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류연산]영원한 선생님-김병민
상태바
[글/류연산]영원한 선생님-김병민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06.05.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저자 류연산 소설가
[서울=동북아신문]사람은 동물과 달라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가면서 생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인생의 걸음걸음 발자국마다에는 선생님의 심혈이 고여있다.

흔히 사람들은 선생이라고 하면 꼭 교단에 서서 학생을 대상으로 흑판에 분필로 글을 쓰면서 가르치는 사람을 머리에 떠올린다. 그러나 선생님의 의미는 다양하고 무한한 폭을 가지고있다. 그래서 공자는 셋이 가면 그속에 스승이 있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림자와 같은 존재이며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해석이다.

인생의 경우에 따라서 교실에서 모신 선생님이 가장 영향력을 가질수도 있고 강의는 받지 못했어도 일상생활에서 가르침을 해주신 선생님이 강한 인상으로 마음에 남을수도 있다.
나의 경우는 두번째에 속한다. 대학공부를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나로 하여금 배움의 길에서 걷고 달리고 날수 있도록 가르치신 선생님이 계신다. 바로 김병민선생님이시다.  
내가 김병민선생님을 처음 만난것은 1978년 10월의 어느날이였다. 연변대학 조선어문학학부의 입학통지서를 받고 학생기숙사에 이불짐을 풀던 때였다. 젊고 발랄한 분이 기숙사마다 다니면서 우리 신입생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인사를 했다.

《김병민입니다. 반주임을 맡았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문화대혁명이후 처음으로 전국 통일시험을 통해서 입학한 학생들이므로 우리 반의 학생들중 절반이상이 김병민선생님보다 이상이거나 그 나이또래였으므로 선생님은 처음부터 학생들하고 경어를 썼다.  

김병민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 다른 한 인물인 량고범선배가 떠올랐다.
《대학에 가면 김병민선생님을 찾아보아라. 아주 좋은분이시다.》
내가 서성을 떠나 연길로 가게 되자 량고범선배가 나한테 당부한 말이였다.  
량고범은 서성중학교 나의 선배이고 나의 문학계몽선생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서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다. 그해 봄에 김병민선생님이 대학졸업을 앞두고 실습으로 서성중학교에 갔었고 량고범선배하고 지기로 사귀게 되였던것이다. 량고범선배는 현재 길림신문사 기자이다.  

그러한 인연때문에 김병민선생님하고의 첫만남은 나한테는 구면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량고범선배의 말을 꺼내자 선생님은 마치도 고향사람을 만난것처럼 반가와했다.
지금도 영원한 추억으로 내 기억에 살아있는것은 처음으로 김병민선생님의 초대를 받아 돼지고기를 넣어서 끓인 된장국에 밥을 먹던 일이다.

우리가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안되여서 학교에서는 파식(罷食)을 했다. 상급학년 선배들이 주동이 되여서 학교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는 운동을 했다. 끼마다 먹는 옥수수떡에 질려서 화식을 개선해달라는 요구였다. 이틀인가 사흘인가 학생 대표들이 식당문을 지키면서 밥 먹으러 가는 학생들을 되돌려 보냈다. 시내에 나가서 사먹는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처럼 시골에서 온 학생들은 주머니사정이 각박해서 몇끼는 얻어먹었지만 계속 그러할수도 없어서 한두끼씩 밥을 굶고있을 때였다.  

그런때 김병민선생님은 나를 불렀다. 선생님이 들어있는 교직원 기숙사는 우리들 학생기숙사 서쪽에 나란히 있었다. 독신이였던 선생님께서는 손수 된장국을 끓여서 이밥을 챙겨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희한할것도 없는 음식이였다. 집에서는 늘 먹던 음식이였지만 그때 선생님의 된장국과 이밥은 세상 별미였다. 아마 지금 선생님이 된장국을 끓여준다면 맛이 그때와 같지 않을것이다. 사람의 입이 요사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어려울 때, 배고픈 설음에 마음이 울고있을 때였기때문이다. 성구로 표현한다면 설중송탄(雪中送

炭)이였다.

그후 선생님은 때때로 기숙사에 나를 불러서 밥을 먹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돈만 있으면 쌀이며 고기며를 살수 있는게 아니였다. 제한된 량의 배급에 목을 걸어야 했었는데 특히 입쌀은 한달에 겨우 몇근밖에 안되였다. 그리고 다른 부식이 거의 없었으므로 밥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그러므로 한달에 며칠만 이밥을 먹으면 그 다음부터는 밀가루와 옥수수 반반으로 때워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선생님의 이밥을 배가 부르도록 축냈던 내가 철이 없었음을 통감하지 않을수 없다.

그런데 한학기가 지나고 그 다음학기에 선생님은 광주 중산대학으로 공부를 떠

났고 2년후 학교로 돌아왔지만 우리의 반주임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인민출판사에 배치되여서 얼마 안되여 선생님은 조선 김일성종합대학으로 류학을 떠났다. 그런데 어느날 선생님한테서 나한테로 년하장을 보내왔다. 왕지환의 시 《관작루에 올라서서》였다.

      저녁해 산넘어 잠자러 가고
      황하는 아득한 바다로 숨어
      눈뿌리 아프도록 천리허 보려니
      한다락 더 높이 올라서야 하리
      (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이 시구는 그때부터 나의 좌우명으로 되였고 나를 분발하도록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었다. 그것은 한낱 젊은 시절에 배움에 게을리하지 말라는 충고의 메시지였다. 배우지 않으면 게와 구럭을 다 잃듯이 과거도 미래도 동시에 잃게 된다는 도리를 깨우쳐주었다. 사람이 배우지 않는다면 로신이 표현한것처럼 스스로 자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하늘로 날려고 하는 어리석음과 같은것이다.

1987년 말 나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조선에서 준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다시 교편을 잡고있었다. 나는 공부를 하고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로부터 두달도 안되여 광주 중산대학에서 연수생으로 와서 공부를 하라는 통지서가 출판사로 왔다. 선생님께서 중산대학 중문학부로 편지를 하여 나를 받도록 주선해준 덕분이였다.
1988년 상반년 나는 꼭 한학기를 중산대학에서 보냈다. 금방 개혁의 물결을 타고 광주가 탈바꿈을 시도하던 때에 심수며 해남도며를 돌아보면서 시야를 넓히기도 했고 도서관에서 연변에서는 볼수 없었던 이른바 《금서》들을 읽으면서 머리를 틔웠다. 비록 반년밖에 있지 않았지만 중산대학에서의 연수는 나의 인생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던것이다. 나는 분명 구름을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보았고 높은 산에 올라 사방 바다를 굽어보는듯 시야가 넓어졌다.  

그때로부터 나는 푸른 바다 끝없는 지평선넘어 아득한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파아란 생명이 약동치는 소리를 들었고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가슴을 채웠다.
드디여 나는 1990년에 한국행에 올랐다. 그때부터 한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졌고 《서울신문》에 3년남짓 르포를 련재하게 되였다. 그것을 알고 김병민선생님은
《선택을 잘했소. 연산이는 소설보다 실화쪽으로 발전하는것이 좋을것이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같이 생명력이 있는 글을 기대하겠소.》
라고 고무하여주었다.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나의 창작에서 가장 훌륭한 선택을 할수 있도록 하여주었다. 드디여 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서 가치를 찾던데로부터 해야만 하는 일에서 인생의 비결을 찾게 되였다. 나는 그전에 소설창작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였었다. 그러나 그후부터는 다른 문학쟝르에 곁눈 한번 팔지 않고 실화문학을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인생의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게으름없이 꾸준히 노력했다.        
1998년 한국에서의 련재를 마치고 《혈연의 강들》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내려고 하면서 김병민선생님한테 서문을 부탁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축하하오. 잘 썼구만. 예술적으로는 미흡한점이 적지 않지만 사실적인 기록을 남겼다는것 자체로만 해도 책의 무게가 돋보이는 글이요. 이것에 만족하지 말고 더 좋은 글을 써주오.》
라고 격려했고 손수 서문을 써주었다.

나는 때때로 그 서문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되며 또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는 작가로 되려고 마음을 다지게 된다.
선생님은 제자의 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또 자신의 모든것을 바쳐 제자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여주었다.

2000년 여름이였다. 한국에서 문학평론가 임헌영선생님께서 오셨을 때 나는 김병민선생님과 함께 우리 집에 모셨다. 그때 식사를 하면서 김병민선생님은
《류자명이라고 위대한 분이 있소. 그분에 대한 자료를 제공할테니 평전을 써보오. 원래 내가 쓰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만한 시간을 낼수가 없구만. 》
라고 하였다.

원래 김병민선생님께서는 신채호를 연구하다보니 자연히 신채호선생한테 무정부주의사상영향을 주었던 류자명을 알게 되였었다. 그리하여 1985년에 류자명선생이 호남농학원에 계신다는것을 알고 편지를 했는데 이미 사망했다는 회답과 함께 그 자손들의 련락처를 알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는 류자명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했고 짬짬의 시간을 리용하여 평전에 대한 저술을 하였다. 그런데 부교장으로 되면서 도저히 시간을 낼수가 없게 되였던것이다.
선생님께서는 15년동안 모은 자료와 7만여자에 달하는 원고를 통째로 나한테 주었다. 나는 글을 쓰는족족 메일로 선생님한테 보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자세히 읽어보고 수개의견을 주었다. 그렇게 창작한것이 지난해 출판된 《불멸의 지사 류자명평전》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선생님과의 합작품이였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절대 이름을 같이 박는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고 정 그러면 감수자로 되겠다고 했다. 그것은 제자에 대해  《추호의 바람이 없이 무조건 준다》는 선생님의 고집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벌써 선생님을 알게 된지가 27년이 된다. 대학교문에 들어서서부터 지금까지 나의 성장과정에 김병민선생님의 가르침과 사랑은 멈춘적이 없었다. 어떤 때는 가슴 따끔한 비평도 서슴치 않았다. 읽지 않아 떫은 맛이 나는 과일을 소중히 가꾸어 꿀맛이 나도록 잘 영글게 하려는 마음인줄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비평이 칭찬보다 몇갑절 귀중하다고 하는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학문과 인격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 두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한분은 신채호선생이다. 물론 신채호선생이 사망한지도 수십년 이후에 그의 작품을 통해 만났을뿐이다. 그것도 평양인민대학습당에서의 유작을 매개로 한 상봉이였다. 조선에서 준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선생님은 신채호의 《룡과 룡의 대격전》 등 유작들을 《아리랑》편집부에 투고하였다. 또박또박 만년필로 쓴것이였다.

선생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준박사공부를 하면서 졸업론문을 《조선근대소설의 력사적고찰》로 잡았으므로 신채호선생을 절대 비켜갈수가 없었다. 리동원(李東源)지도교수는 평양인민대학습당에 신채호의 유작이 소장되여있다고 하면서 준박사론문을 마치면 신채호문학연구를 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리하여 선생님은 인민대학습당에 다니면서 그 유작들을 베끼기 시작했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손가락수술을 받으면서 베꼈다고 한다. 지금처럼 복사기가 있을 때도 아니였으므로 손가락에 썩살이 박이도록 베끼고 베낀 유작을 연구하여 쓴것이 《신채호문학연구》였다.    신채호는 오래전에 이 세상을 떠났지만 신채호의 글을 통해 신채호는 불멸의 실재임을 확인하였고 그 불멸의 실재를 통하여 김병민선생은 신채호의 불멸의 사상을 보았다. 그 사상은 영원한것이였다. 자칫했더면 유작속에 잠겨 잊혀질번했던 신채호선생의 뛰여난 예술과 훌륭한 사상들이 김병민선생의 연구를 통해 드디여 깨여난것이였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과정에 신채호의 강렬한 민족애, 불의와는 추호도 타협을 할줄 모르는 강인함, 자유분방한 투쟁정신, 지식에 대한 창조적인 탐구정신은 그대로 김병민선생의 인격을 부각시킨 동력이 되였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다른 한분은 정판룡교수이다. 정판룡교수는 김병민선생한테 박사도사로서 학문을 가르친분인 동시에 부형과도 같은 존재였다. 교육자로서의 정판룡선생에게 남다른 비결이 있다면 학생을 존중하는것일것이다.
그러한 정판룡선생님의 모든것을 포용하는 넓은 가슴과 하늘이 무너져도 대수로와하지 않는 소탈함과 어려운 학문을 아주 쉽게 가르치는 교육자의 탁월함과 모든것을 받아들이는 유연함과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도 너그럽게 품어주는 아량을 나는 김병민선생님의 일거일동에서 느끼게 된다.

신채호와 정판룡 이 두분은 선생님의 삶에 영원한 영향을 준 분일것이다. 《깨끗하게, 바르게, 평범하게 살자》라는 김병민선생님의 신조 역시 이 두분 도사의 인생거울에 비친 반사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줄 안다.  
그리고 신채호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중세의 북학파 학자들의 작품연구를 통해 자기의 독특한 학문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인생의 학문은 정판룡교수의 인간을 읽고 더욱 깊이 터득했을것이고 또한 주위의 모든분들의 여러가지 류형과의 접촉을 통해서 얻어가고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선생님은 학술에서는 준박사, 박사로, 교단에서는 강사, 부교수, 교수, 박사도사로, 직책으로는 조선어문학부 학부장, 연변대학 교무처장, 부교장, 교장으로, 정치마당에서는 길림성 인민대표대회 대표, 전국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삶을 엮어왔다. 연변대학의 최정상에 오른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전히 27년전 내가 처음 만났던 그 시절의 순수한 모습 그대로이다.  말하자면 연변대학에서 최하에 있을 때의 평범한 교원일뿐이다.  

연변대학은 우리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며 연변대학 교장이면 우리 민족 최고학부의 대표자이다. 그리고 인재는 국가에 리로운 그릇이요, 학교는 그 인재의 그릇을 만드는 도가니라고 한 누군가의 표현을 빌린다면 연변대학은 우리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는 도가니이며 김병민선생님은 그 도가니에 불을 지피는 도공에 비할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선생님의 성뒤에 학명이나 직명을 붙여서 불러보지 못했다. 뭔가 멀어지는것 같은 서운한감이 앞서기때문이다.

김병민선생님은 나한테 부형과도 같고 사우(師友)와도 같은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