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21일, 한국문인협회의 초청으로 우리 연변작가협회 일행 4명은 리혜선을 단장으로 연길공항에서 탑승하였다.
비행기가 만오천메터 푸른 상공에서 은익을 반짝이며 인천공항을 향해 비상을 펼칠 때 우리 작가들의 가슴은 격동으로 설레였고 이제 곧 딛게 될 고국땅에 대한 신비와 황홀에 젖고있었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생활기는 그날 저녁부터 시작된셈이다.
서울 인사동
인사동, 귀에 익은 이름이여서 가슴 설레였다. 네온싸인같은 항주의 밤거리나 숨막히게 붐비는 상해의 남경로와는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였다. 인천공항에 착륙하자 곧바로 서울 인사동으로 안내받아 고풍이 창연한 국밥집에서 참꽃술만찬초대를 받으며 증조 태조 할아버지시대까지 감구지회가 치달아올랐었다. 너무나 인상적인 곳이기에 겨우 하루가 지난 오늘밤 또다시 인사동을 찾았다.
대륙의 눈덮힌 11월과는 달리 서울의 11월은 빨갛게 노오랗게 단풍이 한창 극치를 이루고있었다. 그래서인지 인사동의 밤은 신비하고 그윽했다.
서울의 밤은 아홉시부터 끓고 밤 11시반은 즉흥과 감격이 고조에 오른다고 한다. 인사동 골목에 접어드니 감각 시각 청각 후각 지어 미각까지 최대로 동원되는 느낌이 들었다. 골목거리는 길지도 넓지도 않았지만 미궁처럼 안겨왔다. 서로의 허리를 감은 련인들, 쵸콜레트를 빨고있는 아이들, 그속에 게사니처럼 끼인 파란 눈, 금발머리의 외국인들로 골목을 꽉 메우건만 그렇듯 조용하고 깨끗한 느낌인것은 이상했다. 찬찬히 눈여겨 살펴보면 찬란한 불빛이 아님에도 거리는 대낮같이 밝고 서툴게 깔린 돌길은 돌마다 참기름을 바른듯 다슬어 빛을 내고있었으며 수천년의 력사속에 새겨진 각자와 각화는 서기를 말아올리고있었다.
하늘을 찌를듯 솟은 서울의 빌딩무리들속에 박인 농가를 방불케하는 음식점들이 그렇듯 발길을 끌줄 또한 몰랐다. 들어가보면 촌아낙들의 숭늉같이 구수한 토박이대접이 얼마나 마음을 잡던지. 순대집, 송편집, 비빔밥집, 랭면집, 굴비구이집, 부추삼겹살집, 생회집… 혀가 찡 저려나서 못견딜지경인데 그런속에 굳이 내 발길을 잡는것이 있거늘 그것은 다름아닌 《국화향·가을의 대행진》이란 주제의 공연을 하는 학생들이였다.
내가 아마 고중에서 교편을 잡고있어 그런가보다.
그들의 앞가슴에 단 빠찌에는 서울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이라고 씌여있었다. 일곱명으로 무었는데 기타, 장고 같은 악기를 다루며 노래와 춤, 시읊기를 보여주고있었다. 구경군들은 별로 끝까지 보아준다거나 관람비용 같은걸 건네는 그런 기미도 없었지만 그들은 열심히 반주하며 재간껏 표현하고있어 나는 저으기 감화받았다. 내가 그중의 한 녀학생의 손에 돈을 찔렀더니 얼굴이 확 꽃피는것이였다.
《이건 중국돈- 아유, 중국 연변에서 오신가봐요… 감사해요, 열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듯이 인사하는 동안 난 몇마디 묻지 않고는 배길것 같지 못했다. 자기네는 고등학교 2학년생들인데 저녁마다 이렇게 두시간좌우로 공연을 한단다. 추우나 더우나 눈내리나 비가 오나 꾸준히 변함없이 관중들의 심금을 잡기에 노력한단다. 가끔 수입도 더러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의 건강을 위한 민족적자아수양을 쌓고 건강한 정신을 기르는데 그 목적을 두고있다고 말하는것이였다. 그리고 서울뿐아니라 부산, 광주, 대구 등 수많은 도시들의 학생들도 이런식으로 청년심리건강을 기른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준 백원돈이 천원값을 했다는 느낌을 가질수 있게 되였다. 옹근 낮을 교실에서 공부하고도 한밤중까지 교과서 내용과 자료무더기로 담을 치는 봉페식교육과 그 울타리속에서 종속되여있는 전수자들이 우울하게 느껴지며 심한 자책감까지 들었다.
《국화향·가을의 대행진》은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자리를 뜰줄 몰라하는 나에게 그예 씩씩한 절주감과 희망찬 선률을 전해왔다. 은실은실 달빛이 흘러내리고 희븐희븐 잎들이 계절을 손짓하는 인사동에서 나는 드디여 새삼스런 꿈으로 힘을 얻고있었다.
우거지탕 한그릇
그날 아침식사는 우리 자체로 하게 되여있었다.
우리는 호텔부근의 도토리커피숍곁에서 손젓는 간이음식점을 찾아들었다. 한국에 가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떨떨한김에 하루밤 투숙에 내 한달 봉급을 메칠수도 있고 랭수 한병에 몇십원(중국돈)이 탕진될수도 있는 일이였다.
《첫끼니는 내가 내지.》
나는 차림표앞에 가섰다.
쌀막걸리 이천원, 맥주 삼천원, 참꽃술 만원(한병당)… 빈대떡 구천원(한그릇당), 동그랑땡 구천원, 고추전 구천원… 해장국 륙천원, 쇠뼉따구국 만오천원… 눈앞이 횅횅 돌아갔다. 그러나 일행앞에 내색을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최소한으로 간단히…》
단장님이 뒤에서 거듭 주의주고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였다. 최소한으로 간단히 올렸다는 상은 역시 곁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푸짐한가보다… 누구나 아침을 만포식했지만 상에는 막걸리, 소주, 선지, 갈비, 삼겹살, 해장국이 반나마 남았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그 비싼 갈비는 누구도 집은것 같지가 않게 그대로 남았다… 중국돈으로 환산해보니 팔백오십원가까이나 써버렸다. 하루아침에 한달봉급을 거의 먹어치우다니 억이 막혔다. 접대를 하고도 되려 눈치가 뵈여 몹시 불편하기까지 해났다. 그때였다. 카운터에서 몸을 돌리는 나는 코를 벌름거렸다. 바로 앞의 음식상에서 사십대의 장정 둘이 마주앉아 땀을 벌벌 흘리며 음식을 들고있었는데 가보니 매울 짬뽕 한그릇씩이였고 좀 곁으로 책보를 걸상에 부린채로 김서리는 국에 밥을 말아먹는 학생 셋을 보게 되여 가서 물었다. 한것은 그 국향기가 꼭 내가 즐기는 시래기장국처럼 구수했기때문이였다.
《이게 무슨 국이죠?》
《네, 우거지탕이야요.》
우거지탕, 차림표에는 우거지탕 한그릇에 삼천원, 밥 한그릇에 이천원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마음 한구석이 섬뜩해나고있음을 느끼고있었다. 초고중학생들이 생일파티를 열고 레스토랑이나 나이트클럽에 드나들며 돈을 망탕 쓰는 일이 누구의 일 같지가 않게 죄의식이 들었다.
그날밤 나는 사전을 들추어보았다.
우거지― 채소를 다듬을 때 골라놓는 떡잎이나 겉대, 맨 웃층의 맛이 잘 들지 않은 부분.
시라지― 말린 배추잎이나 무우청, 주로 볶거나 끓이는데 쓴다.
울산행뻐스에서
서울의 인사동, 그 이름이 뽕짝에서 들어 익숙한것이라면 울산 역시 《울산 큰 애기》라는 노래가사가 귀가를 맴돌며 마음에 정다운 곳이다. 오늘 울산으로 찾아가는 나는 울산은 대체 어떤 곳일가, 그 신비감에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뻐스역은 여느 역처럼 깨끗하고 조용했다. 차라리 《어지럽히는 사람 없고 객들도 역시 드문편》이라고 함이 더 낫겠다. 한국은 다 그런것 같았다. 산과 들은 해발이 높지 않고 나란히 어깨걸이하고 강이나 호수는 물살이 알리지 않을 정도로 맑고 잔잔하다. 역이든 시장이든 행로든 하학길이든 불문하고 아무리 사람이 많아 붐비더라도 《조용히 흐르는》 좋은 질서환경을 잘 보여주고있다.
뻐스에 올라서 보니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 객이 십여명을 넘기지 않았다. 뻐스안 바닥엔 짙푸른 고무판을 깔았는데 깨끗하여 난 아예 양말바람으로 바닥을 밟고 앉았다. 발바닥이 시원하니 한결 기분도 좋아졌다… 정신이 맑아지고 심정이 쾌활해나니 자연 이제 곧 참관하게 될, 2천억원에 판매된다는 거물급 륜선을 단 70일에 제조한다는 울산조선공장과 8초에 승용차 한대씩 만들어낸다는 자동차공장이 떠오르며 고국에 정몽주 같은 세계일류의 기업가가 태여났다는게 얼마나 다행이며 자부스러운가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해왔다.
뻐스는 전속으로 달리고있었다. 차창으로 가을걷이가 끝난지 오랜 논벌이 안겨들었다. 논밭가운데로 띠염띠염 원주형의 커다란 흰 물건이 보이군 했는데 안내로 나선 김송배시인은 저렇게 가을이 끝나는대로 기계작동에 의해 비닐로 벼짚을 봉합하여 일본으로 수송한다고 소개했다. 논밭엔 벼짚 한대까지 버려지는게 없이 다 돈으로 바뀐단다. 논밭마다 일매지게 깨끗했다. 보고 또 살펴봐도 산은 아름드리 나무로 꽉 찼고 시내든 강이든 호수든 해구든 물은 맑고 푸르렀으며 가을걷이가 끝난 밭마다 그린듯했다.
나는 뻐스에서 한화 천원을 주고 산 음료수 한병을 한 정거장에 한두모금씩 마셔댔는데 보아하니 내 앞자리에 앉은 책보를 멘 학생도 나처럼 음료수를 들고있었다. 울산이나 근방 어느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있는듯싶었다.
울산도착 약 반시간을 앞두고 난 절반쯤 마시다 남은 음료수병을 던질가 하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한국에서는 아무곳에서나 침을 뱉는다든가 휴지를 던진다는건 유치한 일이였다.
그때 난 문득 그 학생이 이미 다 마셔버린 빈 음료수병을 손에 쥐고있음을 발견하고 슬그머니 궁금증이 생겼다.
울산역에 도착하니 그 학생은 내리려고 서둘렀다. 그 빈 비닐병을 호신부라도 되는듯 아직도 꼭 쥐고있는게 아닌가. 그깟 비닐병 하나쯤 시트아래에 놓아두거나 짐받이대에 올려놓거나 지어 차창밖으로 던진대도 대수겠는데. 그바람에 내 손에 쥐여있는 음료수병도 그냥 자리를 뜨지 못하고있는게 아닌가.
울산거리에서 그 학생은 드디여 내리게 되였다. 내리기전에 그 학생은 빈 병을 책가방안에서 꺼낸 비닐주머니에다 정히 담았다. 그 비닐주머니안에는 휴지와 포장지 그리고 깡통도 들어있었다. 나도 음료수병을 내 양복호주머니에 넣었다. 그제야 복잡하던 마음도 다소 안정되고있었다.
한국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경제대국의 하나이다. 나는 문득 이 나라의 두터운 경제력을 밀어주는데에 문명이 얼마나 막강한 생산력의 산생을 위한 질서, 환경을 마련해주는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럴진대 그러한 문명의 배출의 뉴대가 다름아닌 교육이란것을 다시 한번 믿지 않을수 없었다.
나라가 부강하려면 교육이 최고의 최고가 되여야 한다.
나는 울산행뻐스에서 고국의 한 학생의 소행을 직접 관찰한 사람이다. 미래의 대통령, 기업가, 예술갉를 본게 아니란 말인갉
부티크
부티크를 시체옷가게 또는 정품가게라고도 부른다.
한국에서 고속뻐스를 타고 승용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우리의 참관고찰관광의 스케줄은 팽팽하기도 했지만 서울, 청주, 청원, 상주, 경주, 울산…에서 보낸 나날들은 하냥 유쾌했고 놀랍기만 했다. 놀랍다는건 새록새록이 체험하고 전수받는다는데 그 뜻이 담겼지만 진하게는 어떤 발견에 따르는 궁구, 바로 거기에 있었다.
관광차를 타고 옹근 반나절씩이나 고국 깊이 돌아볼 때도 있었다. 그런데다 비하면 석가모니불상, 에밀레종, 불국사, 고구려왕릉, 경복궁, 락동강…을 체험하던 시각은 짧은 시각에 불과했다.
도시와 마을, 산과 벌을 시야로 당겨보았지만 놀랍게도 떠오른 생각은 아래와 같은 의혹들이였다. 첫째, 벌에는 우마가 보이지 않고 도시나 마을에서 개나 닭을 보지 못한게 아닌가. 그보다는 내가 한 소리는 일행을 더욱 놀랍게 하였다.
《그뿐이오? 이곳은 통 아이들을 볼수가 없단 말이오, 소학생들을 말이오. 그래 누가 봤소?》
모두들 본적 없다고 머리를 저었다.
안내자와 물어보니 휴가일에 소학생들은 제멋대로 놀것이고 학교 가는 날에도 점심시간, 하학시간에는 자유라는거였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가축들을 마구 풀어놓고 기르지 못하게 한다고 소개했다. 중국에서는 닭 한마리가 자동차에 끼워죽어도 보상을 받을수 있고 운전기사가 빌고드는판인데 말이다. 한국에서는 정반대로다. 포장도로에서 돼지가 치여죽어도 되려 죽은 돼지 임자가 손이야 발이야 빌고 반성을 해야 하며 접대하려고까지 든단다. 안그러면 조례에 근거하여 되려 처분받고 위반벌금을 엄청나게 물기때문이다. 가축을 마구 풀어놓으면 도처에 똥오줌을 누게 되여 환경위생과 환경오염에 불리하며 곡식을 해치고 소란을 일으킬게 뻔하다. 한국에서는 구역마다 전문사양장을 두고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학생들도 《전문사양장》이 있다는걸가?
그날은 면바로 휴가일이였다. 우리 일행은 서울 남대문을 거쳐 어떤 부티크에 들렸다. 부티크안에는 생각밖으로 복장뿐이라든가 정밀공예품뿐이 아니라 남새매대, 고기매대, 서적매대까지 백화였는데 ㄱ, ㄴ, ㄷ, ㄹ 형태로 진렬되여있어 굽이돌이가 많기도 해 어린이들 전쟁놀이터가 련상되였다. 우리 일행이 약속이나 한듯 놀라와하며 멈춰선 곳은 ㄷ자형으로 진렬된 도서매대앞이였다. 스물셋이나 되는 조무래기들이 울긋불긋한 풍경으로 맨 타일바닥에 줄지어 앉아 저마다 손에 든 책에 눈길을 박고있는게 아닌가?!… 너무나 간소한 부티크에서 독서하는 어린이들을 보았다면 지하의 서점이나 골목들의 책매대, 이름난 도서관에선 은하계같은 조무래기친구들이 《사육》될게 아니란 말인갉
나는 고국의 어린이들이 부러웠다. 독서왕들이 기특했다. 그리고 내 고향의 어린이들을 생각했다. 아니, 내 제자들의 독서자세를 눈감고 심사숙고하지 않을수 없었다… 유감만을 차릴 때가 아니였다. 우리 은사들의 각고탁마의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샤타를 눌렀다. 섬광이 번쩍이고있었다.
한강을 따라
관광의 유쾌하던 나날도 다 풀려 마지막 사흘은 자유활동으로 스케줄이 짜였다. 우리는 오전에 경복궁을 돌아보고 한강에 이르렀다. 락동강이 감동적이고 숭엄하다면 한강은 격동적이며 장엄하게 안겨오고있었다. 대안이 보이잖게 폭이 넓었다. 유유히 흐른다거나 검푸르게 꿈틀거린다고 형용할수 없게 바다같다는 느낌이였다. 무수한 포말로 부서지고 또다시 파도쳐오는, 파도를 이어서 끊임없는 정진과 창성을 이야기해오고있는듯했다. 한강철교우에서 우리 넷은 맑고 시원한 강바람에 페부를 씻으며 서로의 자세를 달리하고있었다… 장편소설을 련거퍼 펴내는 리혜선단장은 장하로 거창히 흐르는 강폭에 아뜩하니 시선을 놓고있었고 소설가 강호원씨는 고기비늘처럼 번들거리는 물결에 튕겨오른 정오의 해볕을 벗어진 이마우에 모셔놓고 맛갈스런 담배쉼으로 즐거운데 산문작가 정호원씨는 두눈에 백촉짜리 수은등을 켠듯 수심에 문학의 그물을 늘이며 정감을 수집하고있는중이였다.
우리는 강변 유보도를 따라 홀린듯 걷고 걸었다. 남으로 김포교까지, 북으로 광진교까지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자꾸만 걷고싶어지는 마음때문이였다.
저마끔 명상에 잠겨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강가라서 그럴가. 쾌청했던 날씨가 흐려지며 는개를 내리기 시작했다.
뽀얀 강을 마주하고 포장마차가 띠염띠염 늘어앉은것이 보였다. 우린 경상도아줌마가 손젓는 포장마차안으로 들어섰다.
포장마차안에서 우리는 뜻밖의 풍경에 시선을 할애하였다. 이건 혹여 서점과 음식장사를 더불어하는것은 아닌지… 포장마차안 구석쪽으로 세명의 학생빠찌를 단 남학생들이 앉아 저마끔 두터운 책에 골똘히 정신이 팔려있었던것이다.
《비내리거나 땡볕이 지지는 날이믄 강역에서 놀던 학생들이 여길 들어와 짬뽕 한그릇이나 굴비 같은걸 사주고 저렇게 앉아서 독서를 하는거라유.》
경상도아줌마의 소개에 상고머리를 한 키큰 남학생이 일어나 꾸뻑 인사를 건네오고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같은데…》
《네. 2학년생이지요. 휴가일마다 한강을 찾아 독서하는게 인이 박였는가봐요.》
《고등입시때문에 독서할 여가가 쉽잖겠구먼 기래유.》
《고등학교시절엔 지식범위를 한창 넓혀가야할 년령단계이지요. 교과서내용에 매달려 교실에만 사유를 붙들어둬서야 되겠나요. 난 요즘엔 여가를 타 현대상상파 작가들이 쓴 소설들을 읽고있지요. 그들의 환상적이고 리상적인 시점과 인식 그리고 사회 부조리에 대한 박제력에 대해 몹시 궁금하지요. 자신의 창발능력과 지적생산투입능력의 제고를 준비하려고 해요… 끊임없이 파고들어야죠.》
단장의 부름소리에 난 사색에서 깨였다. 벌써 음식상이 차려져있었다. 강호원씨는 참꽃술을 따르고 정호원씨는 감주를 맛보며 싱글거린다.
《량선생은 뭘 들겠소?》
《먹고싶은걸로 먹지.》
나의 대답이 얼떨떨하다고 생각했던지 일행은 폭소를 터뜨렸다.
《누가 먹기 싫은걸루 먹으라 했나…》
난 대답이 없이 참꽃술 한잔을 단숨에 굽냈다. 포장마차의 빠끔한 유리새로 한강이 바라보였다.
얼마나 긴 시간을 흘러왔던가. 우리의 학생들은 실로 《먹고싶은걸 먹지 못하고》《공부》하고있다. 《사과그리기》에서 미국의 어린이들이 그린 사과는 모양이 각양각색이고 일본의 어린이들이 그린 사과는 모양과 색들이 조합되지 않으며 중국의 어린이들이 그린 사과는 하나같더라는 이야기를 알고있을것이다. 왜? 중국은 선생님이 한획한획씩 먹여주고 일본은 사과 하나를 달아매놓고 그리게 했고 미국은 자기가 그리고싶은 사과를 가져다가 나름대로 그리게 한것이란다. 시험에선 중국의 학생들이 우수하나 특장생 인재일 경우, 그리고 그 사회적 역할에선 외국을 따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갉
실날같던 는개는 어느덧 비살로 바뀌여 내리기 시작하고있었다. 빠끔한 유리창으로 내다뵈는 그 뽀얗게 흐르는 한강의 흐름속에 난 언젠가 내가 지은 장편소설도 어느 제자들한테 읽혀지리라 기대해보았다… 한강에 명상 한폭 걸어놓고서 참꽃술맛은 시나브로 진해가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