밀입국으로 왔다 하지 않는가? 불법체류에 더하기 밀항-, 이었다. 속담에 다리 부러진 노루 한 곳에 모인다더니? 운명이었다. 둘은 평소, 누구네 보다 마음 졸이며 살아왔다 한다. 그런데 ‘쨍 하고 해 뜰 날’이 찾아왔으니 얼마나 기쁘랴?

고향후배는 처음에는 내 말을 믿지 않고 농인가 해서 전화를 뚝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고생 이만저만 아닌데 농도 유분수지, 성냈단다. 좀 있다 생각해보니 내가 농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닫자 웬일인지 정신이 몽롱해 지면서 온 몸에 기운이 쪽 풀리더라고 했다.

 

저녁에 애인이 일하고 집에 오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소리쳤었다.

“오빠, 기쁜 소식! 우리 이번에 출국하면 1년 있다가 다시 한국 나올 수 있대!”

그러자 남자친구는 데퉁스레 응대했었다.

“야, 정신 차려! 배고프니 빨리 밥이나 줘!”

 

그날 저녁, 그들은 밥도 먹는둥 마는둥, 중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를 했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누구도 믿고 싶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이튿날, 나는 대림동에 있는 한 식당으로 갔다. 구체내용 상세히 설명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었다. 그래 하나 둘, 모인 것이 여덟 명이나 되었다. 

나는 이번의 정책과 자진출국 하는 방법을 쉽게 설명해 주었다.  

 

밀항과 ‘위·변조여권’자는 무조건 엄한 법적 처벌을 받으리라 생각해왔던 그들은 처벌은커녕 1년 후 재입국할 수 있는 혜택을 준다는 얘기를 듣자 반신반의를 하더니 곧바로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술이 한 순배 돌자 몇몇은 또 머리를 흔들었다. 불법체류 중인 동포들을 잡는데 한계를 느낀 한국정부가 동포들을 중국으로 보내려는 속임수를 쓰지 않는가? 의심 든 모양이었다.

 

왜 그렇지 않으랴. 짧게는 3년, 길게는 9년을 머물며 경찰 아닌 의경만 보아도 쥐구멍을 찾듯 숨어 살아온 그들이 아닌가?

 

꼬박 17일 동안 망망대해를 떠돌며 목숨을 걸고 이천년 4월 28일에 밀항해온 차경철(31세) 씨는 “내가 로또복권에 당첨되어 인생이 역전되더라도 이처럼 흥분하지는 않았을 거야!”라고 했고, 위명으로 1999년 7월 입국한 하인해(34세)씨는 “한국정부가 우리 동포들을 불법체류자라는 명분으로 인정사정없이 죄인 잡듯 단속하며 잡는 바람에 심한 마음고생을 했었는데 오늘따라 한국이 왜 이렇게 고맙고 감사한지, 대한민국 만세를 웨치고 싶은 심정이야!”하고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이렇게 웃고 울며, 암흑에서 밝은 곳으로 가는 기적과도 같은 자진귀국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었다.

이들 중, 마음고생 제일 많이 했다고 자칭하는 강성화(30세)씨는 이렇게 말 주머니를 풀어놓았다.

 

“저는 지난 1999년 7월에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왔는데 운명이 기구해서일까? 입국 전날 남편이 천방야담같이 교통사고로 별세를 했어요. 체류연장을 하려고 하니 출입국에서는 시댁식구들의 진술서라도 받아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렵게 시댁을 찾아갔더니 시어머님이 이렇게 차갑게 내쏘지 않겠어요? '내가 언제 널 봤고, 언제 널 며느리고 인정한 적이 있느냐? 아들도 이미 죽었으니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말거라. 우리 아들이 남긴 재산을 탐하는 것 같은데 널 위장결혼으로 신고할 테다!'- 그래서 저는 겁에 질려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오고 말았지요. 처녀 몸이 순식간에 미망인이 된 하소연을 할 사이도 없이 말이에요. 저는 위장결혼이라는 누명을 꼼짝없이 뒤집어쓰고 7년이 넘는 긴 한국생활을, 그것도 처녀의 몸인 꽃다운 24세 때부터 미망인이라는, 치유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지금까지 살아 왔어요. 저를 더더욱 힘들게 한 것은 국민의 배우자가 되었음에도 남편의 사망으로 인해 불법체류자신분으로 전락된 것이고, 단속을 피해 숨어 다녀야만 했던 사실이었어요. 이제는 그런 감투를 벗게 되었으니 두발 뻗고 발편잠 잘 수 있네요.” 하고 흐느끼더니 왈칵 울어버리는 것이었다. 

 

나의 눈시울도 어느덧 붉어졌었다.

 

좌석은 ‘자진귀국, 출국확인서, 재입국’ 등 용어가 없이는 대화가 되지 않을 상 싶었다. 중국에서 사는 곳은 서로 다르지만 이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은 거의 비슷했었다. 우선 각자 맡고 있던 셋집을 정리하고 밀린 노임도 서둘러 받아야 했고,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 그리운 가족과 상봉해야 한다! 때문에 다들 지나칠 정도로 들떠 있었다.

 

4월 28일부터 나의 친구들은 하나 둘, 출국하기 시작했다. 입국은 적절치 못한 방법으로 했지만 출국은 '금의환향'이라도 하듯 떠나는 모습들을 보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우리말 속담이 떠올랐다.

 

나는 친구들의 행운을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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