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중국 용정시조선족민속박물관 전 관장
[서울=동북아신문] 2 뜨거운 손길

북경에서 출퇴근시간이면 택시 잡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겨우 택시를 잡고 북3환과 동3환 교차점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도착하니 택시요금이 50원 나왔다. 그의 사무실번호는1901호였다.
박회장은 전번에 그를 만나보았고 나는 그분을 처음으로 대면하였다.
훤칠한 키에 너부죽한 이마와 친절한 미소가 퍽이나 인자한 분 같았다. 그는 귀를 기울려 우리의 회보를 경청하면서 드문드문 질문도 제기 하였다. 그는 한낙연은 우리민족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아주 위대한 분이라고 칭찬했다. 더구나 리덕수 부장이 사업하던 룡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니 전폭 지지할 것이라고 하면서, 사전에 약속한대로 한낙연 동상 제작비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담당책임자를 불러 구체적으로 지시를 주었다. 참으로 너무나 고마운 분이였다. 한낙연 동상 제작사업을 계획한대로 무난히 진행할 수 있어 우리는 더없이 기뻤다.
사실 한낙연 동상을 세우는 사업은 이미 거의 5개월간 추진 중이다.
처음에는 우리들 나름대로 예산이 적게 드는 석조각 한낙연상을 만들려고 계회하였다. 그러다가 원연변박물관 김철수 관장과 용정출신의 김광혁 조각가와 반복하여 협상하여 시장가보다 훨씬 싸게 유기유리﹙有机玻璃﹚로 만들려고 계획하고 연변박물관 지승원 화백에게 부탁하여 부감도를 설계하였다. 이러던 차 한낙연 가족과 용정시시위 책임자들, 그리고 리덕수부장도 이 사실을 알고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특히 리 부장은 권순기 회장을 직접 만나 이 일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하여 더 차원이 높은 동으로 주조하기로 하고 일을 추진하였다.
추진과정에서 많은 애로가 나타났다. 나와 박 회장은 몇 날밤을 새우면서 일을 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흑으로 모형을 만드는 과정도 몇 번을 반복했는지 알 수 없다. 처음에는 전신상으로 만들었다가 북경의 이름 있는 학자들과 가족의 요구에 의해 전신상을 취소하고 흉부상으로 다시 만들었다.
얼굴모형도 한낙연이 혁명가인 만큼 조금은 엄숙한 표정으로 조각하였다. 그리고 가정의 의견을 청취했더니 "한낙연은 언제어디서나 웃음을 잃지 않고 낙천적이고 쾌활한 성격이였다"면서 활짝 웃은 자화상을 조각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가족의 요구를 100%만족시키는 것이 한낙연 열사에 대한 가장 큰 추모였다.
우리는 여러 번 반복하여 수정하였으며 나중에는 동북사범대학조각계 리현봉 주임과 가족을 현장에다 모시고 직접 의견을 들으면서 하나하나 완공해나갔다.
이런 과정을 30여차 거듭 수정하면서 끝내 유기유리 한낙연 조각상을 완공하였다. 후에 일이지만 동북지구에서 동조각상을 수준급으로 주조하는 곳은 대련시 금주개발구에 있는 동주조공장이다. 나와 박 회장은 모형을 가지고 대련에 무려 사오차 드나들며 고품질의 한낙연 조각상을 완공하여 제기한 내에 공원에 안장하였다.
룡정시위 윤성룡 서기는 몇 번이나 현장에 다녀가며 관심과 지지를 주었다. 더구나 연변텔레비죤의 '고향의 아침'프로에서는 수차나 룡정에 다녀가면서 '한락연을 기리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프로를 만들어 7월17일에 방송하였다. 이와 같은 성과는 권순기 회장의 전적인 지지와 갈라놓을 수 없다. 그 는 자기의 차로 우리를 호텔까지 실어다 주었다.
그사이 경숙씨와 선희씨는 천안문으로 갔다 왔다고 한다. 선희씨는 한국은 물론 국내 여러 곳을 많이 다녔지만 천안문은 가보지 못하여 이번 걸음에 다녀온 것이다. 점심을 먹고 일행은 북경서역에서 보정으로 향하는 고속열차를 탔다. 고속열차는 최근에 한창 전국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신형열차로서 설계가 깔끔하고 인성화 되었고 속도가 빠르다. 보정까지 일반 열차로 4시간 달리던 거리를 1시간쯤 달리니 그 속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꽤나 정갈하고 깨끗한 호텔에 들어 식사까지 마치니 피곤이 몰려와 인차 꿈나라로 들어갔다.
보정의 정

우리가 한낙연을 간단히 소개하고 그가 일찍 하북성 당현에 있는 팔로군진중군구를 시찰하였는데 그곳을 답사하려고 한다고 우리의 목적을 말하였다. 허국장은 전국의 당안국은 다 한집안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다 알아서 안배해 줄거니 근심 말라고 하면서 사무실 주임을 불러 지시하였다.
차를 기다리는 사이 허국장은 우리를 안내하여 당안관을 참관시키였다. 3층으로 된 건물은 비록 크지 않았지만 설비와 설계는 꽤나 현대적이고 선진적이었는데 우리 같은 곳은 비길 것도 없었다.
보정에서 당현까지 약60키로, 포장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리는 기분도 좋았지만 가없이 펼쳐진 드넓은 평원을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탁 트이고 시원해짐을 느꼈다.
가는 길에 위대한 국제주의 전사 <베이쮼기념관>에 잠깐 들렸다. 낮다란 산기슭에 남향으로 터를 잡은 기념관은 꽤나 품위 있고 분위기 있게 꾸며졌다.
점심 식사후 우리는 군청진선전위원인 마녀사의 안내를 따라 화가장 촌에 자리잡고 있는 진중군구사령부유적지에 도착하였다.
편벽한 이곳에서 일찍 섭영진과 려정초 등 장군들은 악렬한 환경을 무릅쓰고 항일전쟁을 지휘하였다. 더구나 우리가 한창 그의 자취를 답사하는 한낙연이 머나먼 이곳에 까지 찾아왔다고 하니 자연이 마음이 숙연해지고 가슴 그들먹 그 무엇이 차오름을 저도 몰래 느꼈다.
사령부유적지는 지금 이씨라는 농민의 개인소유로 되어있었다. 다행인 것은 10여평방 되는 집은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데 유감이라면 문쪽 벽에 붙여 새 건물을 지은 것이다. 그래도 진정부에서 문물보호간판을 문 옆에 걸어놓아 조금은 안위감을 느끼었다.
방안에는 두터운 먼지가 한 벌 깔려 있었다. 낡은 책상 위에는 섭영진 원수의 사진 석장과 그가 쓰던 남포등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주인이 꺼칠한 손으로 먼지를 쓸어 내자 익숙한 섭영진 원수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났다. 박 회장은 마 여사한테, 이곳은 군청진은 물론 보정시와 나아가서는 전반 하북성의 보귀한 문화재부이며 홍색관광명소이기에 문물을 더 잘 보호해줄 것을 건의하였다. 우리는 한낙연의 자취를 피부로 느끼며 기념사진을 남기고는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돌아오는 길에 고속도로를 봉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는 고급 영도 분이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득불 차머리를 돌려 간이도로에 들어섰다.
좁다랗고 오불고불한 산길에 들어서니 우리 곳과는 달리 지붕이 평평한 가옥들이 눈에 띄었고 길가에는 노인들과 아이들이 차량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옷차림이나 모습들이 꽤 상황이 어려워 보였다.
함께 차를 탄 사무실 이주임은 이곳은 국가급 빈곤지구라고 하면서 지금 이곳에는 젋은이들은 모두 타지방으로 돈 벌러 가고 집에는 386180부대밖에 없다고 하였다. 38은 부녀들을, 61은 아이들을, 80은 노인을 가리키는 꽤나 유머스러운 말이었다. 내가 그래도 3군이 다 있어 괜찮다, 우리지방 농촌에는 유일하게 80부대가 진지를 고수하고 있다고 말하자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있어 우리는 하북성직록총독부 유적지와 육덕중학교유적지전람관을 돌아보았다.
청나라시기 북경주위의 지역을 직록성이라 불렀다. 직록총독유적은 보정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유화로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목전 중국에서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성급아문건축이라고 한다. 1729년﹙옹정7년﹚에 직록총독부가 세워져 1911년까지 182년 사이에 기선、증국번、리홍장、원세개 등등 많은 조정의 쟁쟁하고 모모한 관리들이 직록총독을 담임하였다.
뒤이어 우리는 육덕학교유적지에 세운 <프랑스근공검학운동전람실>을 둘러보았다. 보정은 일찍 프랑스근공검학운동의 발상지였다. 1920년대 주은래를 비롯한 등소평등 초기 혁명가들은 프랑스에 류학하여 고학을 하면서 혁명의 진리를 탐구하였다. 처음 보는 사진들이 많았다.
한낙연은 1929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갔으니 이들보다 한발 늦은 제2 대프랑스유학생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전람실에는 당시 프랑스 유학생들이 배를 타고 갔던 항해노선을 표시한 도표와 마르세유항 낡은 사진이 주목을 끌었다.
우리는 우리를 열정 껏 도와주고 접대까지 해준 보정시 당안국 동지들과 작별하고 한단까지 가는 고속열차에 올랐다. 300키로 속도로 달리는 동차는 아늑하고 편안하였다. 동차는 한마디로 많은 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8개의 바곤으로 이루어진 표준열차에 5개 동력과 3개 보조동력이 동시에 열차를 움직인다고 한다. 그러니 기관차 하나로 끄는 전통열차에 비하여 그 시속이 3-4배 높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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