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은 이렇게, 스마트 시대이다. 다들 네트워크 공간에서 소통을 많이 하고 있다. 나도 카톡의 200여 명, 위쳇의 200여 명 친구들과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교류한다. 카카오스토리에서 얼굴 한번 본적이 없는 이들과 정감을 나눈다. 가끔씩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내 글에 공감을 표시하고 댓글을 정성스레 달아놓을 때면 무척이나 반갑다. 너무 고맙게 생각이 된다. 저도 모르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들과의 관계가 단순한 메시지나 댓글이 아닌, 그 이상의 인간적인 맺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생긴다. 그로 하여 뿌듯함이 가슴 가득 채워지기도 한다.
한 번은 어떤 교수님이 지인의 카스를 통해 나의 카스에 들어오셨다. 신문에 실린 “그곳에는 나의 혈육이 있다”라는 나의 글에 공감을 표시하며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었다.
교수님은 살다가 힘들거든 백두산 천지수면의 푸른색을 떠올리라고 하셨다. 이북동포와 중국동포를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것이 한민족의 숙명이라며, 통일의 그날이 멀지 않았음을 감명 깊게 이야기했다. 중국동포들의 장점과 ,극복해야 할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정확히 지적해 주셨다. 지금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하루하루를 다져간다면 꼭 옛말하며 살날이 온다고 격려하셨다. 정말 스폰지에 스며드는 물처럼 마음을 적셔주는 도리들이었다.
후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그 교수님은 지금까지 4000여 회의 출강을 하셨고 책도 수 십 권을 펴내신 분이었다.
나는 곧 많은 조언과 삶의 이야기를 요청하는 쪽지를 보냈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공감을 해주는 사람에게는 자연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기 마련이다. 교수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고생을 함께 겪어 온 가족처럼 부드럽고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셨다. 말로 다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책에서 더 많이 듣는다며 좋은 책 한권도 선물해주셨다. 나는, 그 어떤 귀중품을 선물 받은 것보다 더 감사했고 가슴이 뿌듯해났었다. 또 하나 배움의 순간을 경험하였고 삶의 다른 한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된 것이다.
뒤 돌아보면 우리는 같은 하늘아래 살면서도 어쩐지 낯 설은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살아 온 것 같고, 편견과 선입견부터 가지면서 많은 오해 속에서 꽤나 긴 세월을 보내온 것 같다.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주원인은 서로에게 믿음이 없고, 쉽사리 마음을 열었다가 오히려 상처를 받기 쉬운 현실 때문이었다.
또 하나 있다. 우리 동포들은 열등감 때문에 마음의 문을 잘 열지 않는 것 같다. 내가 한국에 금방 왔을 때, 자주 마주치게 되는 60대 후반으로 돼 보이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는 내가 중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소고기뷔페 잘 하는 집이 있으니 밥을 사주겠노라며 같이 가자고 말했다. "뭐야, 이 아저씨 사람을 어떻게 보고? 아무런 연고(緣故)도 없는데…"라고 생각한 나는 마음에 꽤 큰 상처를 받았다. 내가 중국에서 왔다고 무시해서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한국인보다 못하다는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후 나는 한국인들과는 늘 마음의 벽을 두고 지냈었다.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서로가 네트워크를 형성해 긴밀한 소통과 교류를 활성화하면서 상부상조의 기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자연히 마음의 간격도 많이 좁아지고 있다.
마음을 잘 얻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마음의 문을 잘 여는 사람들이다. 소통을 잘 하려면 서로가 상대방에 대한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공통분모와 같은 유사성을 찾아내야 한다. 취미가 같거나 심지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공감을 가져도 마음의 벽이 사라지고 친숙함을 느끼게 된다. 그 것은 마치 '아리랑' 연주곡을 들으면 무대아래서 동포들이 저도 모르게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게 되는 정경과 같은 것이다.
마음의 문이 닫히는 것이 느껴질 때에는 조심하자. 자기 마음의 문턱을 조금만 낮추어 보자. 자그마한 노력이 곧 열매를 맺어줄 것이다. 우리의 스마트시대는 더 많은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시원히 열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