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산 시> 후유증 (외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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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산 시> 후유증 (외2수)
  • 박수산
  • 승인 2013.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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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산 시

물은 거슬러 오르기 힘들어
낮은 데로만 흐르려 한다.
그래서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다 수증기로 변해 산산이 흩어진다.

바람도 장애물을 만나면
요리조리 틈새를 찾아 빠져나가려 발버둥 치다나니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어 마지막에는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나무도 비옥한 땅에 심으면 살고
메마른 땅에 심으면
제 혼자 버둥거리다 말라 죽는다

항상 앞에는 반항조차 할 수 없는 벽이 가로막았던가?

내 꿈도
권력과 비리에 밀려
말도 못하고 쓰러졌다

그저 그때는 부모를 잘못 만난 내 팔자 탓이라 생각했다
내 꿈은 물 위에 뜬 거품이었다.

순종은 독재의 모체
반항이 없고 순종만 있어
독재는 비곗덩어리처럼 불어만나고.

끝없는 순종은
끝없는 독재를 키울 뿐이다

때로는 물도 바람도
벽을 만나면 솟구치고 날아오르는데
나는 아직 한 번도 날지도 못하고 솟구치지도 못했다


굳은살

앞마당 텃밭
노란 속살을 감싼 배추겉잎
따가운 햇살에 지쳤나
맥없이 축 처져 있다

마당 한구석
한때는 라면이 가득 담긴 박스
제 속을 다 비우고
납작하게 눌렸다

오늘도 철야작업 끝내고 집에 돌아와
발바닥의 굳은살을 손톱으로 뜯어낸다.

수십 년 동안 안전화는
내 발을 꽁꽁 묶어
비옥한 토양을 만들었나
뒤꿈치에 자라나는 굳은살
뜯어내도 끝없이 돋아난다.

그래도 이 굳은살이 있기에
허름한 전세방이라도 마련하고
다리 펴고 잘 수 있었다

텃밭 배추가 가을볕에 노랗게 영글면
감칠맛 나는 김치가 되고
축 처졌던 겉잎들은 끈에 묶여
구수한 시래기가 되겠지만,

마당에 박스가 차곡차곡 쌓이면
고물상에게 팔려가겠지만,

내가 늙어서 일을 못하면
자식들이 나를
발바닥의 굳은살처럼 여길까 왠지 두렵다

바람

먼지는 분명히 바람과 한 족속이다
바람이 불어오면
덤으로 올라 앉아
바람의 덩치를 한껏 부풀려준다

연기도 바람과 한 가족이다
하나로 뭉쳐 위로 솟구치다
바람을 만나면 등에 업혀 여기저기로 흩어져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시야를 가리며 얼른거린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냄새도 바람과 사촌이다
바람 따라 공간의 갈피갈피 숨어서 후각을 무디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불러오는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대니
필경은 바람의 노예다

그런데 나만 바람의 노예인 것 같지 않다
숱한 사람들도 갈피를 못 잡고
바람에 흔들거린다.

바람이 몇 번이나 왔다가 갔는데도
변한 것이 없다고 투덜대면서

지필문학 2013년 6월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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