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평/허인 “변형의 자유”

북극성을 간판으로 걸었다
아버지는 별을 팔고 계신다
하늘에서 농사지어 거둔 낟알들
알알이 영글어 눈부시다
익는 족족 팔려 나간다
한 뼘 빛은 천 냥이고
두 팔 빛은 만 냥인지라
잠 못 드는 사람들
북두칠성 직녀성 오리온 삼태성…
별자리 훔쳐 가건만
불러 봐도 빛만 내려 주시는 아버지
장안(長安) 우루무치 비단길
은하계 달빛 모랫길
낙타의 방울소리 젖어 드는지
밤하늘엔 별만 반짝일 뿐
별의 가게 주소는 어디
눈에 맺힌 이슬방울
바람에 빛바랜 택배런가
새벽이 오면
계명성 거느리고
가게 문 내리시는 아버지
햇빛은 별의 가게
총수이다
短評 / 허인
“변형의 자유”
‘변형의 자유’라고 적어놓고 보니 마음에 쏙 드는 글귀가 된 것 같다. 변창렬 시인을 다정하게 형이라 부를 수 있는 속칭 “변형”도 되고 또한 변화의 조짐이나 그러한 형상을 통 털어 일컬을 수 있는 변이상학 적이 이미지도 되니깐 말이다. 변창렬 시인의 자유의 무변에는 언제나 시인이 속사로 스케치하는 한 폭의 민속화, 즉 우리들이 이 세상을 오손도손 대대손손 살아가는 모습이 생동한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 된다.
‘별의 가게’는 시제가 시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연과 우주를 폭 넓게 우리들의 인생관, 자연관, 우주관을 통 털어 말 그대로 삶의 터전으로 삼고서 별을 장터에 내어놓고 값도 정하여 놓고 팔고 사려 하는 시인의 지극히 완결한 장인정신이 매우 돋보이게 하는 한수의 좋은 시임이 틀림없다고 보여 진다. 시속의 화자는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가게의 난전에 올려놓고 무더운 여름밤에 수박 팔듯이 팔고 계시는 아버지의 익숙하면서도 노련한 장사꾼 형상이다. 왜서 시인의 이러한 구상이 저처럼 스스럼없고 거침없이 가능하였던 것일까? 필자가 살펴 보건대 그것은 곧 달관의 경지에 올라선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그러한 특권으로 보여 진다. 불교에 하늘이 아무리 크고 넓으나 결국 마음보다 작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상상의 폭도 넓은 것이 이 시의 제일 큰 특징이 된다. 다 함께 조심스레 본문을 배우는 마음으로 읽어보도록 하자!
“북극성이 간판을 걸었다/아버지는 별을 팔고 계신다.”에서는 긴장하지도 조급하지도 않게 더욱이 느긋하나 군더더기 한마디 없이 직설적인 듯이 은유의 극치로 시작한 시인의 첫 스케치에서 독자들이 자연스레 머리 속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번잡한 듯이 번화한 우리들의 생활 그 자체이다. 다만 이렇게 다정다감한 모습이 실생활 우리들의 근처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지면 말랑말랑한 인정이 금방 손에 묻어날듯이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작자는 우리네 인생을 달관의 경지로 우주관에 더욱 큰 무대를 설정하였기에 신비롭고 익숙하고 또한 자연스레 독자들의 눈길을 끌어 모은 것이 가장 큰 성공의 비결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2련에서 “익는 족족 팔려 나간다”와 3련에서 “한뼘 빛은 천냥/ 두팔 빛은 만냥”이라는 구체적인 별들의 가격에서 빛을 내려주시는 어버지의 형상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그 모습이 더욱 거룩하심을 우연이 아닌 자각적으로 발견할 수가 있다. 절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마을에 부처가 있다는 말이 있다. 이렇듯 작자의 천인합일의 인문주의적 사상, 즉 휴머니즘 정신은 더욱 돋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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