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어지느러미는 맹물에 푹 삶은 것 같았고 제비둥지는 야자를 윗부분을 자르고 야자안에 제비둥지를 넣고 야자수와 함께 익혔는데 숟가락으로 저으니 다 녹아 액체가 되었다.

제비둥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명조 때의 대 항해가 정화가 기원 1405 ~ 1433년에 7번 항행하였는데 그중 한차례 그의 선대가 항행하는 도중 큰 폭풍을 만나 할 수 없이 말라이군도의 한 무인도에 정착하였다. 이렇게 연 며칠 갇히어 있다니 먹을 것이 거의 떨어졌는데 바다의 한 벼랑에 허다한 백색의 제비둥지가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선원들을 시켜 그것을 뜯어다가 맹물에 푹 삶아서 허기를 채웠다. 며칠 후 선원들이 모두 혈색이 좋고 정신이 활기를 띠었다. 그리하여 정화는 돌아올 때에 이 제비둥지를 가지고 와서 명성조 주태(明成祖朱棣)에게 비치여 황제로 하여금 대단히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 두 가지 료리의 맛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컷던 것이었다. 황제음식이라니 당연히 특별이 맛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정작 먹어보니 그저 슴슴하다는 맛 외에 아무런 맛도 못 느꼈다. 우리가 먹을 줄 몰라서 그런가 아니면 본래 그런 맛인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황제음식을 먹어봤다는 점에서는 뿌듯하였지만 700원을 내고 별맛을 느끼지 못하고 먹었다는 점에서는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이다.
다음날(11월 1일) 오전 우리는 타이 5세황 티크행궁(五世皇柚木行宫)을 참관하였다. 티크(柚木)는 목재로 쓰는 나무이름이고 행궁(行宫)은 예전에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무르는 별궁(別宮)을 말한다.
행궁을 참관할 때에 관광객들이 주의 하여야 할 점들은 이곳도 대왕궁과 마찬가지로 옷 단장이 정결하여야 하며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하며 여성들이 짧은 치마를 입지 못하며 밖에서는 사진을 찍을수 있지만 안에서는 찍는 것이 엄금 되여 있었다.
티크행궁은 라마5세시기 1900년에 시작하여 지은 집으로서 원래는 세창도(世昌岛)에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이미 방코크시 교외로 옮겨 온 것이란다. 이 건물은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목조건축물로서 전부 티크나무구조로 된 행궁이다.

이 행궁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지고 있다. 5세 왕에게는 극히 총애를 하는 왕자가 있었는데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특별히 세창도에 한 채의 티크행궁을 지어 이 왕자로 하여금 병 치료를 하면서 휴양을 하게 하였다. 세창도의 그윽하고 우아한 환경에서 왕자의 병은 약을 쓰지 않고서도 나았다. 5세 왕은 너무 기뻐 왕자를 방코크로 데려왔는데 뜻밖에 얼마 안 가서 돌연적으로 사망하였다. 5세왕은 너무 상심하던 끝에 세창도의 티크행궁을 방코크로 옮겨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세창도에는 그 행궁유적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 티크행궁의 특점은 전부 티크나무를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못 한 개 박은 것이 없이 지은 것이고 건축풍격은 많이 구라파(유럽)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래도 타이의 전통풍격에 따라 지은 것이다. 티크나무는 특별히 기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고온과 비바람에 잘 견디고 이 나무의 기름은 벌레의 침습을 막는 작용도 하여 아주 좋은 건축재료로 쓰인다고 한다.
행궁내에는 백년전의 왕실의 귀중한 일용품과 장식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장식품과 가구들은 구라파(유럽)식으로 되여 있어 유람객들로 하여금 왕실의 화려한 생활을 료해 할수 있었다.
행궁내에는 5세왕이 사용하던 타이의 가장 일찍한 실내욕실, 가장 일찍한 타이문자 타자기, 타이 도자기, 구라파가구가 있었으며 인상이 가장 깊은 것은 대량의 거형의 상아와 상아제품 그리고 왕실사진들이었다. 그리고 피아노였는데 틀은 티크나무로 만들었고 건반은 백색의 건반은 상아로, 검은 색의 건반은 서우뿔로 만든 것이었는데 사람들을 경탄케 하였다.
5세 왕은 젊었을 때에 구라파유학을 하고 돌아오면서 민주정치와 구라파의 선진기술을 가지고 왔으며 재위 42년간에 노예제를 폐지하고 서방의 문화를 인입하였으며 교육위생개혁을 실행하여 타이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국부(国父)”로 불리웠다. 이 행궁은 지금 라마5세의 박물관으로 되였으며 관광명소로도 되고 있다.
행궁은 또 은기실(銀器室), 문서실, 왕의 취사방,왕의 방과 침실, 왕후의 방과 침실 등 30여 칸이 되였다. 안에는 역대 군왕의 사진과 생활용품들과 진귀한 예술품들이 있었고 5세 왕의 사무청과 침실의 일체 시설과 용품들이 그대로 놓여 있어 아주 참관가치가 있었지만 안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금지되어 한 장도 못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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