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박명화] 생존의 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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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박명화] 생존의 욕구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7.08.2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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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명화 프로필 : 중국 왕청현 출생. 대학졸업 후 여행사업에 종사. 수필, 수기 다수.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서울=동북아신문]일찍 나선 출근길에 여유 있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마치 전쟁터라도 나가듯이 비장한 표정으로 전철에 올라타고 있다. 전철 안은 그다지 분비지 않았다. 나의 시선은 책을 읽는 여자에게 멈췄다. 늘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좋아하던 책을 읽지 않는지 꽤 오래된다. 나는 부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쁜 출근길에 무슨 책을 읽을까? ‘사람이기에 아프기도 하고~’라는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사람이니 아프지, 나에게도 13년 전 아팠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스물여덟 살에 죽을 만큼 아파봤다. 그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했고 삶의 가치마저 박탈된 허무한 느낌에 죽으려고 자살까지 시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점점 지루하던 세월 속에서 “죽음과 삶은 과연 무엇이냐?”고 몇 백번 물어 보며 수 없이 자신과 싸웠다. 지금도 투병하던 그날들이 나의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떠오르곤 한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에 공부를 그만두고 스스로 돈을 벌었던 나이다. 조금만 더 공부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이 남았던 나는 26살인 결혼 3년 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꿈을 향한 마음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엄마 엄마 쫑알대며 하루 종일 내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던 아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마음 한구석은 늘 아렸다. 그런 감정이 내 몸을 갉아 가슴 아픈 상처로 남겨진다. 그 때마다 울컥 하는 마음의 눈물을 꾹꾹 눌러가면서 공부를 해야 했지만 운명은 늘 내 편이 아니었다. 졸업논문을 쓰랴, 공무원 회계사시험에 취업까지 고민해야 했던 나는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 채 앓고 말았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혼위기까지 왔다. 나는 쉴 틈도 없이 선택에 선택을 거듭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욕심일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욕심이 잉태한 그 죄값을 나는 톡톡히 치러야 했다.
 
2004년 5월 며칠째 약을 사먹긴 해도 감기는 좀처럼 낫지 않았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나는 엄마 집에 가곤 했다. 가는 길에서 팔다리에 바늘로 콕콕 찔러놓은 듯한 검붉은 반점들이 보였다. 혈소판 감소증(血小板ITP)이란 병증이 처음은 아니다. 1999년도 임신 초기에 코피가 자주 나고 다리도 부어서 검사를 했는데 혈소판 감소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면역과 관련이 있거나 어떤 환경이나 약물 부작용등 다양한 원인라고 의사가 말했다. “영양제를 좀 먹으면서 시간을 뒤고 관찰해봅시다”
 
나는 정기적인 검사에 응했다. 3개월 동안 물 한 모금 먹기 힘들 정도로 입덧이 심했다. 면역력이 떨어진 탓인지 추위를 잘 타고 감기에 자주 걸렸다. 다행히도 5개월부터 뱃속 아기가 발차기를 하는데 그 어린 것에 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마치 “엄마 사랑해요”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나의 마음을 달래주는 듯했다. 그러다가 예정일 한 주를 앞두고 양수가 터져 입원을 했다. 경과를 지켜보고 수술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다른 임신부들은 분만을 위해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한다. 어떤 이들은 통증 때문에 남편의 머리채까지 잡아 쥐고 흔들어댄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달리 누어만 있어야 한다. 밤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인간으로 느끼는 극심한 통증이 궁금했다. 나에게는 한계이겠지만 자연분만의 그 고통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따뜻한 물속에서 생명을 갈망하는 아이와 함께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고통을 견디면서 활기차고 건강함을 지닌 하나의 생명체를 맞이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나는 자신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출산의 느낌을 공유해 달라고 할 때마다 할 말을 잃는다. 분만 시 막상 힘을 주면 얼마나 아플까? 생각만 해도 그건 지옥과 천지를 오가는 고통이 아닐까? 그 진통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궁 내 근육이 수축할 때마다 아기를 아래로 밀어내면서 출산을 하는데 나는 이런 경험을 앞으로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 하라고 하면 안 할지도 모른다.
 
그날 밤 나는 진통 아닌 또 다른 고통 속에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아이 목에 탯줄이 감겨있어 당장 수술을 진행해야 한다. 만약 수술 도중 피를 많이 흘릴 경우 수혈을 해야 한다. 술수대로 들어가는 그 순간 나는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음을 느꼈다. 얼굴 위로 파란 천이 가려져 있어서 보이는 것은 창문과 천장뿐이다. 마취를 시작한 5분 뒤 눈앞이 서서 깜깜해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0분 후에 나는 조금 정신이 들었다. 내 귀에 들리는 썩둑썩둑 자르는 그 가위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다. 어머, 뭐 하는 거야? 나의 배에서 삽질하듯이 마구 파헤친다. 그리고 팔을 잡더니 팔목까지 묶는다. 무엇으로 여러 번 찔렀다. 몸에는 구석구석 의문의 액체가 흘렀다. 수혈인가 아니면 링거?……이때 비로소 흐려진 기억 속에 들려온 우렁찬 울음소리로 3.2kg의 건강한 남자아이가 출산했다는 것을 알았다. 천천히 눈을 떴다가 섬광에 눈이 부셔서 다시 눈을 감았으며 살아있는 게 느껴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생명의 탄생하는 그 행복감은 오로지 여자만이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아들이 탄생과 더불어 행복감에 나는 혈소판 감소증이 있었던 것을 여러 해 잊고 살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출혈증상은 이미 온 몸으로 확산되었다. 입술 안쪽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검붉은 물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나는 놀라 뒷걸음을 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혈소판이란 생소한 증상도 처음과 달랐기에 예측을 못했다. 그리고 딱 5년 만에 재발했다. 도문 병원에 갔더니 빨리 연변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 날로 입원수속을 밟고 간호사의 안내로 병실에 들어갔다. 뒤 따라 들어온 선생님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눈꺼풀을 왼쪽과 오른쪽을 들어 올려보고 피부도 여기저기 만져보고는 “큰일 날 뻔했어요. 눈에까지 출혈이네요.”라고 말을 했다. 그러고는 차트에 적고 있는 간호사에게 뭔가 지시를 했다. “내일 몇 가지 추가 검사를 하고 나서 일반 병실로 옮겨 드릴게요” 라고 말하던 간호사는 나에게 호흡기를 부착해주었고 주사기로 피를 뽑았다. 능숙한 솜씨로 엉덩이 주사를 놓고 팔 안쪽 혈관에 주사바늘로 꾹 찌른 뒤 스탠드폴에 여러 혼합된 정체모를 수액 링거병을 걸어놓고 나갔다. 나는 눈만 뜨면 눈물이 마구 솟아져 나올 것 같아 눈을 살며시 감고 벽 쪽으로 돌아누워 자는 척 했다. 채혈해서인지 바로 잠이 들었다. 벌레가 우글우글 거리는 꿈을 꾸면서 잠에서 깼다. 늦은 밤 병실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불이 꺼져 있지만 출입구 우측 작은 창으로 불빛이 스며들어 물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때 복도에서 오고 가는 조급한 발걸음 소리와 울음소리가 뒤섞여 요란하게 들려왔다. 점점 궁금해 귀를 기울려 들으면서 몇 명이나 울고 있는지 예측했다. 근데 병실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꿈인가 아님 환청일까?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몸을 옹그리고 움켜졌던 이불을 끌어 잡아 당겼다.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철 결핍성 빈혈이 있는 소녀 환자가 숨졌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제야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나는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빈혈로 코피가 자주 나면 나는 머리를 뒤로 젖히는 잘못된 응급처치를 했다. 그래서 인지 코피가 멈추지 않고 식도로 넘어가면서 피의 비린내를 맡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갑자기 공포가 밀려왔다. 간호사가 언제 나의 앞에 나타났는지 “잘 주무셨어요?”라고 말을 걸어왔다. 멍을 때리는 나에게 골수검사를 해야 한다고 통보하고 나갔다. 어디로 갈 필요 없이 침대에서 골수검사를 진행했다. 생각했던 탓인지 나는 입술 사이로 폐 깊은 곳에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마취 때문인지 생각보다 별로 아프지 않았다. 특발성 혈소판 감소증라는 확진을 받았다. 나는 이렇게 투병길을 걷게 되었다.
 
탈출기
며칠 후 다른 방으로 옮겼다. 격리실로 들어가는 복도에 임시로 만든 작은 방이다. 침대 하나, 간이 책상과 걸상이 놓여 있다. 눈을 뜨면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특별한 감옥 안이다. 나는 여기서 매일 채혈을 하고 12시간씩 수액을 맞으며 약은 한 줌씩 먹었다. 그 다음은 간호사가 들고 온 환자복 중에서 소독약 냄새가 덜 나는 걸로 갈아입는다.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이다. 나만의 홀로 생존하는 공간에서 인젠 죽음 밖에 기다릴게 없는 느낌이 든다. 고작 며칠인데 몇 달이 지난 것만 같았다. 이 방을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 생각하던 끝에 화장실을 가는 척하면서 병원 안을 돌아다녔다. 이방에는 누가 있는지, 방 번호와 사람들의 이름까지 모두 기억했다. 이것은 나의 첫 탈출이다. 어느 날 창밖에 비가 왔다. 나는 창가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귀를 쫑긋 세워 음악대신 빗소리를 감상했다. 이때 앰블런스 소리가 들려서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바깥세상이 더욱 궁금했다. 내일부터 연길아침시장으로 가겠다고 말을 했다. 답답해도 내색하지 않다가 애처럼 졸라댄 나를 보고 엄마는 웃으면서 승낙을 했다.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분비는 아침시장은 삶의 활력이 넘쳤다. 여기 장사하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열심히 일을 하면서 나한데 인사를 건넸다. 이름도 모르는 낯선 분들인데 그 얼굴에 나도 반가웠다. 그리고 먹지도 않던 생선비린내도 좋았다. 그 뒤로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사람냄새를 맡기 위하여 이 낙원을 찾았다. 아침시장에서 음식을 먹고 반찬도 사왔다. 그러면서 나는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서 사는 이 특유한 분위기 속에서 삶의 희망과 용기를 찾았다. 더불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몰았던 내가 가족을 위하여 죽음이 아닌 살기 위한 탈출을 시도하면서 살기로 했다. 진정한 탈출은 이 병원을 떠나는 날이다. 그러나 나는 적응하기 힘들어 했다. 지금도 그때 잊혀 지지 않는다. 링거와 피검사를 많이 하다 보니 나의 양쪽 팔다리에는 하얗게 부풀어 올라와 진물이 군데군데 터진 자리에 주사바늘이 남긴 시퍼런 피멍 자국은 빨그레한 속살이 들어나 있다. 가끔씩 물집이 생긴 곳에 고름이 나온다. 약의 부작용으로 체중이 갑작스럽게 증가하면서 몸통의 비만이 생겼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은 울적했다. 그래서 거울도 보지 않았는데 나는 여기에서 더 끔찍한 것을 경험을 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심장이 멎으면 피부는 회색빛을 띠면서 피가 흐르지 않는 입술 손가락 발톱은 파래지면서 푸른색을 띤다. 한 열두 시간이 지나면 입, 눈 등 인체의 모든 구멍에서 물기가 사라진다. 가스 때문에 피부는 자연분해 되어 갈라지고 찢기다가 죽은 시체가 썩기 시작하는지 냄새가 난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왠지 슬펐다. 어쩌면 내가 누웠던 이 자리도 누군가 죽었던 자리였을 것이다. 나도 곧 쓸쓸한 죽음을 맞이해야겠구나~! 눈물이 났다.
 
병원은 죽음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기능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루 빨리 탈출하고 싶었지만 서두른다고 오르락 내릴락 하는 혈소판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매번 혈소판수가 곤두박질치면서 곧 닥쳐올 죽음을 암시했고 그 순간마다 절박한 감정에 시달리며 나의 삶의 불빛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두 달째 호전이 없자 연변병원 측에서는 천진에 있은 중국의학과학원 혈액질환병원(천진혈액연구소)을 추천했다. 골수검사와 몇 가지 검사를 했으나 원인은 밝혀지지 못하고 그저 ‘특발성 혈소판 감소성 자반증(特发性血小板减少性紫癜 ITP)’이라는 확진을 받았다. 치료 중에 심한 출혈증상이나 효과가 없는 경우 수혈 혹은 비장절제술을 고려하지만 이것은 근본치료가 아니므로 다시 재발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내가 비장절제술을 원하지 않았기에 보수적인 방법을 택했지만 치료가 잘 되는 것 같았다.
 
퇴원을 한지 몇 개월 지났을 때다. 오랫동안 프레드니솔론(스테로이드의 일종/强的松)을 사용한 탓에 합병증이 왔다. 그 동안 약물의 부작용 때문에 염증이 생겼는데 발열과 기침증상으로 이어지면서 조금 불편하였다. 죽음의 불안에 대비하면 통증이 차라리 위안이 되였다. 통증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기에 나는 그런 통증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마비된 건지 아님 습관이 된 건지 통증을 못 느꼈다. 극한 통증이 아니면 참을 만 했다. 한동안 반복된 발열로 전신이 쇠약해지고 칼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에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그 느낌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때가 되어서 비로소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흉부 엑스선 촬영으로 결핵성 늑막염(肺结核胸积水)이라고 진단을 받았다. 기관지, 폐까지 나빠지면서 가슴에 물이 차서 가슴에 손가락 굵기의 호수를 삽입하여 주사기로 흉수를 제거하고 폐결핵 치료를 했다. 오랫동안에 치료에 마지막 기력까지 다 소진했는지 무기력했다. 손가락 까딱할 맥도 없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가끔 욕창을 방지하려고 하루에 몇 번씩 돌아누울 때마다 가는 숨소리로 앓는 소리를 냈다. 때론 누워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간신히 걸어보려고 했지만 몇 발자국 걸으면 숨이 차서 헐떡거리다가 걷지도 못하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산소통을 부여잡았다. 이렇게 긴 숨을 들이쉬면서 산소통으로 연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핵을 앓은 뒤 합병증으로 나타나는 기관지 협착증(支气管狭窄)이다. 그 순간 여태껏 공들여 쌓은 탑이 와르르 무너져버린 느낌이랄까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증폭했다. “아, 이제는 죽겠구나! 이병 저병 하면서~ 몸과 맘도 준비를 해야지.” 나는 숨 쉬는 것마저 너무 고통스러워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수저 라면 조금 더 버티고 있겠지만 흙수저를 입에 물고 태여 났기에 돈으로 치료하는 것도 여기까지구나 인젠 이만큼 잘자, 더 살면 보살피는 주변 사람의 생을 갉아먹는 것이 아닌가? 내게 왜?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나는 불면의 밤으로 시달리면서 수면제에 절어 있었다. 수면제로 인한 아리숭한 상태에 늘 우울하고 절망스러웠다. 투병생활은 외롭고 고통, 그리고 불안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싫었다. 여기까지 끌고 온 그 자체를 증오했다. 나는 자살을 결심했다. 왜냐하면 고통 속에 기생충처럼 살려니 남은 삶의 가능성를 포기하고 싶었다. 내가 삶에서 느끼는 행복보다 고통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죽기 전날에 나는 유언장를 쓰려고 했다. 막상 쓰려니 아들에게 남겨줄 유산도 없고 모아 놓은 돈도 없었다. 그 동안 병을 치료하면 엄마에게는 빚만 남기고 가야 했다. 그래서 쓴 다는 것이 “미안하다, 미안합니다”라는 말뿐이었다. 이렇게 죽어서도 미안할거면 이때로 조금만 더 살아볼까? 나는 다시 한 번 “죽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를 던지고 계속 답을 찾기로 했다. 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삶에 애착이 있는지 밥 먹는 시간이 되면 너도 나도 식판을 들고 마치 오래 기다린 듯이 뛰쳐나왔다. 식판에 음식 가득 담고 자리로 돌아가서 갈비를 움켜쥐고 한입에 쏙 집어넣고 뼈만 뺏는다. 반시간이 지나 음식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벼운 트림과 함께 그들이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깃들었다. 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더니 그들은 죽기 전까지 먹고 죽는 줄 알았다. 중요한 것은 다음날 그 다음날도 모두 살아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나뭇잎은 자기의 사명과 책임을 다 할 때까지 결코 나무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심한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도 악착같이 가지에 매달려 무서운 집착력을 보이다가 가을이 되면 자기의 사명을 다 하면 낙엽로 된다. 나는 죽음에 대하여 한번 진지하게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포기한다는 것은 심장과 뇌기능이 정지하면서 사망하는 그 순간까지 더 살고 더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 일에 대한 사랑 행복의 기회까지 박탈당한 기분일 것이다. 이대로 죽는 다면 분명 한을 품고 미련을 갖고 갈 것이며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이유로 숨을 끊은 당사자는 눈을 감지 못한 체 죽어가면 살아 있는 자들은 눈을 감겨준다. 그렇다. 죽으면 그만인데 살아 남아있는 가족은 얼마나 아플까? 그리고 곧 죽음이 내 앞에 닥쳐온다면 아픔보다는 죄책감이 먼저 들것 같았다. 삶의 포기란 믿고 기다려주는 가족한데 얼마나 미안하고 잔인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자신을 위해 아파 줄 사람이 없더라도 어쩌면 누군가 아파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삶을 끝내기 전에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언젠가는 맞이하겠지만 아직 찾아오지 않았는데 왜 죽음으로 자신을 몰고 가야하나!?……아마도 나는 남의 죽음으로 너무 친숙하여 진 탓이리라. 나는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살고 싶었는데 그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아파 보니 삶이 더 절실했다. 나는 나만의 방법을 터득하면서 최후의 통첩을 받는 날까지 열심히 살기로 했다.
 
나만의 치유방법
의사는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다. 먹지 말라고 하면 더 먹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아이처럼 졸라대기도 했다. 약 때문에 입맛이 잃고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지 않지만 힘들게 간호하는 엄마를 보면서 억지로 먹어야 했다. 콜라켄이 많은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가끔 순순히 먹지 않았다. 그때면 엄마는 “백혈병을 앓고 있는 저 애는 항암치료를 받고도 잘만 먹더라”라고 잔소리를 했고, 나는 날카롭게 신경질을 냈다. 아파하는 딸의 모습에 엄마가 속이 상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의 투정은 점점 심해졌다. 한 바탕 화를 내고 나면 얼마나 미안한지 몰았다. 엄마는 수소문 끝에 장춘에 용한 이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나를 데리고 밤새 기차를 타고 간 곳은 한 시장마을에 있는 작은 병원이다. 엄마는 돈이 부족한지라 한 달 치만 처방해달라고 사정했다. 이렇게 엄마는 매번 나를 위하여 용하다는 한의사와 비방(秘方)의 명인들을 찾아 정체불명의 약물을 받아왔다. 간혹 아무런 검증도 절차도 없는 약물(환약, 가루약)을 내 몸 안에 쏟아 넣어야 했다. 그저 건강해지길 바람에 나는 그 쓴 약도 참고 삼킬 수 있었다.
얼마 후 엄마는 나에게 혈소판에 관한 책을 선물했다. 손바닥 크기의 얇은 책이다. 그 책에는 어떤 병인지, 뭘 먹어야 하는 적여 있었다. 그 책을 보면서 각종 요리법으로 나만의 건강한 식탁에 신경을 썼다. 때론 요리사라도 된 듯 말이다. 병 하나에 처방은 수십 가지지만 체질에 맞는 치료법을 찾기는 힘들었다. 구병서의(久病成医)라더니 오래 앓은 병에 대하여 나는 절반쯤 의사가 되었고 자기 몸을 제일 잘 알았다. 모든 약들은 일시적으로 정지시켜 병세의 진행을 늦출 뿐이다. 진정한 치료는 약을 안 먹는 것이다. 나는 과감히 부작용이 있는 호르몬제를 감량하면서 자연 치료법으로 천천히 낳아지는 방법을 찾았다. 식사메뉴와 소화상태, 나의 컨디션과 체중에 따라 운동시간을 자면서 내 체질은 무엇인지 현재의 영양상태 등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허약 체질을 타고난 탓에 원인을 찾지 못해 여러 병증에 시달리며 긴 투병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끝까지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치료법과 약과 그 부작용에 대한 수 많은 자료를 보면서 나와 병을 알아 갔고 치유방법을 터득했다.
 
나의 투병생활을 글로 쓴다면 책 한 권을 써도 아마 모자랄 것이다. 처음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숨이 콱 막히며 노랗게 보이는 하늘에 짓눌렸어 입으로는 죽기보다 힘들다고 외치지만 어쩌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삶에 대한 갈망이 움트고 있었는지 모른다. 애초부터 그 속에서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고 나름대로 새로운 삶을 터득하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았다. 왠지 죽을 것만 같아 마음 한구석은 씁쓸함이 배어나 왔다. 10여 년 동안이라는 긴 투병 속에서 결코 죽지 않고 지금까지 매 순간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고 있다.
 
건강관리이란 질병이 없는 상태만 아니라 한 질병에서 또 다른 질병으로 이어지는 연속으로 벽에 부딪친 그 순간 질병과 맞서 싸우면서 치료에 임하는 그것일 것이다. 물론 이는 나의 생각이다. 나는 늘 ‘이번이 마지막’ 이라고 자신을 안심시키면서 지금까지도 다른 진료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젊은 나이에 나의 몸은 종합병동이 되였고 그 스트레가 계속 되여 때론 자포자기상태에 빠졌지만, 그래도 가족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응원 속에 오늘까지 걸어 올 수 있었다. 나는 정말 죽기 살기로 달렸다. 힘들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러나 지금 딱히 눈물이 나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여태 열심히 살았기에 삶을 다 한다고 해도 불만은 없을 것 같다. 죽음이 찾아온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 하였다고 본다. 난 투병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깨닫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기후, 생태계의 변화와 시대가 발전할수록 현대인들이 겪는 각종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떨어져 늘어나는 신종질병에 불안하고 있다. 마치 지난 사스와 메르스등의 바이러스가 모든 사람을 공포로 몰고 갔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 병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두렵다. 그리고 누군가의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의 기적을 낳을 것이다. 사랑으로 함께 한다면 당신의 병도 나처럼 언젠가 치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 쓰는 이유
의사는 나에게 혈소판감소증이 완치라고 말 한 적은 없다. 단 10년쯤 재발이 되지 않는 것을 봐서 병은 치료된 같다. 이는 지난날들은 나의 아픈 추억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또 다른 질병 속에서 생존은 계속 진행 중이다. 어떤 이들은 굳이 모른 사람에게까지 내가 아팠고 힘들었다 해야 하나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쓴 글이 누구의 동정심을 얻기 위해서 아니라 다만 질병을 시달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꼭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정말 너무나 소중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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