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
<멀고 가까운 옛 이야기...>
1993년 정월,내가 동경하던 황갈색의 대륙 오스트레일리아로 갔다.삼 개월 정도의 작품취재였다.무한한 대륙은 나를 주저 앉히었고,그 주술을 풀고 그 땅을 나올 땐 95년 여름이 되어 있었다.
나는 시티 근교에 아파트를 렌트하여 거주했다.내 멋대로 이동하는 습관이 든 내게 호주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밤새도록 작품을 쓰다가 새벽녘에 잠들어 정오 쯤 일어난다.빵 한 조각에 치즈를 덮어 우유로 씹어 넘기며 아침을 때운다.텅 빈 방안을 아무리 마주해도 누군가가 없다.텅 빈 방에서의 권태로움을 피해 기차를 타고 시내로 나간다.도착지 역은 언제나 서큘러 부두이다.커다란 회색 조개 껍질이 파도에 밀려와 떨어져있는 듯한 오페라 하우스와 오작교 처럼 하버에 걸려있는 하버 브릿지가 이방자의 가장 낯익은 풍경이다. 세계각국의 관광객이 뒤섞여 있는 선착장 주변을 거닐며 즉흥적으로 펼쳐지는 온갖 풍물을 눈요기 삼는다.(사진1)
서큘러 부두의 한바퀴 산책이 끝나면 다링하버로 자리를 옮긴다.다리운동을 할 겸 걸어서 간다.다링하버는 하버의 물길보다 인파의 물결로 거센 곳이다.인파속에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 밀어 놓고 여기 저기를 부유한다.강한 햇살과 피로에 지칠때 쯤 나는 다링하버내의 카페테리아에 앉아 바깥을 보며 늦은 점심을 먹는다.이태리 파이 조각이나 스파게티 혹은 슈크림 케익 두어개에 쥬스 한 병 곁들이는게 고작이지만 혼자 집에서 빵조각을 씹는것 보다는 한결 부드럽다.다링하버의 바다 저편으로 해가 내리는 걸 보면 귀가 길에 오른다(사진2).

타운홀역까지 걸어오면서 상점과 백화점도 들린다.새롭고 낯선 상품을 발견하면 한참이나 관찰한다.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나는 혼자 사는데 익숙하다.외국이나 한국 어디든 외로움을 느껴 본일은 거의 없다.울적하거나 고독이 느껴 질 때는 여행을 떠난다.근교의 즐겨찾는 여행지는 블루 마운틴이다.관광 다녀본 사람들이라면 세자매 바위가 있는 카툼바를 알 것이다.카툼바는 블루마운틴에 있는 열 두 서너개의 역 중 하나일 뿐이다.나는 그 중에 마운틴 빅토리아를 가장 좋아했다.카툼바를 가다가 몇 역을 모르고 지나쳐 내린 호젓한 산속 역이다.인적없는 마을의 외곽을 산책하다가 외딴 집의 뜰을 청소하는 금발의 백인 여자를 보았다.낙엽을 끌어 담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 이끌려 말을 건냈다.주위의 지리를 묻는 정도였는데 여자는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나는 단번에 여자가 있는 풍경의 관조에 빠졌다.스물 후반 쯤 되는 금발의 여자와 낙엽.고색창연한 주택의 뜰에 겨울이 안기고,팥빛색의 여자의 앞치마가 겨울 빛을 받아먹었다.서쪽하늘에 드리우는 황금빛이 여자의 하얀 얼굴에 연지를 찍었다.저무는 하늘을 보며 여자는 곧 해가 질 것 이라고 했다.경계의 빛 없는 외딴집 여자의 눈에는 모난 아들을 걱정하시는 어머니가 들어있었다.
황혼으로 만든 포근한 이불을 덮은 것 같은 분위기에 젖어 그만 마운틴 빅토리아를 사랑했다.시간이 나면 빅토리아로 가서 마을 주위를 산책했다.다시는 여자를 보지 못했다.여자가 나타나 주길 바라지도 않았다.내 가슴에 한편의 동화로 남길 바랬다.실지로 지루한 호주생활에 지쳐 찾아간 빅토리아는 난잡하게 칠해져 있는 영혼의 낙서들을 말끔히 지워주었다(사진3).그것은 카툼바에서 만난 소녀들처럼 천진했다(사진4).

[마운틴 빅토리아 역주변]

나는 기차여행을 자주 가졌다.시티 부근은 물론 캔버라와 멜버른, 브리즈번, 케언스, 다윈등 장거리 여행도 심심찮게 했다.밤마다 흐느끼며 울어되는 새들이 있다.흐르륵 흐르륵-하고 우는 소리가 구슬프다.못해 애절하다.나는 그 새의 울음을 들으며 밤마다 어디를 가지 못해 안달나 했다.그리고 여행을 훌쩍 떠나 버릴 핑계를 찾아 궁리했고,울적하다는 꼬투리와 외롭고 권태롭다는 이유를 내세워 무조건 기차를 탔다.그중에 잦은 발길을 향했던 곳은 캔버라와 멜버른이었다.기차로 다섯시간 걸리는 캔버라는 울적함과 외로움의 도피 장소였고,열 시간이나 걸리고 이박 삼일을 요하는 멜버른은 그냥 헤메고 싶을 때 갔다.캔버라는 행정 최고수반의 공관이 있는 곳이다.인위적인 자연감을 주는 주위가 공관의 뜰처럼 아늑하다.나는 도시를 감싸고 있는 벌리그리피 호수를 거닐며 작품 구상과 심신의 안정을 취한다(사진5).

[캔버라의 벌리그리피 호수 주변]
멜버른은 좀더 긴 방황이 필요할 때 갔다.발가는 대로 야외를 걷다가 오는 것이 전부였다.끝없이 터진 벌판에 소와 양과 말떼들이 무수한 점처럼 널려있다.빵 한 봉지에다 치즈와 우유, 물 한 통을 덧붙여 가방에 넣고서 목적없는 길을 싫증날 때 까지 걷는다.길은 언제나 끝이 없고 끝을 보려면 죽을 때 까지 걸어도 안된다는 걸 나는 안다(사진6).

[멜버른의 우드랜드의 들판길]
나는 호주가 좋다.거친듯 하지만 온순한 황갈색의 대지,나는 그곳에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추억 하나를 두고 왔다.나는 언젠가 그 추억을 찾으러 갈 것이다.그러나 나는 내가 태생한 동방의 나라 대한민국을 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