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길우 탐방기]영월(寧越)의 문인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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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우 탐방기]영월(寧越)의 문인 유적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3.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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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북아신문] 강원도 영월(寧越)은 고려 때 “편한히 넘어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원래는 진한의 땅이었는데, 백제 때는 백월(百越), 고구려 때는 내생현(奈生縣), 신라 때는 내성군(奈城郡)이었고, 고려 성종 14년(995)에는 원주군에 소속되었다. 영월이라 불린 것은 의종 21년(1167)부터이고, 조선 정종 1년(1399)에 강원도에 소속되었다.

   현재 영월은 서쪽으로 원주시와 횡성군, 북쪽으로 횡성군․평창군․정선군, 동쪽으로 삼척시, 남쪽으로 충북 단양군․제천시, 경북 봉화군․영풍군의 9개 시군과 맞닿아, 강원․충북․경북의 세 도와 연접한 지역으로, 지형은 오이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영월의 풍광은 매우 수려하다. “칼 같은 산들은 얽혀 있고, 비단결 같은 냇물은 맑고 잔잔하다” 옛 시인의 말처럼, 영월은 산과 물이 푸르고 맑아서 사철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영월에는 석기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이 나온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선사시대부터 살았다고 하겠는데, 산천이 많고 깊어 인구는 많지 않으며,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겨 살았다.

   영월에서 문인이나 문학과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몇 차례의 현지 탐방과 자료들을 통하여 몇몇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단종 어제시 (端宗御製詩)


   단종의 어제시(御製詩)는 청령포에 있는 어가(御家)에 걸려 있다. 5언 8구 40자의 한시인데, 유배 당시의 삶과 심정을 담고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애절하게 한다.

   단종(1441~1457)은 세종의 손자요 문종의 외아들이다. 문종이 승하하여 1452년 5월 14일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 1455년 윤6월 11일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1456년 사육신의 일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6월 28일에 청령포에 유배된다. 2개월 정도 지내다가 홍수로 읍내 관풍헌으로 옮기고, 1457년 10월 24일에 단종은 17살의 나이로 죽임을 당했다.

   청령포(淸泠浦)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있다. 영월읍에서 3㎞쯤 된다. 3면이 남한강 지류인 서강(西江)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66봉의 험한 산이다. 강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청령포를 원을 그리며 흐른다. 나룻배가 아니고서는 청령포를 드나들 수가 없다.

   청령포의 어가는 1999년에 강원도에서 건립한 것인데, 팔각지붕에 전면 6칸 측면 3칸의 기와집이다. 동쪽의 뒤쪽 방에는 단종이 경상 앞에 앉아 있는데, 그 앞 칸에는 선비가 엎드려 있고, 우측 마루에는 선비 한 사람이 서 있다. 서쪽의 방에는 시녀들과 이불, 옷가지들이 놓여 있다. 5칸의 초가도 어가를 향하여 동쪽에 세웠다.

   주변에는 청령포금표(淸泠浦禁標)와 유지비각[端廟在本府時遺址]이 있고, 단종이 걸터앉아 놀았다는 수령 600년의 관음송(觀音松)도 있다. 한양쪽을 바라보며 그리워했다는 노산대(魯山臺)와 잡돌로 쌓았다는 망향탑(望鄕塔)도 있다.

   단종의 어제시는 어가의 정면 중앙 처마 밑에 판액으로 걸려 있다.


      千秋長恨寃    천추의 한을 가슴에 품은 채

      寂寧荒山裡    적막한 영월땅 험한 산속에서

      萬古一孤魂    만고의 외로운 혼은 홀로 헤매는데

      蒼松繞舊園    울창한 솔은 정원을 둘러쌌네.

      嶺首三天老    높은 봉우리는 세 세상에 늙었고

      深流得石喧    깊은 물살도 돌에 부딪쳐 소란만하다.

      山深多虎豹    산은 깊고 맹수는 득실거리니

      不多掩柴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는다.


   이 시는 얼른 생각하면, 청령포 울창한 솔숲에 유배된 단종이 높은 산과 깊은 강물에 가로막히고 득실거리는 맹수들로 사립문을 일찍 닫아야 하는 외롭고 서글픈 삶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외로운 혼’은 단종 자신이다. 하지만, ‘울창한 솔’은 실제 소나무 숲이라기보다 유배시켜 못 나오게 하는 세력을, ‘높은 봉우리’는 산봉우리보다 ‘세 세상’(세종․문종․단종)을 이끌던 중신들로 지금은 ‘늙어’ 힘없음을 나타내며, ‘깊은 물살’은 강물로가 아니라 단종을 따랐던 많은 신하들로, 이들은 가로막고 방해하는 세력들인 ‘돌’들에 걸려서 ‘소란만 할’ 뿐인 것을 말한다. ‘산’도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단종의 처지를 의미하고, ‘맹수’도 산짐승보다는 단종을 해치려는 세력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처지가 더욱 악화되고 있음을 ‘저물다’로 은유하고, 따라서 ‘사립문을 닫는다’는 것은 자신을 지키고 싶은 심정의 표현으로 각각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어제시는 청령포의 지형적 특성을 살려 당시의 정세 변화 속에서의 단종의 삶과 심정까지 담고 있는 다중표현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단종의 어제시(御製詩)가 어가에 걸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단종에 대한 생각을 더욱 깊고 애절하게 만든다. 건물과 그 안에 진열된 가재도구나 인물 모형들에서보다 이 한 편의 시에서 더 큰 감회를 느끼는 것은 예술의 힘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크게 작용하며 감동을 주는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2. 왕방연 시조비(王邦衍時調碑)


   왕방연(王邦衍)의 시조비는 청령포의 선착장 주차장에서 제천 쪽으로 500미터쯤 떨어진 서강 강가 뚝길에 서 있다.

   시조비는 지대석 위에 직육면체의 화강암 장석으로 2단의 대석(臺石)을 만들고, 그 위에 거의 정육각형으로 가로가 약간 긴 비신석을 올려놓았다. 비신석 위에는 두 개의 직육면체 화강암을 맞대어 비갓을 삼고, 다시 그 위에다 이보다 더 큰 화강암 자연석으로 비제석을 올려놓았다. 비제석(碑題石)에는 두 줄의 한글로 “왕방연 시조비”라 파서 까맣게 칠해놓았다.

   비신석(碑身石) 앞쪽에는 사방이 약간 작은 사각의 오석(烏石)을 붙이고 그 위에다 왕방연의 시조를 가로로 하얗게 파서 새겨놓았다. 시조비의 주변에는 1미터 높이쯤의 쇠 울타리를 4각으로 쳐 놓았다. 주변 강가 언덕에는 뚝길을 따라 오래된 소나무들이 여러 그루 늘어서 있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다.

   왕방연은 세조때의 의금도사(義禁府都事)로, 단종의 사약을 호송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돌아가면서 강 건너로 청령포가 빤히 바라보이는 이 언덕에 주저앉아서 당시의 비통한 심정을 시조로 노래한 것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장릉지(莊陵誌)에 보면, 이 시조는 구전돼 오던 것을 1617년에 김지남(金止男)이 한시(漢詩)로 지었다고 한다.<千里遠遠道 美人離別秋 此心無所着 下馬臨川流 川流亦如我 嗚咽去不休> 한글로는 진본청구영언>(김천택, 1728)에 실려 있다.

   이 시조비는 충성과 임무 사이에서 고심했던 왕방연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단종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노래한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동북남 삼면을 U자형으로 강이 둘러싸고 서쪽은 험준한 산으로 가로막혀 유배지로서 천연의 조건을 갖춘 청령포의 지형과 단종 어가만 둘러보며 다만 심정적으로 단종을 동정 애도하고, 개중에는 풍광만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건너편 강뚝에 왕방연의 애달픈 시조비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가는 사람이 많다.

   왕방연의 시조비가 있는 강뚝에서 바라보이는 청령포의 경치는 매우 아름답다. 청령포 강가의 넓은 자갈밭과 백사장은 마치 흰 치마를 펼쳐놓은 듯하다. 서쪽의 깊은 물가에 솟아있는 절벽도 경치가 좋다. 또한, 청령포에서 쳐다보이는 강 건너 언덕의 시조비 부근의 경치도 절경이다. 하지만, 시조비에 얽힌 사연과 심정은 애달프기만 하다.


 3. 단종의 자규시(子規詩)와 자규사(子規詞)


   단종의 자규시(子規詩)는 자규사(子規詞)와 함께 장릉지(莊陵誌)에 실려 전한다. 둘 다 단종이 영월 자규루에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자규루는 관풍헌(觀風軒) 동쪽에 있는 2층으로 된 누각이다. 원래는 세종 13년(1431)에 군수 신권근이 창건하고 매죽루(梅竹樓)라고 했는데, 단종이 이곳에서 거처하며 자규시를 지어 자규루(子規樓)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관풍헌은 영월 읍내 한복판에 있는 조선 초기의 동헌이었다. 단층의 건물 세 채가 나란히 닿아 있는 붙임집인데,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그 뒤에는 영월중학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보덕사(報德寺)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관풍헌은 단종이 최후를 마친 곳이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금성대군의 죽음 소식에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했고, 장릉지에는 “세조 3년 10월 24일 유시에 복득(단종의 하인)이 활끈으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하였다”고 나온다. 전자든 후자든 애달픈 일이다.

   단종이 승하했으나 후환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거두지 않았는데,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밤중에 시신을 거두어 묻고는 피해 살았다. 중종 11년(1516)에 왕명으로 무덤을 찾아 12월 15일에 묘소의 형태를 갖추었다. 단종은 숙종 24년(1698) 11월 8일에 복위가 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장릉(莊陵)은 영월읍 영흥리 산 1087번지 동을지산 산등성이에 있다. 영월읍에서 제천 쪽으로 1.4㎞ 떨어진 곳이다. 비각 안 비석에는 “조선국단종대왕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 새겨져 있다. 1970년 5월 26일에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고, 해마다 한실날에 제사를 지냈는데, 1967년부터 향토문화제로 <단종제>가 거행되고 있다.

자규시와 자규사는 단종이 1456년 홍수로 청령포에서 관풍헌으로 옮겨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자규시(子規詩)


            一自寃禽出帝宮孤身隻影碧山中

假面夜夜眠無假窮恨年年恨不窮

聲斷曉岑殘月白血流春谷洛花紅

天聾尙未聞哀訴何奈愁人耳獨聽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외로운 몸과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나지 않네.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달빛만 흰데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사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가.


 자규사(子規詞)


            月白夜蜀魂啾含愁情依樓頭

爾啼悲我聞苦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苦榮人愼莫登春三月子規樓


            달 밝은 밤에 두견새 울 제

시름 못 잊어 누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네 울음소리 하도 슬퍼 듣기가 괴로운데

네 소리 없다 한들 내 시름도 없을손가.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밤이 오가고 해가 바뀌어도 끝나지 않는 한(恨과) 불면(不眠)의 괴로운 심정을 애달피 운다는 두견새보다도 더 애달파하고 있는 단종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김동인(金東仁)의 소설 <대수양(大首陽)>은 세조의 입장에서 다룬 것이고, 이광수(李光洙)의 <단동애사(端宗哀史)>는 단종에 초점을 맞춘 소설이다. 둘 다 같은 시대 동일한 변혁을 다루었지만, <대수양>보다 <단종애사>가 보다 인기와 애착을 받고 있는 것은 작품의 우열이 아닌 것 같다. 인간이 이루어낸 업적이나 결과보다는 무엇이 정의이고 진실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4. 조여 사적비(生六臣趙旅事跡碑)


   생육신 조여(趙旅) 선생의 사적비는 영월 읍내에서 청령포 가다가 외곽도로와 만나는 사거리를 지나며 바로 나오는 흰재 언덕에 있다. 여기서 고갯길을 내려가면 곧 청령포다.

   이 비는 1986년에 함안 조씨(咸安趙氏)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귀부와 비신과 이수를 갖추고 있는데, 비신만 오석(烏石)이고 귀부와 이수는 모두 화강암이다. 주변은 화강암을 다듬어서 네모지게 낮은 울타리를 설치해 놓았다.

   그런데, 이 비의 귀부는 거북이가 아니라 호랑이다. 연유가 전한다. 단종 승하의 소식을 듣고 함안에서 주야로 달려온 조여 선생이 밤중에 청령포에 당도하고 보니, 배가 없어 통곡하다가 헤엄쳐 건너려고 강물로 뛰어들려 하였다. 그때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옷을 물어 당겼다. 선생은 “내가 상감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하는데 네가 왜 나를 끌어당기느냐?” 하고 꾸짖다, 호랑이는 엎드려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그래서 호랑이를 타고 건너가 단종의 시신을 엄습해 놓고 다시 건너왔다고 한다.

   조여(趙旅, 1420~1489) 선생은 본관이 함안(咸安)이다.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단종 1년(1453)에 진사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촉망을 받았으나, 수양대군이 왕이 되자 벼슬을 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가 살았다.

   단종의 유배 소식을 듣고 한 달에 세 번씩 찾아와 문안을 드리고, 원호와 같이 초막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자 김시습과 충남 공주 동학사에서 단종 초혼의 제사를 올렸다.

   그 뒤에 고향인 함안에서 은거하다가, 성종 20년(1489)에 작고하였다. 숙종 24년(1698)에 이조참판에 추증 정려(旌閭)가 서고, 정조 5년(1781)에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 정절(貞節)이 내려졌다.

   숙종 29년(1703)에 선생의 묘우(廟宇)를 경남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舍村里)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세웠는데, 숙종 30년(1704)에는 확장하고 생육신 6분을 모두 제향하였다. 서산서원은 숙종 32년(1706)에 창건하였다. 지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은 정부 보조와 사림 및 후손들의 성금으로 1984년에 준공되었는데, 전면 5칸에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기와집이다.

 

 5. 생육신 원호(元昊)의 관란정(觀瀾亭)


   관란정은 영월군 서면 신천리와 제천시와의 경계인 서남쪽 절벽 위에 있는 정자다. 청령포로 흐르는 주천강 상류에 있으며, 생육신 원호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을 삼았다.

   단종이 1457년 6월 26일 청령포(淸泠浦)에 유배되자, 원호 선생은 그 상류인 영월군 서면 신평리 사내평(思乃坪)으로 가서 부인과 함께 밭을 가꾸며, 손수 지은 채소를 박통에 담아 강물에 띄워 청령포로 보내곤 했다. 또 선생은 강가의 절벽 위에 흙으로 대를 쌓고 나무로 정자를 지어 관란정(觀瀾亭)이라 이름하고, 날마다 정자에 올라가 단종이 계신 쪽을 바라보며 정성을 다하였다.

   사내평은 관란정 북쪽 아래의 강가 평지로 영월군에 속하고, 관란정은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長谷里, 옛 日谷里) 안골의 뒤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관란정은 정조 17년(1793)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의 것은 1941년에 세운 것이다. 전면과 측면이 다 2칸씩이다.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팔각지붕의 기와집이다. ‘관란정(觀瀾亭)’ 현판은 남쪽 우측 처마 밑에 걸려 있다. 현판 아래의 출입처 이외에는 사방을 다 낮은 나무 난간을 설치해 놓았다. 관란정은 충청북도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다.

   관란정과 관련된 글에는 홍량호(洪良浩)의 관란정유허비기, 홍직필(洪直弼)의 관란정기, 후손 원석홍(元錫洪)의 관란정비각중수기가 있고, 제영(題詠)으로는 이육(李陸)의 관란정제영과 임효헌(林孝憲)의 관란정제영(1)․(2) 등이 전한다.

   관란정에서 바라보면, 북동쪽을 ㄱ자로 흘러온 강물이 관란정 절벽 밑에서 ㄴ자로 꺾여 감돌아서 동쪽에서 다시 S자 모양으로 서쪽으로 굽어 흐른다.

   관란정 남쪽에 헌종 11년(1845)에 세운 비각이 있는데, 홍양호(洪良浩)가 비문을 지어 정조 17년(1793)에 세운 원호유허비(元昊遺墟碑)를 안치하고 있다.

   사람은 권력이나 돈이나 부귀영화 같은 것으로 존경받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바른 정신을 갖고 얼마나 올곧게 살았는가가 중요하다. 특히, 다양한 의견과 수많은 이견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살아야만 하는 오늘날에는 관란 (觀瀾) 선생과 같은 사람의 정신과 삶이 더욱 가치가 있고 훌륭한 지표(指標)가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가도 작품(作品)은 남고, 정신(精神)은 보이지 않으나 가슴속에 새겨져 오래 전한다. 원호 선생이 가신 지 50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선생의 충의(忠義)와 단심(丹心)은 우리의 정신 속에 새겨지고, 선생의 올곧은 삶은 우리들 가슴속에 파동치며, 선생의 작품은 우리들 마음 속에 남아 살아 있다.


 6. 원호(元昊) 선생 사당 모현사(慕賢祠)


   모현사(慕賢祠)는 생육신 원호(元昊) 선생의 사당이다.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3리에 있다. 수주에서 161번 군도로 법흥사 쪽으로 가다가 운학으로 향하는 175번 군도 갈림길을 지나서 수백 미터를 가면 무릉3리다. 모현사는 길의 우측으로 마을의 초입에 있다.

   모현사는 원래 숙종 25년(1699) 9월 15일에 묘사(廟祠)를 건립하고 연시각(延諡閣)이라 사액(賜額)하였다. 고종 때 대원군의 생질인 판서 심상원이 연시각을 참배하고 충신의 사당이니 ‘모현사’라 하는 것이 좋다며 현판을 써 주었다고 한다. 지금 모현사의 대문과 사당 건물의 현판은 다 ‘慕賢祠(모현사)’로 되어 있다.

   사당은 기와를 얹은 장방형의 담을 둘렀는데, 남쪽 중앙에는 3칸의 솟을대문이 있다. 사당 건물은 담 안 북쪽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다.

   모현사는 전면과 측면이 다 1칸인데 맞배지붕이다. 사당 안에는 단 위에 관란 선생의 상반신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위패는 ‘原州后人觀瀾元昊諡貞簡公之神位(원주후인관란원호시정간공지신위)’라 되어 있다. 매년 음력 3월 3일에 제향하고 있다.

   정문의 왼쪽 옆에는 1979년 2월에 영월향교의 전 전교 송순철(宋淳哲) 지은 <조선충신관란원선생신도비>가 서 있다.

   토실(土室)은 원호 선생이 살았던 토굴인데, 모현사에서 가까운 무릉3리 같은 마을에 있었다. 지금 토실 터에는 후손[元容星]이 살고 있다. 150여 년 전에 지은 이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행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되었다. 원호 선생은 세조 9년(1463) 10월 3일에 향년 68세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원호(1396~1463) 선생은 본관이 원주(原州)로,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觀瀾)․무항(霧巷), 시호(諡號)는 정간(貞簡)이다. 세종 5년(1423)에 문과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부윤을 지내고 문종 때는 집현전 직제학을 맡았다. 단종 즉위 후 정세를 보고 벼슬을 사직하고 원주 남송리에 와서 살았다.

   세조 3년(1457) 6월 26일에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영월의 서쪽인 서면 신천1리 사내평(思乃坪) 강가에 살며 박통에 과일과 채소 등을 담아 청령포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 옆 절벽 위에 나무로 관란정을 짓고 날마다 올라가 청령포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망배하며 살았다. 10월 24일 단종이 승하하자 선생은 이곳에 3년상을 지냈는데, 이때 한문소설 <원생몽유록>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주로 돌아와서는 무항리 산속으로 들어가 움막을 짓고 살면서, 앉으나 누우나 반드시 장릉(莊陵)이 있는 동쪽으로 향하고, 날마다 산봉우리에 올라가 영월쪽을 바라보며 지냈다. 그 산이 망왕봉(望王峰)으로 불리고 있다.

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세조 9년(1463)에 68세로 영월군 수주면 무릉3리 토실에서 졸하여,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내남송에 묻혔다. 봉분 앞의 묘갈은 숙종 39년(1713)에 세워졌는, 당시 영의정인 최석정(崔錫鼎)이 찬하고 글씨는 우의정 조상우(趙相愚)가 썼다.

   숙종 25년(1699)에는 선생이 살던 송림에 정려(旌閭)가 서고 신협(申日夾)이 비문을 지은 정충비(旌忠碑)가 세워졌다. 비각인 정충각(旌忠閣)도 뒤에 건립되었는데, 지금의 것은 1970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정조 8년(1784)에 이조판서 겸 지경연(知經筵) 및 양관(兩館)의 대제학에 증직되고, 시호 정간(貞簡)이 내려졌다. 1997년에는 원주 치악예술관 정원에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 주관으로 <생육신관란원호선생문학비(生六臣觀瀾元昊先生文學碑)>가 세워졌다.

   선생이 벼슬을 사직한 것도 당시 시세(時勢)와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충의(忠義)를 지키기 위함이었고, 물러나 고향에 살면서도 아무나 만나지 않고 주로 절의(節義)의 인사들과 교유하며 지낸 것도 충의를 실천한 것이다. 이러한 삶과 정신의 그의 작품 탄세사(歎世詞)에도 잘 담겨 있다.


            탄세사(歎世詞)


            瞻彼東岡松葉蒼蒼采之擣之療我飢膓

目渺渺兮天一方懷黯黯兮雲五光

嗟夷齊邈焉寡儔兮空摘翠於首陽

世皆忘義徇祿兮我獨潔身而徜徉


            멀리 동쪽 언덕 바라보니 소나무 잎새가 파랗구나.

솔잎이나마 따다 찧어서 주린 창자나 요기해 볼까.

눈은 가물가물 하늘 끝 가이없는데

마음은 어둑침침 하늘을 덮었도다.

아, 이제(夷齊)는 멀어져 견줄 이 없고

수양산 고사리 캐던 일 헛되기만 하다.

사람들이 의(義)를 저버리고 녹(祿)만 좇으니

나홀로 깨끗이해 보나 방황만 되네.


   이 탄세사는 집현전에 근무할 때 문학(文學)과 성망(聲望)이 퍼졌는데, 단종이 등극한 뒤 왕자들의 세력이 강성해져 인심이 흉흉해지자 지은 것이라고 한다. ‘我獨潔身’은 관란유고에는 누락되어 있는데, 원주의 한학자 김교희(金敎熙) 선생이 김일손(金馹孫)의 문집 <탁영집(濯纓集)>에서 찾아내어 이에 보완하였다.

   원호 선생은 탄세사의 내용처럼, 세상이 의로움을 저버리고 봉록(俸祿)만 쫓아다니는 속에서 선생은 홀로라도 의롭게 살고자 벼슬을 사직한 것이다. 고향에 와서도 가까운 지역을 다니며 절의(節義)의 인사들과 교유하며 지냈다.


 7. 수주면의 치악산제명록


   치악산제명록(雉岳山題名錄)은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요선정 건너편 암벽에 새겨져 있다. 관란(觀瀾) 원호(元昊)․어계(漁溪) 조여(趙旅) 두 생육신과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 세 분의 성명 순으로 새겨져 있는데, 호는 성명 아래에 들어 있다. “景泰 年 三月旣望”으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세 분이 교유하면서 경태 연간(景泰, 1450~1456)에 치악산에 올라 단종의 성수(聖壽)를 빌고 이곳 강가 석벽에 새겨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1987년에 무릉~운학의 도로 개설로 파괴되자, 1990년 6월에 영월 충절현창회에서 원위치의 서남방 100보 가량 되는 지금의 자리에 새로 복원해 놓았다.

 

8. 요선정(邀僊亭)의 어제시(御製詩)


   요선정은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있는 절벽 위의 정자이다. 수주에서 161번 군도로 가다가 운학으로 향하는 175번 군도로 들어서서 300미터쯤 가면 법흥사 쪽에서 흘러오는 개울에 요선교가 놓여있다. 이 다리 직전에서 좌회전하면 강가에 우뚝한 작은 봉우리가 보이는데 300미터쯤 들어가면 미륵암 입구가 된다. 입구에서 산길을 100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면 꼭대기에 요선정과 함께 마애여래좌상이 나타난다. 좌불 앞에는 작은 3층 석탑이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었다.

   마애여래좌상은 요선정 옆에 막 떨어진 물방울 모양의 커다란 바위의 동쪽면에 부조되어 있다. 얼굴은 양각으로, 그 밖의 부분은 선각으로 음각된 좌상이다. 높이는 3.5m이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머리는 소발로 육계가 있다. 상체는 길고 원만하지만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하체는 상체에 비해 크게 조각되어 균형을 잃고 있다. 두 손은 가슴에 표현해 놓았는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펴서 손등을 보이고, 왼손은 오른손에 평행되게 들고 있다.

   광배는 두신광을 표현하고, 그 중 두광은 연꽃 무늬를 돋을새김하였고, 신광은 두 줄로 선각해 놓았다. 밑으로 연꽃 문양의 대좌가 있어 그 위에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균형을 잃고 있으나 힘찬 기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옆에 있는 청석탑과 함께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요선정은 지방 유지들이 1915년에 신축한 것이다. 전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이고, 8각지붕형 기와집이다. 마루에 얕은 난간을 설치하였다. 남쪽 처마에 한자로 ‘모성헌(慕聖軒)’ ‘요선정(邀仙亭)’ 두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좌불과 요선정 뒤는 60여 미터의 벼랑이다. 치악산 동쪽 계곡을 타고 온 주천강과 사자산 법흥사 계곡에서 흘러온 강물이 요선정 바로 북쪽 밑에서 합수하여 감싸며 서쪽으로 돌아나간다.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는 합수머리와 찻길과 산들이 어울려 진 풍경은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런 관계로 이곳은 명승지로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풍광을 즐긴다. 지금 요선정 정자 안쪽 처마의 사방에는 숙종․영조․정조의 어제시를 비롯하여 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와 글이 판액으로 가득 걸려 있다.

   조선 숙종이 24년(1698) 정월에 영월의 빙허․청허 양루시(憑虛淸虛兩樓詩) 한 수를 써서 당시 강원감사 심정보에게 내리니, 주천 현루인 청허루에 간직하였다. 청허루가 화재가 나서 어제시가 소실되었다. 영조가 청허루 중건 소식을 듣고 선왕인 숙종의 어제시를 손수 써서 보내어 걸게 했다. 뒤에 다시 시 한 편을 더 보내어 당시의 강원감사 임집에게 내리니 청허루에는 두 임금의 어제시가 봉안되게 되었다. 그 뒤 다시 정조가 청허루에 봉안된 두 선왕의 어제시를 소중히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경차주천현루소봉서(儆次酒泉縣樓所奉序)>를 지어 두 어제시와 함께 걸게 하였다.

   그 후 두 누각이 무너지고, 세 분의 어제시문 현판은 민가에서 보존하다가, 1913년에 요선정을 짓고 어제어필의 시문을 봉안하게 되었다. 현재 요선정에는 어제시문을 두 판액으로 봉안하고 있는데, 한 판액에 <숙종대왕 어제시>와 <영조대왕 어제어필시>를, 다른 한 판액에 정조대왕 친필 서문과 어제시를 담았다.

   요선정 아래 강바닥에는 물살에 패이고 깎여서 찻잔처럼 생긴 수십 개 갖가지 바윗돌과 널따란 암반들이 널려 있다. 그 중 한 반석에 요선암(邀僊岩)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조선의 명필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글씨라고 한다. 양사언은 평창 군수 시절에 이곳에 자주 찾아와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1982년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9. 김삿갓 시비 [金笠詩碑]


   김삿갓 김립의 시비는 영월읍 영흥리 금강공원 안에 있는 KBS방송국 아래쪽에 있다.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김립추념일붕시비>이고, 다른 하나는 <난고시비>이다.

   <추념시비>는 널따란 자연석을 기단석으로 하고, 그 위에 직사각 육면체의 화강암으로 대석을 놓았다. 그 위에 올린 비신석은 아래는 넓고 위는 좁은 육면체 기둥형인데, 사면을 다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전면의 3분의 2쯤의 높이에 돌을 파내고 가로로 된 오석(烏石)을 박고 그 위다 “金笠三甲追念一鵬詩碑”라고 새겨 넣었다. 비신석 상단에는 지름이 비신석의 가로 밑변보다 좀 더 긴 원반형 화강암비를 올려놓았는데, 전면에는 김립선생의 삼갑(三甲, 180년)을 추모하는 다음과 같은 일붕 서경보(徐京保) 선사의 추모시가 자필로 세로로 새겨져 있다.

天生金笠大先生 忠節之鄕一巨星

千里江湖皆浪跡 萬山花月總詩情

   이 추모시비는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1897년에 건립한 것이다.

   또 하나의 시비는 이 추모시비 바로 앞에 있다. 큰 자연석에 “放浪詩人金삿갓蘭皐詩碑”라 새겼는데, 이것은 지역 유지들이 건립해 놓은 것이다.

   한 사람의 시비가 여러 곳에 세워서 여러 개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같은 장소에 같은 분의 것이 두 개가 있는 경우는 없다. 더구나, 그것도 앞뒤로 나란히 세워서 결국 앞엣것이 뒤엣것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듯한 모습을 느끼게 한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추모와 존경보다는 도리어 안타깝게 하고, 시비를 세운 사람들까지 욕되게 하는 일이니, 하루속히 하나를 다른 곳으로 옮겼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김삿갓의 시는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금강산 시들은 당시에도 유명해서 베끼고 모방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我向靑山去綠水爾何來

나는 청산을 찾아가는데

푸른 물아, 너는 왜 흘러오느냐.


            松松柏柏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솔과 솔, 잣과 잣, 바위와 바위 사이를 돌아가니

물과 물, 산과 산이 곳곳마다 기기묘묘하구나.


            矗矗尖尖怪怪奇 人仙神佛共堪疑

平生詩爲金剛惜 及到金剛不敢詩

꼿꼿, 뾰족뾰족, 괴괴한 경개가 하도 기이하여

사람도 신선도 신령도 부처도 모두 놀라 의아해 한다.

내 평생의 소원이 금강산을 읊으려고 별러 왔으나

금강산을 대하고 보니 시는 못 쓰고 감탄만 하는구나.

   시비는 시인이나 시를 기념하는 비이다. 김삿갓의 시비가 여러 지역에 세워진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가 우리에게 남기고 우리에게 준 그의 삶과 작품이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0. 김삿갓 묘 [蘭皐 金笠 墓]


   김삿갓[金笠]으로 널리 알려진 김병연(金炳淵)의 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있다. 영월 읍내에서 동남쪽으로 난 595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998번 도로로 녹전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사이에 영월화력발전소․고씨동굴․와석재를 차례로 지난다. 하동면 와석리 입구 미사리어구 <김삿갓묘소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우측으로 난 좁은 계곡길을 4㎞쯤 가면 노루목이고, 묘소는 이곳에 있다.

   버스로는 영월읍내에서 녹전 방향 시내버스를 타고 옥동천을 끼고 돌다가 <김삿갓묘소입구>에서 내린다. 여기까지의 버스 편은 수시로 있지만, 묘소 입구에서 묘소까지는 버스가 없고, 도보로 1시간 정도 걸어야 한다.

   김삿갓의 묘는 보통 크기의 토분이다. 봉분 앞에는 반반하고 큼지막한 화강암 자연석 하나가 석상처럼 놓여 있다. 봉분 옆에는 높이가 90㎝ 정도 되는 화강암 묘비가 있는데, 비갓이 없는, 위만 둥글게 만든 납작한 직육면체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것이다. 묘비에는 <詩仙 蘭皐 金炳淵之墓>[시선 난고 김병연의 묘]라 새겨져 있다.

   묘소 주변은 넓고 평평한 언덕이고, 밭들이 펼쳐져 있다. 김삿갓의 묘는 1982년에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 씨의 노력으로 밝혀졌다. 자연석 상석이나 평범한 묘비나 다 풍류시인다운 운치와 맛을 느끼게 한다.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충청북도와 강원도로 나뉘어지는데, 유적비는 묘소 건너편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에 있다. 예서체로 <詩仙金삿갓蘭皐先生遺蹟碑>(시선김삿갓난고선생유적비)라 새겨놓았다.

   김병연은 차남 익균이 영월로 돌아가자는 여러 번의 간청을 끝까지 물리치고 계속 방랑하다가 57세 때 전라도 화순군 동복에서 죽었다. 둘째아들이 시신을 모셔와 이 노루목에 안장하였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다.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순조 7년(18078)에 아버지 김안근과 어머니 함평이씨(咸平李氏)의 둘째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5살 때인 순조 11년(1811)에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가산(嘉山) 군수 정시(鄭蓍)는 포로가 되어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했는데, 선천(宣川) 부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검산성(劍山城)으로 도망갔다가 바로 난군에게 항복하여 가담하였고, 난군이 관군에게 쫓길 때 난군의 참모 김창시(金昌始)의 목을 1천냥에 사서 자기가 벤 양으로 조정에 바쳐 공을 위장하였다. 뒤에 이런 일이 드러나서 김익순은 참형을 당하고, 비열한 인물로 세상에 빈축을 샀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이런 일을 철저하게 숨기고 영월로 이사하여 병연을 공부시켰고,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던 병연은 학업에 힘썼다.

   18세 때 김병연이 영월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 나갔는데, “정시 가산군수의 죽음을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를 규탄하라”는 시제(試題)에, “한번은 고사하고 만번 죽어 마땅하고 / 너의 치욕스러운 일은 동국의 역사에 유전하리라”라고 준엄하게 질타한 시로 장원을 하였다.

   곧 김익순이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김병연은 자책과 부끄러움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이고, 자신을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단죄하고, 하늘을 볼 면목이 없다며 삿갓을 쓰고는 전국을 방랑하며 일생을 보냈다. 조부에 대한 끝없는 참회와 속죄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저주와 자탄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꿰뚫어 보고 날카롭게 비판하였고, 가는 곳마다 탁월한 재능으로 위선과 권위를 풍자하였다. 자연경관보다는 항간의 일을, 양반 사대부보다는 서민들의 삶을 노래하였다. 시어(詩語)의 사용에도 거리낌이 없어, 더럽고 야한 말씨나 쌍소리와 속어․비어들까지도 가리지 않고 사용하였다. 형식과 격조도 따지지 않는 파격적인 시로 사람들의 원과 한을 씻어주고 가슴을 울렸다.

   한 세도가가 남의 선산에 딸의 묘를 썼다. 이 하소연을 들은 김삿갓이 “따님을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이에 눕혔으니, 할아버지 몫으로 할까요 아버지의 몫으로 할까요”라는 시를 써 주어서, 세도가가 두말 없이 딸의 묘를 옮겼다는 것이며, 그가 개성에 갔을 때 하룻밤 잠을 청하자 문을 닫아걸며 때감이 없어서 그런다는 주인에게 “고을 이름이 개성(開城)인데 어찌 문을 닫아걸고, 산 이름이 송악(松嶽)인데 어찌 땔감이 없다 하느냐“(邑名開城何閉門 山名松嶽豈無薪)라는 시를 써준 일화는 그의 삶과 재주를 쉽게 느끼게 한다. 바로 이러한 그의 삶과 작품이 지금까지도 그를 이해하고 추모하며, 널리 읽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1998년부터 10월에 김삿갓 묘역 주변에서 <김삿갓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이 문화제에서는 추모행사와 함께 문화행사와 부대행사가 치루어지는데, <김삿갓백일장>도 현지에서 열린다. 풍자와 해학에 가득한 난고 선생의 시풍과 그의 삶과 시대정신을 통하여 문화예술의 혼을 추모하고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하여 개최되고 있어, 해마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관람하고 있다. ☺

<신길우의 수필> 제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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