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하루의 길이
그대도 느꼈겠지
사처로 솟다 떨어지며
이내 어둠 속으로 침잠하는
희미한 기억같은 선율
펼쳐야만 내용 알 수 있는
굳게 닫긴 책무더기와 저만치 떨어져
멍하게 허공으로 시선 돌린 빈 의식
또 느꼈겠지
아침 면도는 수염에게 어울리는 것이라고
새들이 밖에서 왁자지껄 떠들어댔던 건
그 수염깎음과 일고의 가치없이
무관한 소행일지도
혹시나 아닐지도 따위의 사소함이라던가
이 아침과 저녁 사이 거리는 수염 자라난
길이로 측량할 수 밖에 없다고 확신해야 할
근거, 닫힌 책 펼쳐서 알 바는 없지 않느냐고
그대만이 느끼지 않았기에
부질없이 한탄하고 그 한탄에 놀랍게도
감동되려고까지 하는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허무해지는 그런것 말이지, 지금 이 음악같이
젖어들어 끝내는 흔적마저 남지 않을 밤의
깊이에 묻혀 자족한다고
새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아침에 나는 또 수염 깎을 거다
2017.05.01
호수9
오너라 흘러 오너라
그 어디에서든 그 언제든
호수로 오너라
가끔은 흐려져도 물흐름 탓하기에는
호수구나
다만 그림자 검게 비칠까 걱정일뿐
이 역시 호수가 아니었더냐
비였든 냇물이었든 원한다면
오너라
또 어느날인가 문득
은밀하게 흘러가고 싶다면
그렇게 가거라 호수는
보내리라
알거니, 가는 그 흐름
가고 오는 그 흐름 옆에서
풀은 자란다 꽃은 핀다
이윽고 문득 호수는
처음을 기억해낸다
정녕 깊숙히 패었을 때
하늘에서 땅에서 물길 흘러들어
호수였구나
마르지 않는 호수였구나
오늘도 흘러드는 물갈래 껴안으며
호수였구나
2017.05.04
그날저녁
축축한 의식 속으로 문을 열고
너는 들어오구나, 절룩이며
저녁이다
무슨일이 있었던 거니?
물어라도 봐 줬으면 좋으련만
엄마는 말이 없네
깨진 콧등에 반창고 붙이며
엄마는 말이 없네
안경이 박살났는데 세상은, 모르겠다고
왜 더 또렷하게 보이는지
말하려는 그때
내일 또 가서 싸워, 왜냐하면
싸움이니까, 자신과의...
그랬지, 엄마는 그랬지
밥부터 용감하게 많이 먹어야 한다고
기억한다
마르지 않을 의식 저편
분노보다 뜨거운 그리움을
절룩이며 걸어들어가던 그날 저녁 너의 모습을
201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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