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첫 공동 '용정 3.13반일의사릉'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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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첫 공동 '용정 3.13반일의사릉' 참배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5.03.18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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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중국과 한국이 처음으로 함께 '용정(龍井) 3.13반일의사릉'을 참배하였다.  

지난 3월13일 '용정 3.13 반일대시위' 96주년 기념일에 연변조선족자치주외사판공실, 중공 룡정시위선전부, 주선양한국총영사관, 그리고 연변과 용정시 각 계층 인사 250여 명이 '용정3.13반일의사릉'을 참배했다.
 
올해 세계반파쇼전쟁승리 70주년을 기념하면서, 또 일본이 침략전쟁을 덮어 감추려고 애쓰고 있는 시점에서, 중한 양국이 함께 '용정3.13반일의사릉'을 참배한 것은 자못 의미가 깊다.
 
이날 추모식에서 리광평 '용정3.13반일기념사업회' 회장은 대회사에서 “96년 전 야만적인 일제침략자들의 탄압에 통분하던 용정을 중심으로 한 연변의 3만여 명은 용정에서 일제의 침략죄행을 규탄하고 조선과 조선민족 독립을 성원하는 성세호대한 반일 대 시위를 벌렸으나 일제침략자들과 반동군벌들은 적수공원인 시위군중들을 총탄으로 진압하는 바람에 용정거리는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러나 반일의 불길은 더 거세차게 일어나 선후로 '15만 원 탈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 무장투쟁이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했다.
 
▲ 리광평 '용정3.13반일기념사업회' 회장
연변조선족자치주외사판공실, 주선양한국총영사관 비롯한 사회 각 계층 대표들의 묵념과 헌주가 있은 뒤에 용정합창단과 중국조선족항일합창단이 선후로 '선구자', '역사의 종소리' 등 항일가요를 합창하였다.
 
한편, 용정 3.13반일 대 시위는 서울에서 벌어졌던 3.1반일대시위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서 일어났다.
 
1919년 2월에 조선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용정에 전해졌고 3.13일에 반일 대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3만여 명의 적수공권 반일시위자들은 독립선언포고문을 선독했다. 포고문 첫머리에는 “아 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민족의 자유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정의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인도를 선언하노라"라고 씌어 있었다.
 
일제의 피비린 탄압이 있은 뒤 3월 17일 용정촌합성리공동묘지에서 순난자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른 가운데 13명의 열사들을 안장했고 기타 6명의 순난자 유체는 친척이 모셔 갔다. 이 13개 묘지 중간에 “충열사제공지묘”란 나무비석이 세워지면서 그 후의 반일투쟁물결은 연변각지에 파급되어 반일조직들이 육속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 반일공동묘지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또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면서 그 누구도 성역사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쑥대밭으로 변했다.
 
1989년 9월, 한국 인하대학 윤병석 교수 일행이 용정에 와서 용정시 대외경제문화교류협회 회장인 최근갑 씨를 찾게 되었고, 당시 3.13반일투쟁에서 수난당한 반일의사들의 유해가 어디에 묻혀있는가를 고증하는 것이 역사에 책임지는 일이라는 데서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최근갑 씨를 수반으로 하는 용정3.13반일순난자수선회가 설립되면서 묘지를 재 수선하고 새로 비석을 세우고 지금 해마다 순난자를 기리는 행사를 치르고 있다.

윤운걸 흑룡강신문 길림성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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