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에 축복 받으며 귀한 존재로 사랑을 듬뿍 받으며 태어나야만 하는 소중한 생명, 나는 지지리 복도 없이 3대독자 넷째 딸로 태어났고, 이 세상에 태어난 그날 끔찍한 화상으로 목숨은 겨우 부지 하였으나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갖고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농민 배고픔이 싫어 부모에게 작은 도움 주고 싶어 도시 공인에게 시집와 하나의 꿈이 있었어요. 딸 여섯, 큰언니 작은 동생들 챙기며 전 항상 못난 오리취급으로 살아온 그 느낌으로 살았어요. 옷도 학교 학비도 맨 나중이라 늘 부모에게 효도하여 나도 이쁨을 받고 싶었어요.
시집와 자식 낳고 아글타글 벌었어도 별로 먹고 쓰고 남는 것 없어 남들이 뒤를 이어 타향살이 길을 선택했지요.
이쁜 딸애와 시골에 부모님에게 집 장만하는 것이 저의 꿈이었어요. 십년 전 서울변두리에 괴나리 보짐을 풀고 사돈의 팔춘도 없는 낮선 곳 15만 원 짜리 작은 성냥갑 같은 2층집에 정착했습니다.
10월 말 바람이 불면 문이 덜컬덜컹 요란도하여 밤잠 못자며 뜬눈으로 보냈지요. 가뜩이나 겁이 많은데 연쇄살인사건이 그 무렵 텔레비죤에서 자주 보도하니 매일 떨며 문밖에 나갈 엄두도 못 냈습니다. 옆에 아랫집 중국사람 홀로 사는 독신 남성들이 다 너무 무서웠어요. 40대 중반 넘을 나이인데 왜 그때엔 그렇게 무서웠던지, 그냥 눈물만 나고 외롭고 슬펐어요.

친구 알선으로 간병일을 하였어요. 처음 길도 몰라 짐을 둘러메고, 여기저기 언 밥을 녹여 먹으며 설, 그것도 첫 설을 간병을 하며 보냈어요.
경험도 없고 고정한 나, 다른 간병들 주일마다 노임 받는데, 제가 간호하는 환자분 달 넘어도 월급 줄 생각 안하고 있으니 어느 날 큰마음 먹고 월급 달라고 하였어요.
지금도 생생해요. 서울대학병원 8층, 지금은 망가지고 없어요. 생활이 안 좋은 환자분 보험타면 준다며 기다려라하네요.
설날 다른 환자 분들 가족에선 음식도 갖고 오건만 우울증이 있는 사모님은 코빼기도 안보여 땅땅 언 밥 대충 녹여 김치에다 먹으려고 하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보름날에는 기어이 집에 가 보내겠다고 말하고 셋방에 호주머니 돈으로 무얼 사 먹고 싶어 야밤에 집이라 찾아오니 하느님 맙소사, 도적이 집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아 호주머니 돈 반지 다 털어갔어요.
또 엉엉 혼자 울다가 병원으로 가니 환자분 미안하여 더 못쓰겠다하며 나중에 돈 보내 줄 테니 계좌번호 남겨 달라하였어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니 친구들은 "너 인젠 월급 못 받을 거야 두고 봐, 그 환자분도 그 병원에서 다른 곳으로 갔어." 하고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이었요.
어떻게 해요, 월급을 달라고 하자니 8층에서 뛰어내려 죽고 싶다는 환자분입니다. 전 밉던 곱던 착해 보이고 고정한분이라 믿고 기다렸어요. 뭐 안 줘도 별 수 없는 거죠. 혼자 벌어 애 둘 공부시키다 사고 났으니 오죽하겠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후에 조금씩 다 보내 주더라구요.
그 후 당뇨할머니 보살피게 되었어요. 물론 몇 명 더 보았으나, 이 할머니로 하여 전 간병 때려 치웠어요. 간병 4명 바꾸고 제가 다섯 번 째라, 늘 약은 드시지 않고 단 빵으로 몰래 드시며 호사들에게 거짓말 자주하기에 제가 한마디 하였어요. 그랬더니 내가 공자 주지 간호사가주나, 내가 시키는 대로 만해! 하며 까탈스럽게 굴기에 그만두려고 하니 "어디에서 이 따위 거지같은 미친년 다 있니? 그래도 착해 보여 그냥 쓸려하였는데 감히 그만둬 내가 하지 말라 할 때 까지 해야지 네가 감히?……"하고 스트레스 받았다며 "손해배상 낼 거야, 아니면 계속할거야?"하고 행악질을 했어요.

그때 전 죽을 것만 같았어요. 너무 두려워, 어쩜 환자라고 해도 그렇게 험하게 욕할 수 있어요? 저는 엉엉 울며 일한 공자 며칠 못 받고 줄행랑을 놓았어요.
안 돼, 도저히 간병은 적성에 맞지 않아. 연변에서 어린이집 20여년 하여온 경험으로 애들 보고 싶었어요. 그리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외딴집 아이 둘 보러 가게 되었어요.
겁쟁이 아줌마에게 또다시 찾아온 비극, 대전 산속 전원주택에서 두 애를 돌 보는 일이었어요. 마음씨 착한 주인으로 생각하여 한시름 놓으며 죽으나 사나 여기에서 몇 년 하려고 작심하였어요. 그런데 하느님 맙소사, 그때 겁쟁이 아줌마에게 또 다른 공포가 찾아올 줄이야.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주방에서 나기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이상하지, 먼 소리가 자꾸나는 걸까? 야밤삼경 조용한 집……알고 보니 주인이 우울증에 약간 이상한 증세로 밤마다 주방에서 화장실에서 소리 지르는 것이었어요.
졸려도 두려워도 도망칠 수 없고, 교통도 자가용차로 30분 타야만 전철역까지 갈수 있으니 아, 어떻게 하나?…그래도 하다 보니 열심히 살다보니 그래도 마음씨 착한 주인들이 잘 대해주고 먹는 것도 팁도 잘해주니 세월 몇 년 꼴깍 보내고, 마지막 h-2 비자를 f-4로 변경시켜준 고마운 집이였지요. 두렵고 공포의 밤에는 책궤에 수많은 책들 보고 또 보며 힘든 시간 보내기도 하였어요.
그 후 두 세집 아이도우미로 살던 차, 어제 왔냐 싶었는데?…10년이 거의 되었군요. 꿈도 실현하였지요. 한국 와서 번 돈으로 남편이 시골에저 부모님이 집지어드렸고, 딸애 앞으로도 작은집 하나 사주고보니 아, 다소 쉬며 하려고 했는데 마침 오십견이 와서 더는 애 들보기 힘들어 남편한테 이젠 집에 가려고 한다고 하니 치매 시어머니 돌보며 고생하던 남편도 너무 좋아 하였어요. 팔 아프다니 그동안 못 해준 거 하루 네끼 해준다며 통쾌히 웃던 그이, 그런데 그것조차 운명의 희롱이고 할까, 그것이 30년 부부 마지막 대화로 될 줄이야. 남편이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떴어요.
아흔다섯 고령의 시어머니와 결혼을 앞둔 딸, 2년 동안 시어머니 봉양비용에 딸애가 아프다고 보니 그동안 번 돈 10만 원도 금방 다 날아갔어요. 앞이 캄캄하고 숨 쉬고 살아갈 수 없었어요. 우울하게 층집에서 밥도 하지 않고 큰길로 봄이 되니 다리 절른 사람 늙은 사람 운동한다며 오가는 모습을 볼 때, 저런 병들고 늙은이들은 왜 안 데려가고 펄펄 뛰어다니던 내 식구 데려갔나, 하며 하느님한테 욕하며 매일 우울하게 지내다가 옆에 지인 소개로 마음 달래 려구 절에서 쓰는 금돈 종이배 접는 걸 시작하였어요.
한국에서 한 달에 2백30만원 받다가 하루 중국 돈으로 15위안 벌이를 하며 시간 보내면서 잡생각을 떨쳤어요. 그래도 마음은 공허하고 슬프고 억울하고 미칠 것만 같았어요. 그러다 다시 한국에 나와 옥탑방에서 두 달 누워 있으며 전에도 좀씩 그리던 그림을 그리려고 다시 연필 잡았어요.
그래, 그림이 참 나에게는 안정제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마약 같았어요. 그런데 우울한 기분에 그리는 괴상한 그림을 보였더니 딸애에게 야단맞고 모두 반대를 하였지요.
왜서 전부 이따위 그림만 그려요? 하며,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공포그림을 그리다 지금은 좀 밝게 그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림 그리는 제 마음은 이젠 행복합니다.

2년 세월 하나 둘 스쳐지나가는 친구 인연들보다 항상 내 곁을 지켜주고 다독여 주고 성취감 안겨주는 어설픈 내 그림일지라도, 왠지 간혹 듣게 되는 찬사 한마디에 온 세상 사랑 행복 독차지한 기분입니다. 우울하던 나도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으로 탈바꿈 하였어요.
간혹 일하는 서너 곳 요양병원을 돌아다니며 아, 어디가나 간호사 간병 환자들에게 개그처럼 우울하던 침울하던 공기를 싹 다 바꾸어 주며 내가 있고 가는 곳 웃음으로 즐거움으로 다소나마 피곤하던 삶에 활력소로 살았구요, 우울한 환자분들 입에서 하느님이 준 선물이란 소리를 듣게 됐어요. 치매할머니는 "너 곱다 같이 살자, 내 딸하라"하고 자주 응석부리듯 말하구요, 일부 소리치고 손찌검하는 언니들에게 곱게 타일러주기도 하고 힘들어도 가는 곳마다 피곤한 언니들에게 어깨 잔등 맛사지 해 주며 내가 사는 동안 내가 있는 곳엔 웃음과 희망, 그리고 그림은 내가 힘들고 피곤을 푸는 유일한 충전기로 내 삶의 동반자로 간주하며 살려 합니다.
비록 경제적으로 유족하지 못해도 마음은 너무 즐겁습니다. 2년 동안 눈물이 앞을 가려 길이 보이지 않았고 내가 설자리 앉을자리 찾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겁쟁이 아줌마에서 벗어나 콧줄도 썩샌도 다 할 수 있는 그야말로 내 앞에는 포기란 없다, 하면 된다. 잘 할 수 있어, 하고 가끔 혼자 주문을 외우고 있어요. 어설픈 그림도 즐겁게 그리며 나머지 후반생 제2인생, 시어머니 딸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며 가족이 깨여졌다 슬퍼하지 말고요. 아니야 내가 가장이 되고 큰아이 작은아이 잘 돌보며 행복하게 살고지고……그림도 기회가 생기면 더 배우고 글도 배워 작은 책 그림 동반한 타향수기 책자 만들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라는 거 없어요!
끝/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