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일복 수필]세월은 흘러도 문우의 정은 영원하리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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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일복 수필]세월은 흘러도 문우의 정은 영원하리 외1편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6.10.3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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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밥 먹고 삽니다” 수록 수필 1 류일복

[서울=동북아신문]중국동포 수필가 류일복선생이 얼마전 수필집 <한국에서 밥먹고 삽니다>를 펴냈다. 본지는 그 수필집에 수록된 수필 2편을 선택해서 실으니 많은 애독 바란다. 편집자 

고향 문우들이 크리스마스이브인 내일 찾아온다고 전해왔습니다. 국내에서도 잘 이루어지지 못하던 내 소중한 문우들과의 해후가 국외에서 이루어지다니요. 관이와 란이, 고향에서 손때 묻은 소꿉놀이 친구들은 아니어도 같은 현성 시골 동네에서 살았지요. 글쓰기가 인연이 되어 펜팔친구로부터 문학 소모임까지 16~17여 년간의 끈끈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촌 지우들, 지금도 그들은 두 번 강산이 바뀔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촌스럽습니다. 강직하고 정직하고 순직하고 우직하고……. 아직도 지금 세월에서는 가져서는 안 될 ‘직’자 돌림들을 쓰고 있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가지려고 애쓰던 ‘직’ 돌림자를 제쳐놓고 그들은 한국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의 성품으로 일하여서는 마침내는 환영받는 일꾼도, 이루려는 소망도 조금씩 치륜처럼 맞춰나가고 있었습니다.

고향 문학모임에는 매달 한두 번 꼴로 만났습니다. 가난했던 시골 말 그대로 인심이 쌀독에서 나올 때였습니다. 회비고 뭐고 관두고 오늘은 관이네 집에서 다음은 란이네 집에서, 그 다음은 봉이네 집에서 모임하면서 그 집 있는 그대로의 독실한 살림풍경을 보여주고 맛내기도 했습니다. 누룽지도 와드득 씹어 먹고 잣과 개암, 해바라기씨도 똑깍 까먹고 푹 익힌 강낭콩 볶음채와 짭짜름한 감자채를 안주로 고향 소주잔들이 댕그랑 명쾌한 울림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푸른 들 개울가에서, 혹은 시원한 선들바람 너럭바위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논두렁 머리에서, 장작이 탁탁 소리불꽃 튕기는 뜨거운 온돌마루에서 우리들이 읊은 자작시와 읽은 수필과 소설들이 사계절을 경유하며 그 얼마였던가요? 그때는 우물 안 개구리들이 지은 시와 ‘관청 구경을 못 해본 촌닭’들이 지은 산문들이었을지 몰라도 낭랑히 산울림도 불러오는 목소리에는 우리들 느낌으로는 참 낭만과 멋이 실려 있었습니다.

란이네 집에서는 귀한 친구들이 왔다고 아껴 키우던 닭 모가지를 비틀었습니다. 저녁 문학모임 뒤끝엔 술상을 벌리고 물린 뒤엔 트럼프치기도 놀고 밤늦게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여자들은 정주에, 남자들은 윗방에 미닫이를 향해 머리들을 향하고 누웠습니다. 피 끓는 젊음들이었지만 시골의 순수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도색적인 언사는 한마디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도란도란 문학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미래가 실린 이상에 대해서 끝없이 너 한마디 나 한마디 주고받다 보니 날이 훤히 개었지요.

우리가 자주 모임 가지던 청산리는 김좌진 장군이 일본군을 통쾌하게 무찌른 유서 깊은 동리로, 관이가 살던 곳이기도 합니다. 관이네 마을 앞으로는 덩치 큰 산 아래에 실뱀 같은 개울물이 돌돌 흘러가는 풍경이 있습니다. 해질녘까지 원고 의견들을 나누다가 다들 집어넣고 횃불모임을 가졌습니다.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불씨에 옥수수와 잣, 감자며 산새고기와 돼지 바비큐도 신나게 구웠지요. 술잔에 정을 담아 너 한입 나 한입 권하기도 하다가 이를 쑤시던 한 문우가 저도 모르게 흥이 도도해져 노래가 나오자 덩달아서 다른 문우의 춤이 이끌려 나옵니다. 모기와 부나비들과 좀 벌레들도 어울려 불빛에 춤을 추는 것이 보입니다. 짜장 불이 붙었습니다. 잔잔히 비가 오기 시작해도 누구나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아예 디스코에 허리가 꺾입니다. 어둠살이 내리고 횃불이 활활 타올라 취기가 도도한 얼굴들이 비칩니다. 구수한 음식 향기가 그을음 내와 뒤섞여 풍기고 개울물이 화합해 돌돌 합창하고…….

시골의 정취가 별미인 이곳, 차마 떠나기 아쉬웠지요. 신비한 정염처럼 시골 청춘들만이 누렸던 향연과 멋이 있는 곳, 마냥 잊힐 리가 없습니다. 때가 되니 하나둘 문우들이 가정을 이루었고 관이도 장가들던 날에는 우리 문우들이 쓸어가서 축하해주고 장밤을 애먹이던 일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그렇게 문우들이 각자 가족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게 되고 자연 아름다운 시골 문학풍경도 옛 기차에 태우고 추억동네로 떠났습니다. 문우들이 너도나도 시골에서부터 벌방으로, 연해도시로, 해외로 타향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모임 7인회가 5인회, 3인회로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조용히 퀴즈로 남긴 채 문을 닫아 맸습니다.

반수 이상이 한국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두 문우와 2년 전 여름부터 즐거운 연락이 닿았네요. 펜팔친구들이 카톡 친구로, 식탁의 고향 흰 술이 도수 낮은 소주로, 개울가에서 부르던 연변 노래가 노래방에서 부르는 한국발라드로, 특히나 모임 주제로 되었던 문학이 인생 타령으로 환경지배에 따라 사람의 겉모습이 색칠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변신한 듯하면서도 변신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생활로 셈평이 환히 펴졌지만 질박한 의식이 아직도 그 사람들 심장부의 핵심처럼 빛나고 있는 것에 눈물겹게 고마웠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혹독해도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살아갈 뿐임에 새삼 놀라웠습니다. 어디서든 어울릴 수밖에 없는 하나같은 의기투합, 그래서 오로지 그 투명하고 소박한 의식이 우리를 끈끈히 묶는 질긴 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촌 지우들, 설움 많은 타향살이에서 지기 같은 문우들을 만난다는 것만큼 위로가 되는 것이 없는 줄 압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아무 때 아무 날 어느 누가 거짓이든 위선이든 물든다면 우리 모임에서 찌그러진 모습으로 더는 쳐다볼 수 없는 깨끗한 거울처럼 스스로 퇴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겨울 시골에서는 나목을 자주 봅니다. 풍성하고 수액이 가득 찬 여름을 지나 한잎 두잎 마지막 잎까지 떨어뜨린 낙목한천의 모습은 앙상하고 삭막해서 추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추하든 춥든 나목의 겨울이 가장 진실처럼 보입니다. 겨울을 연습해야 또다시 시작의 봄을 맞고 여름엔 풍성한 잔치를 열고 가을엔 예찬을 하는 나무가 허위의 진가를 가리기에 인생다운 인생을 사는 참나무 같습니다.

눈부실 듯 순백의 눈이 주위를 리드할 때면 나목처럼 살아가고 백지장같이 여백이란 주어질 수조차 없는 그래서 아예 공백인 친구들 앞에서 같이 나목이 됩니다. 아무렴, 그럼요. 한국에서 해후한 소중한 내 단짝 같은 문우들이 바로 오늘도 쌀독을 박박 긁어 인심 나오는 산타크로스입니다.

 

수필2

쐐기목

  야적장의 겨울날이 틈서리로 꽉 차오르는 황소바람처럼 쌀쌀하다. 드럼통 난로에 불을 지피려고 쐐기목들을 조몰락거린다.

오랜 세월 평소 육중한 파일의 뒤치다꺼리로 한 치도 드티지 않은 쐐기목은 온전한 제 몸이 아니다. 늘 햇빛과 바람 속에서 몸을 내번지고 일해선지 금이 가로비쌔지고 모가 으끄러지고 색조차 바래 건드릴 때마다 아픈 듯 달그락거린다. 불쏘시개로도 적격임을 표방하듯 금세 불길이 일고 연기에 가려진 쐐기목들은 아련해진다. 제 몸을 던져 추워하는 이들을 혼혼해주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도 검정 티끌로 남는 쐐기목은 어쩜 직삼각형으로 민틋하게 대팻밥을 먹으면서부터 제물로 귀추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일순간 일가붙이를 떠나보내는 화장장에 마주선 것 같이 마음이 서글프다.

야적장에서 일하면서부터 쐐기목은 항상 내가 놓치지 않는 어느 일도구보다 중요한 비품으로 간수되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쐐기목은 가볍게 볼 것이 아니다. 파일과 침목사이 바특한 틈을 노리고 30~40도쯤 각도로 몸을 딱 박고 파고들면 무게가 최저 2톤이 넘는 콘크리트 파일도 감히 껄떡대지 못한다.

콘크리트 파일을 상하차 하는 지게차 기사들과 데모도인 내가 손발을 맞추는 것보다 더 중요시한 것은 눈길교환이다. 바깥쪽으로 더듬듯이 삼가며 오와 열을 맞추어 쌓아 나온 후 지게차 발로 맨 바깥 파일을 떠받친 기사의 눈짓신호탄이 신중히 허공을 가르면 나는 독립군마냥 지게차 발밑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가 적의 화구에 작탄을 투척하듯 마무리작업으로 쐐기목을 괸다.

저 육중한 놈이 쉽게 굴러 떨어질라고. 갓 입사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경쳤다. 콘크리트 파일이 서로 닿지 않게 끈을 묶어주는 작업이 진행되도록 기사가 지게차로 뜬 파일을 굴려 조금씩 틈을 내주는 중이었다. 눈썰미가 없는 나는 지레채고 나부대다가 그 틈에 손등을 짓찧고 말았다. 육중한 무게라 변을 당하면 뼈도 못 추릴 것이라는 너스레를 늘어놓았던 동료들이 이때다고 법석구니를 하는 모습에 나는 더 기가 꺾여 다친 손을 감아 잡고 정형외과로 향했다. 요행히도 타박상으로 머문 데는 파일 사이에 서로 닿지 않게 묶어 주다만 비닐 끈의 이바지가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그때 사고 이후 나는 현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쐐기목이 암팡스레 받쳐져 있는가부터 살핀다. 거무칙칙한 콘크리트 파일 밑의 제쳐둔 암팡스러움이 언제 잊고 지나가는 빈틈이 되어 대형사고가 생길지 몰라서다.

먼 길을 떠나는 트레일러 기사들도 파일을 실은 밑줄 침목에 쐐기목들을 꼭 물리고 시름 놓이지 않는지 대못까지 쾅쾅 박아 넣는다. 일단 틈이 생기면 운전 도중 시나브로 확대되고 스태빌라이저마저도 효용이 없는 외경험에 그 누구보다 아로새기고 있는 당사자들이다.

그런 틈새가 제 자리인 쐐기목은 콘크리트 파일이 굴러 떨어지지 않게 파수를 보고 야적장에서 함께 해오는 동안 내 생명안전을 든든히 지켜주는 보물이었다.

돌이켜보니 아버지도 땔나무시절 쐐기목을 사용했다. 아버지는 새 도끼자루를 만들 때마다 쇠도끼와 나무자루 짬에 뾰족한 쐐기목을 박았다. 팽이처럼 생겼지만 윗몸은 말라깽이인 굴참나무 쐐기목이 수분이 가득한 도끼자루에 파고들면서 몸집을 불리면 쇠도끼 아귀에 꽉 차고 사개가 단단히 맞물렸다. 짬이 없는 도끼는 아무리 힘껏 휘둘러도 빠지지를 않았다. 아버지는 땔나무를 찍다가 도끼자루가 헐렁해지면 즉석에서 뾰족한 쐐기목을 깎아 급한 땜질을 하기도 했다.

나의 인생에도 쐐기목 비슷한 것이 꼬라박힐 때가 있었다. 학력이 낮고 저축이 없는 내가 장인에게 감잡히면서 결혼 후에도 볼썽사나워 했다. 모진 장인에 미운털이 붙었지만 헐수할수없이 불미스런 틈새를 메우고자 돈이 되는 직장을 찾아 일한 나는 틈틈이 독학도 시작했다. 해외 근로자생활에서도 동료들은 퇴근 후 끼리끼리 주흥을 즐기러 다닐 때 학구열이 식지 않은 나는 도서관의 단골손님이었다. 점차 알차지면서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반전의 쐐기를 쳐준 장인에게 비로소 아픔이 멎고 딱지가 앉았다. 생살에 쐐기목을 받아먹으니 얼마나 아팠겠냐만 빈틈없는 든든한 부부가 되어 오래갈 수 있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뿐만 아니다. 허다한 외짝의 해외 근로자생활이 견우직녀가 되게 하고 미로처럼 아득해진 거리가 틈새로 생성했다. 별거라는 벌거벗은 꼬리표에 헐렁해진 그들의 사랑의 도끼자루가 쉽게 빠져버릴 때 사이 버성길세라 바투 들이대는 것이 일인 쐐기목을 정신 번쩍 들게 심장부에 꽂아 주리라.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쐐기목이 참고 견뎌내는 고빗길이라면 훌륭하게 사수해내지 싶다.

살다보니 내 인생은 끊임없이 틈이 생겨 쩍쩍 갈라진 곳이 한두 곳이 아니면서 골머리 썩일 때가 많은가 하면 이런 저런 틈서리를 노리고 파고들어 온 많은 것들이 고통스럽게 하고 상처가 된다. 그때마다 헐렁해지고 금이 생기기 시작한 곳에 더 깎고 다듬어진 두 아버지의 쐐기목이 갈길 헤매는 송아지 어르듯 수월수월 흔들려 맞춰 넣으면서 결국 깊이 파고들어와 사개를 단단하게 맞물려주곤 한다.

우리 주위에는 구석구석 눈여겨보면 항상 도움닫기가 되면서도 얕잡아보게 되는 하찮고 수수한 것들이 지천이다. 자기보다 천만 곱절 무거운 녀석도 주눅 들지 않고 온몸을 내던져 버텨내는 천만금같이 보배로운 쐐기목처럼 관건적인 순간에 내 손을 덜 다치게 한 비닐끈처럼 이 세상의 작은 것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리라.

▲ 류일복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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