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을 읽다
외 줄 하나에 몸을 감은 저 사내
알파벳의 간판 아래 현기증이 아찔하다
잘못 꾸어진 꿈들이 대서특필된
사건의 진상이 빼곡이 채워진 유리창
“생명보혐”이라는 제목을 달고 구름의 스케치와 먼지들의 결 진
광고가 인쇄된 기사는 옆 건물로 반사되어 복사되었다
빌딩과 빌딩 협곡 사이로 흐르는 사건의 전말은
12번가의 불개미와 전갈의 오래 묵은 눈싸움이 총성을 쏘았고
47번가의 알코올 중독 노숙 쥐가 옛 앵커맨이었다 는
바람이 단독 취재한 간밤의 특종이다
평화의 새 비둘기가 배설물로 인증을 찍었고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는데......
지우개의 부스럼처럼 사건의 줄거리가 흘러 내린다
허공에 의자 하나 걸쳐 앉은
사내는 자서전을 집필 중이다
독경을 외듯 잔잔한 리듬으로 옮겨가는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들숨과 날숨이 숨을 죽이고 롤러코스트를 타듯 이야기가 굴곡을 그릴 때마다
우리는 애 닳는 독자가 된다
찡그린 이마에 손을 짚고 읽어 내려가는 호기심으로 시작한
첫 장에서부터 발이 땅에 닿는 마지막 장까지
서커스의 곡예사와 번지점프의 희열이 타 들어가는
사내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였다.
스파이더맨의 영상을 재편집하는 어느 이국 아이가 서 있다
바람이 뒤척일 때마다 우리의 자서전이 위태롭다.
훌러싱교회 아카시나무
제13회 대상│장복자(복영미)(미국)
이민 1번지, 훌러싱교회
백 살 넘으신 아카시나무가 있다
닭장 아파트 6층 창문까지 넘실넘실 아카시향기 풍기는 나무는
그 키만큼 품도 넉넉하시다
교회에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신
군대시절 금성보다 빛나는 별이 두 개였다는 슈 리페어 박사장
몇 백 명 거느린 대기업 하청 부품공장을 운영했다는
스카이클리너 김 사장
남대문시장 골목 수북이 쌓은 속 옷 다이위에서 브래지어를 차고
골라골라 외쳤다는 델리가계 하사장
예배 마치고 하나님 품 보다 넓은 아카시나무 그늘에 둘러 앉아
과거와 현재를 늘였다 줄였다한다
지금은 내 이마처럼 구겨진 손님 셔츠나 펴고 있는 머슴이지
만 왕년에는…….
별 두 개씩이나 따서 어깨에 달아본 적 있는 눔 나와 보라구해
아카시 꽃처럼 살짝살짝 부풀린 이야기 주렁주렁 꾀고 있는 나무는
수천 개 귀를 팔랑거리며 즐겁게 들어주신다
어릴 적 아버지의 등인 양 온 몸을 우듬지에 기대고 있는 정 집사
허기를 채우려 한주먹씩 따먹던 아카시 꽃, 입 안 가득 군침이 돈다
3년 전 마련한 개나리 울타리 집 은행의 숏 세일로 넘어가고 역이민을
고민하는 최 집사
나무는 긴 손가락으로 그들의 머리칼 초록물 드린다
입 꾹 다물고 있던 팽 집사 자장면이나 먹으러가자며 팽하니 일어선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테이블을 돌리며 단무지와 양파에
식초를 뿌리던 마 집사
마 이렇다 저렇다 캐 사도 여가 맘 편 한기라
마누라한테 출근 한다 캐놓고 산이다 공원이다 양복 빼입고 헤매는
오십 줄의 백수들
달랑 두 식구에도 김치냉장고 들여놔야 체면이 서는
아파트 팽수가 인격 팽수가 되는 고국보다야
우리 모도 사장님 아이가
자장면 곱 베기 한 사발씩 시켜 묵고 쪼매만 견뎌 보재이
수타면처럼 쫄깃쫄깃하고 면 위에 듬뿍 얹은 소스처럼 진한 정을 비빈다
고추짬뽕 국물 보다 매운 땀 흘리며 뿌리 옮긴 삶
바람이 불 때마다 잎새는 흔들리나
뿌리는 깊어진다
오늘도 예배당 문을 나서는 박 장로 김 권사 하 집사…….
울며 쓰러지는 아직도 정정하신
아버지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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