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나는 2010년 11월 20일에 무연고 동포 방문취업으로 한국 능력 시험을 보고 전산 추첨에 당첨되여 고국에 대한 신비감에 젖은채로 정든 고향인 화룡을 떠났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아보는 나의 마음은 더없이 기뻤다. 거리 패쪽마다 걸려있는 한민족 얼인 우리말 우리 글들이 그처럼 정답게 느껴졌고 분주히 오가는 차량들과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 건물들로 장관을 이룰듯한 아름다운 야경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한국에라곤 일가친척 하나없이 의지가지 없는 초행자이지만 다행히 한고향 친구의 소개로 한국산업공단에서 취업인수 교육을 받아 외국인 등록증을 발급받고 겨우 식당의 설겆이 일을 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해보는 일이라 생각과 달리 무척 힘들었지만 그래도 고향 친구인 주방장분의 관삼과 배려 덕분에 겨우 6개월이란 시간을 일해 왔다. 그러다 얼마후 타인의 소개로 간병 협회에 가입하고 간병실습과 더불어 요양원에가 공동 간병일을 시작하게 되였는데 생각과 달리 엄청 힘들고 쌓여지는 스트레스가 너무나도 많앗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이역멀리 떠나 올때만해도 50대 중반의 아줌마 였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60대에 들어선 할머니가 되었다.
빈궁한 가정살림에서 벗어나 잘 살아보겠다고 사랑하는 남편에게 두 아이를 맡겨놓고 출국의 길을 선택하여야만 했던 나, 첫발을 내 디뎠던 타국의 현실의 생활은 기대와는 달리 너무도 힘들어 머리엔 어느덧 흰서리 내렸고 이쁘장하던 얼굴 이마에도 잔주름이 잡혀 나도 모르게 할머니를 방불케 하는 그런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이럴듯 요양원에서의 간병인의 매일 하는 일은 지겹고 힘들었지만 봉사하는 맘으로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달래고 또 달랬다. 헌데 이것 역시 너무도 힘들고 받아들일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였다.
아침 다섯시에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환자 들이다 .간밤에 잠들었을때 혹시 무슨일 생기지나 않았 는지 하면서 7명의 환자 들을 돌아본다. 그들은 마치 애들처럼 포근히 잠속에서 각자 자기의 꿈을 향해 달리는 듯한 표정 인지라 겉보기 에는 앓는 환자들 같은 기색이라곤 그 누구도 알아볼수 없을만큼 조용한 분위기다. 환자들의 년세는 70부터 90세 좌우로 100세를 바라보고 사는 분들로서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병으로 할수없이 요양원에 오게 되는 것이다 .요양원은 주로 많은 로인들 모두가 장기 입원으로 죽어서 시체가 되여 나오는 곳이라 해도 무방하다. 어찌보면 삶의 마지막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부분은 치매 환자로서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좀 많고 멍청한 환자. 종일 노래만 하는 환자들만 모인 곳이기도 하다. 치매가 와서 입원 하는 순간부터 자식들도 알아보지 못하면 그동안 만은 내가 간병 인이자 보호자로서 환자들은 저에게만 의거하고 년세있는 분들은 귀가 어두워서 제가 소리쳐야 듣고 손시늉을 해야 겨우 알아 듣는다. 병동에는 모두 7명의 환자가 있는데 2명은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고 5명은 휄체어를 타고 다니는 환자로서 그 할머니들은 하루에 화장실을 여섯번 드나 드는데 제가 들어서 변기에 앉히고 들어 내리 우고 하다 보니깐 하루에 평균 열두번씩 시중드는 셈이다.
내가 돌보는 환자중 한 노인은 대변 치매를 앓고 있는데 대변을 본다는 말도 없이 언제 대변을 봤는지 제가 모르게 변을 본뒤 서랍에 넣거나 바닥에 버리는가 하면 지어 자기가 먹고난 밥사발에 까지 넣고는 덮개를 꼭 덮어놓고 또 곁에있는 환자들 한테 던지기도 하면서 침대. 이불과 옷에까지에도 누런 맬을 해간다. 그것도 하루에 4차례씩 변을 보고 산지사방을 어지럽힌다. 그러다 보면 나는 그 역한 냄새에 속이 막 울렁 거리며 뒤집혀 진다. 그래도 꼭 참고 깨끗하게 �어 닦아 놓는다. 그러다 하도 애가 타고 화가나서 노인에게 왜 그러냐고 몇마디씩 할때도 있다. 그러면 할머니는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퍼 붓는다. 내가 그만 욕하라고 하면 도리여 나를 막 물어놓기도 한다. 그렇게 몇번이나 팔을 물리웠는데 지금도 그 생채기가 남아 있다.
노인은 또 남몰래 늘 다른 환자들의 서랍에서 돈도 꺼내고 음료수 과자 사탕까지도 꺼내여 다 먹어 버린다... 그래서 옆의 할머니들은 이런 환자들의 시달림에 못이겨서 아예 다른 망으로 옮겨가군 한다. 그리고 다른 한 노인은 제가 없는 틈을 타서 소변을 아무곳에나 막 보군 한다. 그럴때면 나는 하도 답답하여서 “ 할머니, 왜 이러세요 ? 저도 잠을 좀 자야 할거 아닌가요? 그래야 할머니들을 돌볼수 있는게 아닌가요 ? “하고 말하면 되려 할머니쪽에서 날 막 욕한다
“누가 널 자지말라했냐? 너 어서 지금이라도 콱 자라”
이와같이 대변 치매에 소변 치매에 까지 얽히어 보다나면 하루에 다니는 화장실 차수만 해도 거의 30차씩 된다. 그래도 대낮엔 괜찮은데 남들 다 자고있는 한밤중엔 정말 말이 아니다. 그들의 시중으로 엉뎅이를 닦아줄랴 바지를 춰 입혀주랴, 장반 거의 뜬눈으로 지새다 싶이 한다. 만약 내가 이렇게 까지 하지않고 좀이라도 홀시하다보면 그들이 저몰래 화장실 들락이다 락상이라도 생기면 그 책임은 물론 나한테로 자칫하면 치료비에 지어 일자리까지 떼우게 되는 상황이라 간병인들의 돈벌수있는 기회란 참으로 쉽지않고 그에따르는 심리자극에 의한 스트레스 또한 말같지 않는 정신적 타격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참 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일 ...이럴 때면 모든것을 물리치고 고향에 돌아 가고 싶은 생각 간절히 나군하여 그저 남몰래 흘린 눈물 그 얼마인지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고향에 두고 왜 이렇게 눈물 흘리며 돈 번담? 밤이면 잠자리에서 고향생각이 간절할때가 많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했으니 돈 벌려면 이만한 고생도 안하고 어떻게 벌수 있는가?)
나는 이렇게 자아위안도 해보았는데 그럴때면 새힘이 솟구치기도 했다.
아침이면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세면에 이어 기저귀를 갈아주고 방청결을 한다음 식사 준비를 한다. 식사가 끝나자 곧바로 커피를 타주고는 일곱명 환자의 물리 치료로 부터 침을 맞히고 부황을 떠주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가 되면 또 점심시간이 된다. 점심대접후 오후가 되면 환자들로 하여금 다종한 유희 놀이도 시작한다. 그림 그리기와 노래 춤 연습까지 ....그러느라면 또 저녁식사 준비 이와같이 매일 하던일들을 중복 형식으로 하고 또 하고 해도 남는것은 오직 스트레스와 신체상의 아픔만 남아돌뿐. 그래도 환자들만 기뻐하고 하면 따라 저의 맘도 편한것이다. 이렇게 운동 끝나 다섯시가 되면 저녁식사 끝난후 환자들의 이발구강 청소를 끝내고는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약 대접후 이부자리까지 마련후 편히 주무시라고 인사까지 하고나면 나의 하루 일상이 끝나는상 싶어진다.
이와같이 하루를 팽이돌 듯 분주히 서두르고나면 밤 아홉시가 된다. 그나마 잠잘 시간만 되면 제일 편하다. 하루의 피곤도 풀겸 가끔씩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께 안부도 전하고 또 이와같은 좋은 글도 쓸수있게 되여 그나마 참으로 좋다는 생각도 가져보게 된다. 간병 일이란 사실 그대로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다. 치매로 정신을 망각한 로인들과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울고 웃으면서 그들의 짜증을 노래로 .그들이 퍼붓는 욕 소리를 자장가로. 간호사 아가씨들의 신경긁는소리를 아름다운 선률로 들어주고 맡기도 역한 그 구린내를 향으로 느겨오면서 이것을 마치 요양원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간주해왔다.
세월의 흐름속에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 사이도 변하고 있는 이때 부모 자식사이도 변해가는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 자식많고 출세하여 유명인사 된들 무엇하랴 ... 한몸 의지할곳 없어 타인의 손에 맡겨져 눈치생활 하면서 외로운 나날들을 보내면서 지어 자기의 애지중지 키워오던 자식들도 알아보지 못할 망정 사랑 그리움조차 기억속에서 지워진 슬픈 인생. 마치 천진란만한 애들처럼 요양원에서 주는 하루세끼의 밥을 유일한 락으로 간주하는 참으로 불쌍하고 외로운 할머님들의 딱하신 모습들이다. 허지만 나는 간병일은 물론 돈벌기 위한 일이긴 하지만 반면에 나는 늘 감사와 배려의 긍정적 맘으로 환자들을 내 부모 내 가족처럼 생각하고 그 역한 똥덩이를 금덩이로 생각하고 매일을 사랑하는 내가족을 위해 충실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간병일은 말그대로 창살없는 감옥이고 자유도 없는 칠흙같은 감옥이라해도 과언이 아닐상 싶다.
이럴듯 간병일 해오는 나는 인젠 몸도 망가져 어디나 아프지 않는곳이 없다. 아프면 항상 진통제와 정통편으로 그 모진 아픔을 참고 견디면서 계속 하던일을 견지해 나간다. 이것이 내가 여직껏 한국에 나와 그토록 뼈저리게 느껴본 내 일생에 있어서의 한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최대의 체험 교훈인겻 같다. 그러므로 우리모두 돈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아프면 인차 의료 검진 받고 제때에 치료하면서 항상 밝은 모습의 웃음진 얼굴로 걷기 운동으로 부터 손놀리기 등 여러가지 다양한 운동으로 건강 관리에 유의하면서 자신의 남은 인생을 아름다운 삶의 터전으로 이쁘게 장식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것이야 말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우리가 아무런 근심 걱정없이 풍유롭게 살아갈수 있는 최상의 건강 비결이 아니겠는가 다시 한번 더 생각하고 싶어진다.......
충북 영도군 영동읍 설계리
감고울 요양 병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