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전유재] 폐허 외 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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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유재] 폐허 외 5수
  • 유재전
  • 승인 2017.04.29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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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유재 중국 소주 常熟理工学院 外国语学院 朝鲜语专业 교수/ 한국 숭실대학교 현대문학 박사졸업/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폐허
 
폐허가 아직 남아
있다는 건
얼마나 큰 다행인가
남아있다니
파괴도 파괴할 곳을 잃은...
 
비루한 정신 하나 뉘일 곳 못찾아
헤매게 할 순
없다, 어디라도 가서 주저앉아야 할 곳
여기에서
가는거다 거기까지
 
욕되게 닿을 거기까지가
그래서 복되다
온갖 의미에 육신을 입혀
이윽토록 헤어본들 덧없지 않는가
 
이제는 낭비하지 않으려네
이미 버렸거나
버려진 것이나 버려질 것들에게
미리
안녕이라고
 
그러나
언녕 사라진 듯한 것들이
가야 할
곳 끝내는 서럽게 정녕 못찾는다면 그만
 
같이 가보세
폐허로
이 정신처럼
서로를 부둥켜 안으면서
 
폐허에서의
기쁨은 혐오스럽다
 
2017.04.24
 
기억
 
어깃 굴러 꿈틀이는
 
수천의 알 품은 채
비린내 가득히 기억이여
 
점액질 뿜어 스스로 감쌌더냐
짙푸른 물에 실리지 못하고 여직
여기서 흐느적이냐
 
느릿느릿 흐른다
둔덕 사이에 꽉 끼어
스며들 듯 넘쳐날 듯 어이 어이
 
경사에서 굴러 떨어진
기억 한 줄기
찌익 비틀려 서럽게 운다
 
2017.04.26
 
호수8
 
세상 눈물
마르기 바로 전날에
먼저
마르겠다고 약속
했다는
비밀, 호수에게
묻지 마라
 
2017.04.27
 
새벽의 침묵
 
새벽에 잠이 든다는 것과
깨어난다는 것과
잠들었다 깨어난다는 것과
그러기를 반복
한다는 것과의 대화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
하얗게 잘린 검음, 의 운명
 
위안마저도 거추장스러움을
알게 될 날이 두려워 새벽
빈터에 기댈 곳 없이
망명하는 수고로움의 틈 속에서
지나갔음은 와야함에 허리를 찔려
무너지네
와르르 무너지네
 
올 것은 와야하는 법, 이기 전에
이미 온 것임을 자각할 수 있을
자리
잉태하기까지가 못내 서러워
지나감과 올 것의 빈틈없는 공백에서 흔들
리며 피고 지기를, 또 피기를 지속
 
한다, 깨어남과 깨어나지
않음은 모두 정지한다
 
침묵은 말을 할 줄 모른다
 
2017.04.27
 
유혹
 
단언컨데
봄이 유혹하지 않았으면
꽃은 피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단언컨데
꽃이 유혹하지 않았으면
봄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람은 천연스레 불어가고
불어오고
봄에는 꽃이 핍니다
 
2017.04.28
 
가을 창문
 
그리하여
가을이다, 쉽게 떠밀려가는
더위, 단 하나의 창문 젖힌 손놀림 뿐이었는데
저토록 부서진다, 지나감이란
떠나기를 오래 전에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높아진 하늘에 전혀 예상못했 듯이
느닷없이 놀라면
안된다, 가을이니까
그래, 가을이니까
습관에 익숙해질만큼
진눈까비도 어느때인가 보아왔지
않았던가? 멀어진 하늘을
생소하게 대하는 이 놀람과 다르지 않게
 
이름을 붙이지 말자
지금을 가을이라 괜히
헛되게 부른다고 또 무엇이 달라지던가
이 역시 수북히 낙엽에 겹쳐 이슥토록 쌓이면 그만일뿐
열어젖혔던 문 끄당겨 다시 닫고
이제 또 문득 생각난듯
열어갈 때, 눈은 오고야 말 것이다
 
201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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