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본지는 최선향 교수의 글 '움직이는 집'을 싣는다. 작자는 글에서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원한다. 그런데 그 나은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크고 번화한 도시에서 사는 것일까? 많은 돈을 벌어 풍요롭게 사는 것일까? 더 좋은 직장과 더 많은 명예, 권력일까?…"라고 자문한다. 독자들에게 많은 계발을 주는 글이다. 편집자 주
이 곳 청도는 노란 개나리꽃이 곱게 피어나기 시작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간다. 요즘은 이름 모를 분홍색 꽃들도 예쁘게 피어나 한껏 아름다움을 뽐낸다. 오늘 강의를 끝내고 비가 갠 캠퍼스를 걸어 나오는데 어제 내린 비로 파릇파릇 물기를 한껏 머금은 나뭇잎들이 나를 반겨 주고 있었다.
이맘때 내가 나서 자란 길림성 서란시의 그 작은 산골마을은 아직은 눈에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또 처음 교사 생활을 시작했던 두 번째 고향 길림시도 아직 꽃이 피려면 보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곳에 이사를 온 뒤, 매일 오후 동네를 산책하는 것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상큼한 공기를 마시며 한가하게 거닐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제 청도에 이사온 지 꼭 1년이 되었다. 그 동안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던 것 같다.
우리 집이 천진에서 청도로 이사를 온 것은 작년 2월 18일이었다.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잡은 셋집은 새 집이었는데 난방이 되지 않아 얼마나 추위에 떨었는지 모른다. 이사를 온 첫 날에는 너무 추워 호텔에서 자고, 이튿날부터 집에서 잤는데 전기장판을 켜도 실내온도가 너무 낮아 저녁에 자다나면 코가 시리고 귀가 시려 잠을 설쳤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때의 생각을 하면 26도가 넘는 따뜻한 거실에 반팔 차림으로 앉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손이 시려 온다.
이삿짐도 미처 정리를 끝내지 못한 방에서 우리 집 세 식구는 겉옷도 벗지 못한 채 전기장판을 깔고 두터운 이불을 덮어쓰고도 새우처럼 웅크리고 추운 잠을 자야 했다. 새 집인지라 가스렌지도 사용할 수 없어 거의 일주일 동안 집에서 밥을 해 먹지 못 하고 매일 이삿짐을 정리하며 바삐 보내다 밖에 나가 밥을 사 먹곤 했다. 낯선 동네인지라 채소를 살 수 있는 시장과 일용품을 살 수 있는 대형마트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가 없었다. 그래도 조선족이라 제일 먼저 ‘한국 슈퍼’와 한식점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했던 것 같다.
청도공항 가까이에 있는 청양(城陽)에 가면 북경의 왕징(望京)처럼 조선족이 살기 편하게 되어 있지만 우리가 사는 황도(黃島) 개발구에는 조선족이 많지 않아 맛있는 한식집도 찾기 힘들다. 천진에 있을 때는 한국 사람도 많이 살고 조선족도 많아 맛있는 한국피자집, 한식점도 많았고 추울 때면 애를 데리고 가서 하루종일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한국식 사우나도 있어 참 좋았다. 그런데 이곳은 그런 사우나에 가려면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청양까지 가야 한다. 작년 이맘때 추운 집에서 떨며 천진의 한증막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래도 남편과 12살 된 딸애와 함께 살을 비비며 온기를 나누며 가족의 정과 그 소중함을 새삼스레 실감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우리는 추위도 견뎌내고 습도가 높은 바닷가의 기후 때문에 옷과 이불에서 나는 뜬 냄새에도 잘 견뎌내며 오늘까지 왔다. 그리고 이제는 바닷가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지혜도 나름 터득해냈다.
내가 임직하고 있는 대학의 교수들은 대부분 청도나 산동 현지인들로 별로 이동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많이 이동하면서 살고 있다. 나뿐이 아니라 내가 아는 주위 사람들은 거의 모두 국내나 국제 이주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유독 우리 민족만이 많이 이동을 하며 사는 것 같지도 않다.
지난 겨울방학에 딸애랑 친정식구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던 해남도에도 많은 동북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사는 이곳에도 동북사람들이 많다. 우리 대학의 현지인 교수들은 동북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시고 밤늦게까지 시끄럽게 떠든다고 좋은 인상을 갖지 못하고 있다. 해남도에 가기 전에 인터넷을 통해 알아본 여행 정보에도 해남도 현지인들보다 동북사람들이 ‘바가지’를 많이 씌우니 동북사람이 경영하는 식당에 가지 말고 그들이 운영하는 허이처(黑車)도 타지 말라는 네티즌들의 경험담이 많이 보였다.
보도에 따르면 해마다 거의 200만이나 되는 흑룡강성, 길림성 출신의 동북 사람들이 ‘관내’로 이주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조선족만이 이주를 많이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우리의 이웃—동북의 한족들과 조금 다르다. 조선족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한국 혹은 한국 기업이 많은 대도시나 연해 도시로 이주를 하면서 지연과 혈연에 따라 나름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여 올해까지 어언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는 연길, 장춘, 천진, 청도 네 도시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연길은 석사 공부를 하던 내가 남편을 만나 사랑을 시작했던 도시이다. 그 작고 아담한 도시의 곳곳에는 남편과 함께 데이트를 즐겼던 달콤한 추억이 남겨져 있다. 연길에는 또한 친정동생과 함께 셋집에 살며 박사 공부를 하던 기억과 한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던 남편이 돌아와 방학 때 귀국을 하면 알콩달콩 살던 남다른 추억도 남겨져 있다. 나는 지금도 모교와 연길의 양꼬치가 그리워 한번 남편과 딸애와 함께 다녀와야지 하고 다짐을 하곤 한다. 그렇게 연길은 남편과 언제 한 번 애 데리고 꼭 다녀와야겠다고 다짐하는 세 번째 고향이다.
남편이 박사 공부를 하던 도중 운 좋게 장춘 모 대학의 교수로 취직하게 되어 ‘집’을 장춘으로 옮기게 되었다. 연길에서 이삿짐을 기차로 부쳤는데 이삿짐 중에 내가 아끼던 가죽점퍼와 좀 비싼 물건들을 잃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가난한 대학원생 부부인 우리에게는 가슴 아픈 손실이었다.
장춘에서도 우리는 남편이 근무하던 대학 캠퍼스 근처에 셋집을 얻어 살았다. 우리도 여유가 있는 형편이 아니었지만 주위에는 어려운 이웃들이 많아 그네들은 장을 볼 때면 팔다 남은 고기나 시들시들해진 채소들을 사곤 했다. 그네들을 보면서 가진 것에 감사해 하고 행복해 할 줄을 알아야겠다고 늘 다짐했었다. 그러다 친정에서 딸애를 출산하고 넉 달만에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원래 셋집이 너무 추워 안 된다면서 없는 살림에도 좀 더 넓고 좋은 셋집으로 옮겼다. 그 뒤 ‘우리 집’이 생겨 인테리어도 하고 해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우리 집’은 127평방미터 되는 널찍하고 인테리어도 해서 좋은 집이었지만 그곳에 대해서는 슬픈 추억이 많이 있다. 그때 나는 박사학위논문을 끝내지 못해 매일 걱정하고 고민하다 보니 젖먹이 딸애한테까지 영향을 미쳐 아이가 변비로 고생을 하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딸애를 북경의 친정에 맡겼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친한 친구 하나 없이, 오로지 남편 한 사람만 밑고 살아야 했던 장춘에서의 생활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매일 집에서 논문을 쓰느라 이 논문 저 논문 뒤져 보고, 이 책 저 책 찾아보며 하루를 보내야 했던 나는 친정에 맡겨 둔 딸애가 보고 싶어 울고, 논문이 잘 써지지 않아 속상해 울고, 아무튼 많이도 울었다. 매일 그 큰 집에서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며 책을 보다가 거실의 소파에 맥 놓고 누워도 있고 그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나니 집안의 하얀 벽들이 내가 넘지 못할 벽으로 보이고, 이 세상과 나를 갈라놓는 벽으로 보였다. 나는 그 벽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하고 걸어서 남편이 근무하던 대학 캠퍼스 안에 가서 넓은 광장에 홀로 앉아 논문 생각도 하고, 딸애 생각도 하며 멍해 앉아 있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참으로 장춘은 내가 제일 힘들게 살았던 고난의 도시인 것 같다. 나는 논문 때문에 남편이 일하며 살아야 했던 그 도시에 붙들려 남의 세계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 같다.
친구, 친척, 지인 하나 없이 살아야 했던 장춘은 나에게 또 다른 나를 알게 해 준 도시이다. 나는 중학교 교사로 일하던 처녀 때 남편이 근무하는 그 대학에서 통신과정으로 본과 공부를 했었다. 그때 나는 그 대학 교수들을 무척 우러러보고 그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무척 부러워했었다. 그런데 정작 남편이 그 대학 교수가 되고 나도 그 대학 교수 사택에 살게 되었을 때는 행복한 줄을 모르고 또 다른 삶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왔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만족할 줄 모르는 젊음과 나를 사랑해 주는 친정 식구들과 남편이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삶이란 끊임없는 도전임을 장춘이란 도시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앞만 보고 내달리다 보니 장춘은 지금까지 살아 본 도시 중에 제일 낯선 도시인 것 같다. 애도 어리고 살림살이가 너무 빠듯하여 집에만 박혀 있다 보니 더욱 낯선 도시가 된 것 같다.
한번은 결혼 5주년 기념일을 맞아 나와 남편은 큰 마음 먹고 영화도 보고 외식도 하러 시내 나들이를 나갔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영화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스파이더맨』이어서 비싼 돈 주고 보기 싫었다. 영화관에서 나온 나와 남편과 ‘월마트’를 돌다 남편이 한국에서 사다 준 블라우스를 쇼핑카트에 두고 오는 바람에 잃어버렸다. 기분이 잡친 우리는 외식도 안 하고, 둘이서 맥없이 집에 돌아와 집 앞 슈퍼에서 족발과 맥주를 사다 결혼기념일을 보냈다. 장춘에서 그 초라했던 결혼기념일……
박사 공부를 마친 나는 장춘에서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결국 또 한번 집을 천진으로 옮기게 되었다. 천진은 친정과 가깝고 비전이 있는 도시라 생각되었다. 그곳에서 어렵게 대학의 교수로 취직이 되어 우리는 8년 동안을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첫 3년간은 두 번이나 셋집을 옮겨 다니다 ‘우리 집’을 장만하여 5년 살았다.
천진은 딸애가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4년 반을 다닌 도시이고 내가 대학의 교수로 취직을 하여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운 도시이기도 하여 나름대로 많은 의미가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매일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하는 데 정신을 빼앗겨 도시의 좋고 나쁨을 생각할 여지도 없었던 것 같다. 여성학, 사회학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또 사랑하는 나의 학생들을 위해 내 전부의 열정을 다 쏟아 부었다. 그곳에서 나는 훌륭한 윗사람들과 동료교수들을 만나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많은 것을 배우며 정말 많이 성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천진은 공기 오염이 심해 거의 매일 안개가 낀 것 같이 뿌옇고, 우리 대학 근처에 화학비료공장까지 있어 바람이 불면 매캐한 냄새가 많이 풍겼다. 그리고 도시는 큰데 깨끗하지 못했고, 나중엔 스모그까지 심해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곳에 사는 동안 나는 인생의 또 다른 시련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사랑하는 작은언니와의 이별이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언니는 더없이 다정다감했고 동생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훌륭한 언니, 누나였다. 그런 언니를 잃고 겪어야 했던 이별의 아픔은 나에게 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영원한 아픔이 되었고, 나로 하여금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삶이 영원할 수 없고, 지금은 젊고 건강해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삶이기에 조금이나마 더 보람있게, 더 아름답게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나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천진의 스모그 때문에 폐가 아파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하면서 청도의 대학를 알아봤을 때 천진보다 훨씬 못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이었지만 가뿐히 함께 옮길 수 있었던 것 같다. 40대 중반에 들어선 나였고, 사랑하는 언니를 잃은 아픔을 겪은 나였기에, 내 삶에서 떼려야 떼 놓을 수 없는 사랑하는 남편과 딸애를 위해, 또 이들이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는 나를 위해 큰 망설임 없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원한다. 그런데 그 나은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크고 번화한 도시에서 사는 것일까? 많은 돈을 벌어 풍요롭게 사는 것일까? 더 좋은 직장과 더 많은 명예, 권력일까? 아니면 건강하고 정직하게 살며 썩 풍요롭지는 못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삶이 더 나은 것일까?
더 나은 삶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40대 중반이 되어 가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모두 가족과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한다. ‘불혹(不惑)’을 지났으니 돈이나 명예, 권력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리라. 이젠 얻으려는 욕심보다는 나누고 베푸는 마음가짐을 갖춰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천진의 ‘우리 집’이 그대로 있고, 청도에 이사를 와서도 자가용까지 갖춘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는데도 처음에는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며 많이 불안했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추위와 습기를 견디며 1년을 살아온 지금의 나는 그런 불안감을 털어 버리고 또 다시 젊음의 용기를 되찾아 새로운 삶에 도전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나의 꿈은 이제 많이 소박해졌다. 내 꿈이라면 명예도, 권력도, 재산도 아닌 가족의 평안과 건강, 행복 그리고 교단에 선 스승으로서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진정한 가르침과 계발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하루 세끼 밥을 하고 청소와 빨래를 하며 남편과 딸애를 보살피는 ‘전업주부’와 강의와 논문 임무를 완성해야 하는 교수의 삶을 병행하며 사는 나는 매일 일분 일초 시간을 쪼개서 책도 읽고 논문도 쓰느라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다. 그리고 이제는 ‘집’을 옮기며 살아온 지난 세월을 시련만이 아니고 삶의 다양한 체험이라고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또 다른 꿈을 키우게 되었다. 나는 지금의 대학과 맺은 6년 계약이 끝나면 운남이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가 살아 보자고 남편과 이야기한다. 대학 때 대만 작가 삼모(三毛)가 사하라사막과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살면서 쓴 수필을 읽으며 그녀와 비슷한 삶을 꿈꿨던 나 역시 그처럼 끊임없이 이주하는 삶을 살고 싶다.
새로운 곳에서의 삶은 새로운 앎을 얻을 수 있어 나로 하여금 기존의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게 한다. 연변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안쪽사람’인 나는 어렸을 적 연변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 많았었다. 옷만 반지르르하게 입고 입에 발린 말만 한다는 등의 선입견 말이다. 그러나 연변에 살아 보니 주위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아 그런 선입견은 자연스레 버리게 되었다.
어렸을 때 동네의 한족아이들과 싸움이 나면 그들을 ‘싼둥빵즈’라고 놀리곤 했는데 산동에 와서 살아보니 공자의 고향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모두 소박하고 부지런하여 참 좋은 사람들이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기후도 동북이나 조선반도와 비슷하여 가로수로 소나무도 많이 보이고, 봄이 깃든 산에는 진달래꽃이 만발한다. 그래서인지 당나라 때 산동에 신라인들이 모여 살던 ‘신라방(新羅坊)도 있었고, 신라인들이 법회를 열었던 절인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도 있다.
올해 청명, 우리는 대주산(大珠山)에 진달래 꽃구경을 갔다.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를 보니 고향의 봄과 연변대에서 공부를 하던 때 대학원생 동아리 선후배들과 함께 했던 도문, 용정 견학이 떠올랐다. 그때 기차를 타고 가며 보았던 길 옆의 키 낮은 진달래와 달리 이곳의 진달래는 키가 크고 가지도 우거져 같은 꽃이지만 다른 느낌을 주었다. 여기는 공기도 맑아 동북의 고향에서처럼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많다. 그래서인지 이제 1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결코 낯설지 않고 정이 많이 간다.
이렇게 우리가 여태껏 이주하며 살아 본 낯선 도시는 딸애에게는 정든 고향, 아름다운 추억을 가득 남긴 도시,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어 언제나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 어떤 건물에 살든 딸애에게 있어 집이란 그냥 사랑하는 엄마, 아빠와 함께 있는 그런 포근한 공간, 행복한 공간이 될 것이다.
나는 움직이는 집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언제나 나의 든든한 뒷심이 되어 주는 엄마, 아버지와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이다. 나와 남편 그리고 딸애 또한 흔들림 없는 사랑을 서로에게 주고 있으니 ‘집’이야 움직이면 또 어떠리……
주 : 최선향님은 길림성 서란시에서 태어나 연변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천진사범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다 2014년부터 靑島黃海學院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KCN/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