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길우 수필 60> 동파와 적벽 東坡 赤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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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우 수필 60> 동파와 적벽 東坡 赤壁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7.06.0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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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길우 : 문학박사, 수필가, 시인 문학의강 문인회 회장 문학의강 영상낭송회 회장 skc663@hanmail.net
[서울=동북아신문]동파(東坡)는 중국 북송(北宋)의 소식(蘇軾, 1036.12.19.∼1101.7.28.)의 호이고, 적벽(赤壁)은 그가 지은 「적벽부 赤壁賦」의 작품무대이다. 둘 다 지명인데 사실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다. 동파는 작은 언덕이었고, 적벽도 강가의 붉은 절벽이었을 뿐이다. 그런 곳이 한 문인의 호로, 문학의 한 명작무대로 각기 유명해진 것이다.

그런데, 소문이 나면 덧붙여지고 과장되고, 때로는 내용도 바뀌거나 왜곡되기도 하여, 본래의 것과 다르게 되기도 한다. 소식의 ‘동파’와 ‘적벽’도 그 한 예가 되기도 한다.

북송(北宋)의 감관고원(監官告院)을 맡았던 소식이 왕안석(王安石)의 개정 신법을 반대하다가 1071년에 스스로 지방 근무를 자청하여 항주통수(杭州通守)로 나갔다.

호주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어사 하정신(何正臣)에 이어, 이정(李定)과 서단(徐亶) 등이 소식의 글 중에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이 있다고 탄핵을 올렸다. 소식은 7월 28일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고, 8월 18일에 어사대 감옥에 하옥되어 100일 동안 갇혔다. 심문에 넘겨진 시가 100여 편이 넘었고, 모든 시의 창작의도를 설명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식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사건은 12월 29일 소식을 황주의 단련부사에 좌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정치 관여는 않고 황주에서 거주해야만 하는 일종의 유배생활이었다.

1080년 소식은 21살인 아들 매(邁)와 함께 2월 1일 황주(黃州)에 도착했다. 황주는 지금의 호북성 황강현(湖北省 黃岡縣)이다.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소식은 버려진 채 병영으로 있는 언덕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삶의 터전이 된 그 동쪽 언덕을 ‘동파(東坡)’라고 이름 짓고, 자신도 동파거사라고 했다.
소식은 위기에 앞날을 살펴 대처하고, 불행에 방도를 찾아내 삶을 일구어냈다. 그런 속에서도 시서화 재능은 끊임없이 펴나가 팔방미인 소리를 들었다. 그러한 삶에서, 이름도 없는 시골의 작은 언덕 동파가 훗날 천하의 유명한 호로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적벽(赤壁)’도 마찬가지이다.
“임술년 가을 7월 기망[음력 16일]에, 나는 손님과 함께 배를 띄우고 적벽(赤壁) 아래에서 노닐었다. 맑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물결도 일지 않는데, 술잔을 들어 손님에게 권하며 [시경(詩經)에 나오는] 명월의 시를 읊고 요조의 장(窈窕章)을 노래했다.”
소식의  「전 적벽부」의 첫머리부터 ‘적벽’이 나온다. 10월에 지은 「후 적벽부」에도 ‘적벽’에서 놀았다고 하였다.

“이에 술과 고기를 가지고 다시 적벽강(赤壁江) 아래에서 노니, 강물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깎아지른 강 언덕은 천척이나 되는구나.”
전과 후에 다 나오는 ‘적벽’은 황강현(黃岡縣), 곧 황주의 서북쪽 장강(長江) 가에 있다. 적갈색의 바위벼랑이어서 적벽이라 불린다.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의 적벽이 아니다. 그 적벽은 호북성(湖北省) 포기현(蒲圻縣)의 북쪽에 흐르는 장강(長江)의 남쪽 기슭에 있다. 황주의 적벽보다 더 서쪽이다.
그런데 ‘적벽대전’과 ‘적벽부’가 둘 다 유명하고, 또 이름도 똑같이 ‘적벽’이어서 서로 다른 지역인데도 흔히들 같은 곳으로 여기기가 쉽다.

더구나, 소식은 「적벽부(赤壁賦)」에서, 황주의 적벽을 노래하면서 삼국시대의 ‘적벽대전’과 결부시키고 있다.
"이곳은 조조가 주유에게 공경을 당하던 곳이 아닙니까? … 바야흐로 형주를 공격하고 강릉으로 내려오며 물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매, 크고 작은 배들이 천리까지 이어졌고, 배의 깃발은 하늘을 가리었는데, 강가에서 술을 마시며, 긴창을 가로놓고 시를 지었으니, 참으로 일세의 영웅이었으나, 오늘 어디에 있습니까?”
소식이 배를 타고 바라보고 있는 ‘적벽’이 바로 적벽대전의 ‘적벽’으로 착각하기 쉽게 되어 있다. 지리를 모르는 이는 더욱 그럴 수 있다. 두 지명의 같은 이름과 고금(古今)의 사실을 함께 활용하여, 유려한 문장과 호소력 있는 표현이 읽는 이들이 쉬 그렇게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사람이 훌륭해지면 사람만이 아니라, 그가 살던 지명까지도 유명해진다. ‘동파’는 이름 없는 시골의 작은 언덕에서 당송8대가 소식을 대표하는 유명한 호가 되었고, ‘적벽’은 분명 두 곳인데 소식의 명작 적벽부로 말미암아 적벽대전의 적벽과 함께 둘 다 이름난 지명이 되었다.

문인은 작품으로 살고 작품을 남긴다. 이름난 작품 한 편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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