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암 시선] 바람 (외 6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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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암 시선] 바람 (외 6수)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6.09.0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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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황해암

 [서울=동북아신문]황해암 시인의 시는 바람처럼 잔잔하다. 시맥(詩脈)은 마치 흐르고 있는 강물 위의 무늬를 보는 것 같다. 무늬에는 고요함이 일렁이고 햇빛이 일렁이고 잔잔한 사색이 일렁인다. 근심과 아픔은 강물 밑에 가라앉아 무늬를 내고 그 무늬는 다시 햇빛과 바람을 부여잡고 사랑을 노래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가슴에 와서 닿는 것 같다. 편집자 주

 

바람

바람이 흔드는 나뭇잎그림자
그림자가 흔드는 발걸음
 
서글픈 체념의 숙취인가
흔들리며 오는 시간
 
불빛이 흩날리는 길 위로
낙옆 한 장 두 장…일기장처럼
 
비틀거린다 해서 흔들리는 건 아니지
혼자라고 외로운 건 아닌 것처럼
 
홀로 가는 길이 홀로가 아니듯
같이 간다고 같은 길을 가는 것도 아님을
 
그저 바람의 끝자락에
시간의 슬픔 앞에
태연할 수 있다면
 
희망 같은 미련을 부여잡지도
욕망 같은 슬픔을 불태우지도
않을 것을
  
   
가을  
 
그림자는 바닥에
단단히 붙어있다
심장은 얼어붙은 시간 탓에
잠시 쇼크에 빠진다.
쪼아맞춘 얼음의 금형 속에
생각을 밀어 넣는다
시간은 질식해버린 공간속에
사건의 지평선을 거두고 있다
오전 3시
모든 호흡은 희망의 언저리에서
숨을 거둔다.
추억을 붙잡던
유혹은 이제 가을바람처럼
앙상하다
 
창포 숲을 지나며
갈대처럼 흔들렸다.
강변을 걸으며
물결처럼
쓸렸다.
 
바람을 맞으며
소리 없이 눈물 났다
  
   
별들의 비밀
 
어느 날 밤
별들이 수근 대는 소리를 들었다.
창문에 기대여 숨은 채 귀 기울여
얻은 정보는 기상천외 한 것.
별들이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간다는 것,
물론 해도 달도 지구도 다 갈 거라고
인간들만 남겨두고
모두 이사 가고 어둠과 인간들만 남겨둔다고
노아의 방주 따윈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이제 별들이 떠난 자리에
검은 어둠이 홍수처럼 만연할거라고
 
그럼
이제 우리는 무얼 더 노래할건가
이제 우리는 무얼 더 사랑할건가
별들마저 떠난
텅빈 곳에서…
  
 

 
창백한 달의
주름진 얼굴을 보았다.
 
오랜 세월 아름답고 티 없던
그리움의 신화 속에 머물러 있었다.
만년의 외로움을 수식하던
세상이
마침내 섬세해졌다
 
빛이었다
그늘을 관통하는
달의 표면에 반사된
햇빛
 
스스로 빛날 수 없었던
운명의 슬픈 민낯을
화장化妆했던
해빛이었다
 
이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고나서야
나를 닮았다는 걸 알았다.
나의 아름다운 강인함도
한낱 빛의 포장이었음을
 
그리고 돌아누운
나의 그늘진 과거를
아무도 볼 수 없지만
그것이
진정한 나의
민낯임을

  
 
미로
 
사랑이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한다
언제나 외로움이
사랑을 달래 주었듯이
 
심장을 흔드는 동아줄
알 수 없는 깊이로
맑은 설레임 한 동이 길어 올린다
그리고 빈 것으로 추락한다
 
질투의 화살촉이 가리키는 쪽에
언제나 에덴의 사과 한 알
누군가 한입 베여가고 남아
 
인고의 파편 사이로
외로움과 아픔은 나란히 싹트고
집착의 가시넝쿨에
질식하는 사랑도 있었다.
 
빗나간 희망의 포물선 위로
잠시 숨 고르는 선택의 탈춤
너 그리고 나 새롭게 낯설다
 
마침내 오고야 말 버스는
당신을 기다리지 않는다.
 
 
 결계结界

눈을 감으면 경계가 흐려진다.
기억의 문고리는 닳아 떨어지고
그리움은 파랗게 녹 쓴다.
눈 뜨면 시간이 멈춘다.
속 눈섭에 묻어나는 너의
모습들
휴대폰 속에
피어나는 너의 얼굴
설레는 가슴속에 깊이 묻혔던
시간의 도화선
겨울입술의 푸른 입김 속으로
병든 새벽이
노랗게 싹튼다.
 
부르다 찢어질 슬픔아
 
노래하다 흩어질 영혼아
 
울리다 깨질 종아
 
하얗게 질식한 창포의 넋아
  
 잘 있어라 길섶의 풀들아 꽃들아
기약 없는 욕망들아
그리고 미소 짓는 가식들아
……
잘 있거라 
  
   
둘이서
 
혼자 걷다보면
꽃이 보이고 풀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도 보인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송이
둘이 걷다 보면
꽃도 보이고 풀도 보이고
날아가는 새가 보인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구름 두 송이
혼자 걸으며
생각을 하고
둘이 걸어도
생각을 한다
혼자 걸을 때 그대를 생각하고
둘이 걸을 때 그대를 보며 간다
그대의 미소가 꽃이 되고
그대의 손이 풀이 되고
그대의 눈빛이 새가 되어
내 생각은 당신의 파란 하늘에
누워있는 두 송이 구름… 
   
해암. 본명 황해암 . 1970년 6월 24일 중국 길림성 서란시 태생. 서란 조선족제1중학교 고등학교졸업. 1989년 할빈 <송화강>잡지에 처녀작소설 '오월'로 등단. 그후 길림 <도라지>잡지에 수필. 시 발표. 이후 오랜 기간 문학창작을 멈추었다가 2013년 겨울부터 인터넷공간을 통해 다시 시를 발표. 2016년 7월 <동포문학상> 우수상 수상. 현재 서울 금천구 독산동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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