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조선족유학생네트워크 회장
서강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김용선
신문사에서 외국유학생 체험수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그건 내가 재중동포로서 이러한 자격(?)이 있는지가 스스로 의심스러
그럼 먼저 자기소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재중동포3세인 나는 중국 연변의 용정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나의 유년시기와 청소년시기를 보냈다. 물론 민족자치지방인 만큼 고등학교까지 줄곧 민족학교를 다녔고 대학도 우리 민족의 학교-연변대학을 다녔다. 거기서 처음으로 계통적으로 우리 역사를 접촉하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점차 고국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침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학교의 추천으로 나의 오래된 염원을 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오게 된 것이 바로 서강대학교이다.
내가 처음으로 서강대에 온 날은 정확히 2004년 9월 7일인데 그날 공교롭게도 비가 억수로 내렸었다. 입학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나로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근데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학과 교수님들과 대학원생들은 아주 열정적으로 맞아주셨고 기꺼이 나의 가이드를 해주셨다. 오기전의 근심과 걱정은 난데없이 사라지게 되었고 마치 집에 온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서강대 생활은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지만 많은 분들의 관심과 배려가 있음으로 하여 충실하고 활기를 가지게 되었다.
유학생이라 하면 일단 가장 어려운 것이 언어와 음식인데 나는 당연히 이런 면에서는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태어나서 여태까지 줄곧 써왔던 언어이고 먹어 왔던 음식들이니까. 그리고 유학생인 만큼 경제면에서도 보통 어려움을 겪지만 전액장학금과 재외동포재단의 장학금을 받는 나는 또 그 예외가 되었다. 비록 넉넉하지는 않지만 내가 돈 벌러 한국에 온 것도 아니고 또 다른 많은 중국유학생들과 비하면 너무나 좋은 기회를 가진 것이다. 재외동포재단 이광규 이사장님께서 장학금 전달식에서 한 말씀 기억난다. 학생이 돈을 많이 가지고 쓰게 되면 공부가 잘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복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연변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재외동포재단 그리고 나를 여태껏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많은 고마운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나는 행운아였고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나에게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아마 학습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든 것이리라. 수업 방식, 리포트 제출, 사생관계, 그리고 가장 중요한-영어 등에서 많은 차이점과 당혹감을 느끼게 되었다. 여태껏 민족학교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지만 논문이라 말할 수 있는 글들은 전부다 중국어로 썼었고 배운 외국어도 일본어였지 영어가 아니었다. 한글로 글 쓰는 것도 이번이 10년 만에 처음인 것 같다. 중국조선족은 여태까지 대부분 외국어로 일본어만 배워왔다. 동아시아에서 살면서 한국어, 중국어 그리고 일본어, 이렇게 세 가지 언어를 알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입시위주의 교육체제에서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어가 일상생활이 된 한국에서, 또 영어를 특별히 중요시하는 서강대에서 나와 같이 영어를 잘 모르는 유학생은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물론 이 기회에 영어까지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도 없지 않지만 현재는 너무 어려운 것 같다.
나는 한국의 캠퍼스 문화가 맘에 든다. 내가 다니던 연변대학도 캠퍼스 문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처럼 그렇게 활성화 되지는 못한 듯싶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와 주인공 의식, 그리고 열정, 다채로운 동아리모임들 많은 것이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고 그 속에 푹 빠지고 싶은 충동을 가지게 될 때도 적지 않다. 그리고 학교에서 무료로 누릴 수 있는 많은 시설들과 복지, 발달된 수업시스템과 도서관도 맘에 든다. 어찌 보면 여기는 학생들이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잘 마련된 것 같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서강대에 대해서 너무도 몰랐었다. 그냥 한국에 다녀오신 선생님들과 선배님들로부터 약간의 정보를 입수했을 뿐이었는데 와보니 내가 선택을 잘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부하는데 어려운 것이 없지 않지만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또 힘들게 선택한 길인데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듯싶다.
전공이 한국사인 나는 필수인 것도 있겠지만 답사 다니기를 무척 좋아한다. 하여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지만 답사를 이미 열 번도 넘게 다녀왔다. 물론 그 첫 번째 코스로 나의 조상들이 살았던 강릉을 선택했는데 잘 관리되어 있는 명주군 왕릉을 보고 놀랍기도 하고 자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핏줄이구나 하는 감명도 받았지만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또 현재 흩어져 있으면서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우리 민족도 생각하면서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언제쯤 한반도가 통일 되고 자유왕래가 현실이 된다면 단 한번 만이라도 부산에서 연변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려는 생각도 가져봤다. 답사 다니면서 느낀바 가 있는데 한국 전체가 박물관과 같다는 것이다. 역사를 배우는 사람으로서는 크나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규모나 양이 중국의 것과 비하면 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더욱 친숙하게 느껴지고 눈길이 더 간다. 경제적으로 조금 어려움이 있어 무리가 있기도 하고 또 한국에 머무를 시간도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떠날 때까지 될수록 고국의 방방곡곡을 밟아 보려는 것이 나의 욕심이기도 하다.
그럼 아래에 좀 무거운 얘기지만 중국조선족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중국조선족사회는 지정학적으로 남한과 북한과 다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특히 북한과 밀착되어 있다는 점은 한민족의 민족적 단합과 국가의 통일에도 역동적인 기능을 갖게 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조선족사회는 북한과 친인척관계가 아주 많으며 또 중국조선족사회는 사회주의적 문화와 자본주의적 문화에 다 익숙하여 남한과 북한을 제한적이나마 다 방문할 수 있는 여건을 갖고 있기에 한반도의 통일과정에서 문화전환계통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중국조선족 사회의 문화의 복합성에는 한반도문화와 중국문화가 결합되어 있고 문화권이 사회주의의 문화와 자본주의 문화에 다 비교적 익숙했기에 남북의 교류에서 중개적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지금 한반도의 남과 북이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거나 통일을 맞이하게 될 경우에 중국조선족은 또 다시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에서 새로운 기회와 도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또 경제면에서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조선족은 양국의 교량작용을 해오면서 한국 기업의 중국 진출에 많은 편리를 제공하였다. 중국조선족 사회의 존재로 하여 한국은 일본보다도 월등히 좋은 대중국 진출의 여건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중국조선족사회는 중한 두 나라의 문화교류에서 주요한 문화전환의 기능을 수행하여왔으며 또 앞으로도 수행할 것이다. 몇 년 전 중국에서 한류의 열풍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한국드라마 『사랑이 뭐길렌를 중국어로 번역한 이들도 중국조선족 번역가들이었음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한국학을 개설한 중국의 30여개 대학에서도 많은 조선족 교수님들이 활약하고 있다. 한국을 홍보하고 한중간의 문화교류에서 빠뜨릴 수 없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태여 나고 한국에 와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고 또 북한에도 다녀 온 적이 있는 나는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한반도와 중국 간의 우의가 있어야만 우리가 설 자리가 있고 또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 있는 조선족은 20만 명이 되고 그 중에서 유학 중인 조선족 학생도 4000명 정도 된다. 조선족은 인제는 한국에서 단지 골칫거리뿐이 아니다. 실제로 여러 가지 영향을 끼치고 한국의 물질문명 창출과 동북아평화, 한중 우호관계에 있어서의 홀시할 수 없는 역량이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여러 대학의 대학원생들로 조직된 저희 재한조선족유학생네트워크도 조선족 이미지를 향상하고 한중 청년들 사이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학술세미나, 친목 활동 및 지역주민 및 동포들을 위한 여러 가지 자원봉사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동포 유학생으로서 학업과 민족을 위한 다방면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여 주리라 결심하면서 이 글을 마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