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선은 술잔을 나누는 상대가 누구인가를 고려한다. 평소 생활이 검박한 탓이라 할까. 나는 친구들과 술을 마셔도 조용한 작은 음식점을 택하길 좋아한다. 안주는 가리지 않는다. 때론 ‘건두부볶음’ 한 접시나 두부 한모를 놓아도 술맛이 좋기만 하다. 술도 비싼 병술 대신 한근에 몇원(위안)씩 하는 근들이를 더 좋아한다. 다 먹지도 못할 채소를 잔뜩 시켜놓고 체면을 지키려 하는 자체가 싫다. 한 접시도 좋고 두 접시도 좋고 남기지 않고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면 된다. 그래서인지 건두부에 파 몇 대를 두고, 혹은 양념을 끼얹은 두부 한모를 마주하고 재미있게 술잔을 나누는 친구가 좋고, 포장마차에 앉아 꼬치 몇개로 담소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가 좋다.
술은 기분을 즐겁게 하기에 술을 마시면 얼마쯤 취하는 친구가 좋다. 남 다 취하는데 혼자 말짱한 사람은 싫다. 주량이 적은 나는 술만 마시면 곧잘 취한다. 그래서 실없는 소리를 할 때도 많고 실수할 때도 많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와 함께 같이 취할 수 있는 술친구를 더욱 좋아한다. 같이 취하고 같이 허튼소리를 하고 같이 실수를 하는 친구가 더 허물이 없으니 말이다. 이런 친구는 언제 가도 술상에서 한 소리를 나르지 않고 내 실수를 흉 보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같이 술을 마시고는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친구의 흉을 보고 친구의 흠집을 동네방네에 나르는데 나는 이런 사람들이 질색이다. 술잔만 잡으면 제 자랑에 취해있는 인간들도 싫다.
비오는 날이나 눈내리는 날에 부담없이 불러내 술 한 잔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좋고 갑갑한 마음을 열어보이면 악의 없는 충고를 주는 친구가 좋다. 술상을 마주하고도 도사같이 말 한마디 없는 친구보다는 이런저런 화제로 술상분위기를 끌고가는 친구가 좋다. 즐겨야 할 술상에서도 엄숙하고 무게 있는 화제만 꺼내고 남달리 박식한 척하며 점잔을 빼는 그런 친구보다는 반말도 하고 아래위를 가리지않고 술도 한잔씩 부을 줄 아는 그런 친구가 좋다. 술상에서마저 직장이야기, 사업이야기를 하는 친구들보다는 사소한 가정생활이야기나 신변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그런 친구가 좋다. 항상 바른 소리만 하는 친구들보다는 어느 정도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대포'를 쏘는 그런 친구들이 좋다. 한때는 사냥을 잘해 동산의 노루를 자기가 다 잡고 서산의 노루만 남겨놨다고 흰소리 치며 분위기 올리는 친구가 좋다.
울분에 쌓인 마음을 털어놓으며 하는 하소연을 귀찮아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고 괜한 흥분에도 적절하게 맞장구쳐 주며 같이 술잔을 마주치는 그런 친구가 좋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술 한 잔 사주며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하는 그런 친구가 좋다. 때론 언성을 높이며 격렬한 쟁론을 벌리다가도 언제 그랬냐 싶게 여전히 따뜻한 그런 친구가 좋다.
술잔만 들면 건배를 외치는 친구보다는 한모금씩 마시며 술맛을 음미하는 그런 친구가 좋다. 그래서 나는 공식적인 술장소를 제일 꺼린다. 술이라면 즐거움을 위해 마시고 싶다. 한 잔도 좋고, 두 잔도 좋고, 술잔을 잡는 그 자체로 삶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가 커서 상대를 초라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보다는 비록 잘 어울리지 않아도 허물없이 농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좋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비위맞추며 사는 게 버거워 내 속내를 편히 털어놓을 수 있는 술친구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겠다.
술상에서마저 권력행세를 하는 이들보다는 너나없이 동등한 지위로 구애 없는 친구가 좋다.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사람보다는 마시지 못하는 술이지만 반갑게 받아주고 마시는 흉내라도 하는 그런 사람이 좋다. 술 한 모금을 넘겨도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보다는 쓴 술도 달콤하게 마셔주는 그런 사람이 좋다. 친구들과의 술상에서 다른 커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이성친구가 좋고 나를 왕자로 만들어주는 이성친구는 더욱 좋다.
특별한 목적이 없이 단순한 우정으로 술잔을 나누자며 불러주는 그런 친구가 좋다. 사는 것이 힘들어 술 한 잔 생각날 때 곁에서 빈잔 채워줄 수 있는 그대라면 함께 있어 행복한 술친구요, 진눈깨비 내리는 날에 술한잔 나누자 전화할 때 이유를 묻지 않고 선뜻 응해주는 그대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술친구다.
험한 세상에 굽이마다 지쳐가는 삶이지만 술 한 잔의 여유 속에 서러움을 나누어 마실 수 있는 친구가 있다. 인간은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술상에서 항상 상대방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그런 친구가 좋다. 세대차이가 있고 지위가 달라도 그만큼의 높이로 상대방을 대해주며 술잔을 권하는 술친구도 좋고, 경제조건이 다르고 사는 환경이 달라도 서로가 함께 기꺼이 술잔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술친구가 좋다.
나 자신이 보잘것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경제능력의 한계를 직시하고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속에서 일을 처리하며 자기분수에 맞지 않거나 능력 한계를 벗어난 술상은 극력 피한다. 나보다 너무 큰 이들과 한상에 앉으면 주눅이 들까 두렵고 화려한 술자리는 너무나 부담스럽다. 그래서 나는 경제적, 정신적 부담이 없는 그런 술상으로 불러주는 친구들이 좋다.
"친구야 술 한 잔 하자. 우리들의 주머니 형편대로 포장마차면 어떻고 시장 좌판이면 어떠냐. 마주보며 높이든 술잔만으로도 족한 걸. 목청 돋구며 얼굴 벌겋게 쏟아내는 동서고금의 진리부터 솔깃하며 은근하게 내려놓는 음담패설까지도 한잔 술에겐 좋은 안주인걸."
너무나 마음에 들어 노트에 적어두었던 누군가의 글이다.
어느 덧 퇴근시간도 다가오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핸드폰이 울린다. 친구가 전해오는 어딘가를 찾아 찌개에 소주 한잔 나누자는 전갈이다. 나는 반갑게 응한다.
김춘식 수필가 (jinchunzhi2008@hotmail.com)
어쩌다 빠지면 또 허전해요 내가 겉돈다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