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인전 속 인물들처럼 인류의 발전을 위한 족적이나 교훈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자신과 가족, 이웃에게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그것보다 가치 있는 삶이 있을까?
소설 속 순자는 우리에게 이러한 가치를 일깨워준다. 전쟁통에 고아가 되고 숙모의 집에서 식모살이와 식당일을 하다 늦은 나이에 떠넘겨지듯 시집을 갔다. 술만 먹으면 폭력을 일삼던 남편은 어느 날 술에 취해 사과 꿰짝을 옮기다 깔려 죽었으며 그때부터 어린 나기와 함께 남편의 빗을 떠안은 채 억척같이 살아간다. 검게 그을린 주름투성이에 고운 구석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순자의 삶은 애자가 말한 것처럼 덧없고 하찮아 보인다. 하지만 삶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책임감은 아들 나기와 애자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했던 나나와 소라에게 건강한 자아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준다.
소라는 순자의 끼니와 도시락이 그 시절 그녀가 기억하는 유일한 집 밥일 뿐만 아니라 노스탤지어와 뭉클함 마저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소라와 나나에게 모성의 빈 공간을 채워준, 그녀들의 성장한 몸 속 어딘가에 잠재된 순자의 사랑이 성장기 나이테가 되고 힘겨움을 이겨낼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다.
얼마 전 한부모 가정을 비하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개그프로와 개그맨이 있었다. 한부모 가정의 아이가 장난감을 자랑하자 “아버지가 양육비를 보낸 날인가 보다”라는 말과 생일날 양쪽 부모에게 받는 선물을 두고 “재테크” 라고 표현하는 등 이혼 가정의 부모와 아이들을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애자는 자살을 생각할 만큼 무너졌고 그런 애자 때문에 나나와 소라는 모성 없는 불우한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실제 그와 같은 고통들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한부모 가정 가족들은 그들의 행위를 바라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붉은 금붕어들 사이에서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검은 금붕어를 괴롭힌 나나에게 말하던 나기의 무거운 목소리가 떠오른다. “사람은 그렇게 괴물이 되어가는 거야.”그 개그맨과 개그프로의 제작자들은 단지 처지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의 아픔을 재밋거리로 삼았으며 그들의 상처를 찌르고 헤집어 고통을 주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들을 비판하면서 한부모 가정의 처지를 불우하고 가여운 이웃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나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 측은한 눈빛으로 자신을 돌보던 소라를 경멸한다.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을 때 반 아이들이 보내던 동정의 눈빛과 똑같다고, 자신들의 처지와 달라진 나나가 어색하고 부담스러우면서도 거짓친절을 베풀던 가식덩어리처럼 소라 역시 징그러운 존재라고 분노한다. 거짓친절, 그 역시 우리 사회의 누군가를 소외된 이웃으로 만들어버리는 아픔의 근원일지 모른다. 어떠한 선의라 할지라도 진심이 소거된 친절은 혐오와 모멸감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나나와 소라가 주린 배를 채우려 꾸역꾸역 먹던 쉰 떡을 애써 맛있다며 자신들의 끼니와 바꿔 먹이던 순자. 그런 순자의 마음이야 말로 진정한 친절이 아닐까? 이웃의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까지 헤아리고 지켜줌으로써 그들을 가엾고 소외된 부족이 아닌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진정한 이웃으로 인정해주는 것 말이다.
그리고 여기 작가는 또 다른 선택을 한 이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사회적 통념과 다르지만 당당하고 독립된 부족, 온전한 자아가 되어 자신의 삶을 선택한 소라와 나나, 나기이다. 소라는 독신의 삶을, 나기는 동성애를, 나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매이지 않는 미혼모가 되려 한다. 우리들의 시선에서 그들의 선택은 초라하고 무의미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편견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삶에 완전한 주인이 되고자 한다.
우리 사회는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구조와 계층으로 변해가고 있다. 다양한 선택의 목소리들이 당당히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 즉 우리의 곁에 함께 설 수 있도록 우리의 경직된 사고와 사회 제도의 변화에 모두 함께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작가는 나나의 목소리를 통해 끝없이 되뇐다.“계속해보겠습니다”
산다는 건 결국 주어진 시간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 시간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 가에 대한 무거운 질문과 함께 주인공들의 선택적 삶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 모두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며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애자의 말대로 삶이란 애써 살아보지만 어느 순간 멈춰 버리는 하찮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나는 말한다. 그 하찮음 때문에 사랑스럽고 그로 인해 어떻게든 살아가고 즐거워하며 슬퍼하기도 하고 버텨가는 거라고.
지구의 종말까지 천만년 십만 번이나 반복될 또 다른 나나들이 웃거나 울거나 화를 내거나 그리워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의기소침할 때마다 주문처럼 외워보길 바란다.
“계속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