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삼국사기 열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강수(强首)가 일찍이 부곡(釜谷)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野合, 婚前同寢)하였는데 서로 사이가 자못 좋았다.
나이 20살이 되었을 때, 부모가 중매를 통하여 고을의 용모와 덕행이 있는 여자와 혼인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강수가 사양하며 다시 장가들 수 없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성내며 말했다.
“너는 이름난 사람이어서 나라 사람이 모르는 이가 없는데,
미천한 자를 짝으로 삼는 것은 또한 수치스럽지 않겠는가?”
그러자, 강수가 두 번 절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 실행하지 않음이 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들으니,
‘가난할 때 함께 산 아내[糟糠之妻]는 내쫓지 않으며
미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한 즉,
비록 천하나 나를 도와 산 여인을 버릴 수 없습니다.”
‘강수’란 이름은 태종[무열왕]이 지어준 것이다.
태종이 즉위하였을 때, 당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詔書)를 전했는데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그를 불러 물었다. 강수는 한번 보고는 해석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늦게 만남을 한스럽게 여겼다.
왕이 이름을 묻자 “쇠머리[牛頭]”라 하니, “두골(頭骨)을 보니 강수(强首) 선생이라 불러야겠다.”고 하였다.
그 뒤 강수는 당나라와의 외교문서를 담당하여 훌륭하게 처리하여 왕이 더욱 가까이하며,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불렀다고 한다.
강수는 자신의 특이한 머리 생김새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러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했다. 머리가 커서 튀어나온 것이니 오히려 머리가 좋을 것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학문과 글짓기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리하여 벼슬길에 오른 뒤 문장가로 유명하게 되었다.
강수는 가난했으나 즐겁게 살고 있음을 알고, 왕이 해마다 조(租) 100섬을 주게 하였다.
문무왕도 강수가 당과 고구려, 백제 등과의 외교문서를 잘 처리한 공을 기려, 관등을 올리고 봉록을 200섬으로 늘려 주었다.
신문대왕 때 죽자, 나라에서 장사 비용으로 돈과 물품들을 많이 내려주었는데, 부인이 남은 것을 사사로이 쓰지 않고 모두 불사(佛事)에 바쳤다.
후에 식량이 궁핍해지자 부인이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대신이 이 사실을 알고 왕에게 청하여 조(租) 100섬을 주게 하였더니, 부인이 이렇게 말하며 끝내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저는 천한 사람입니다.
먹고 입는 것은 남편을 따랐으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음이 많았는데,
지금 홀로 되었으니 어찌 감히 후한 하사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출세하면 사귀던 여인을 버리고 권력이나 돈이 많은 집안의 사람과 결혼하고, 자신이 잘 되면 부인이 격에 맞지 않는다며 다른 여자를 사귀거나 때로는 아내를 버리기도 하는 남성들.
출세한 남편의 뒤에서 패물을 받고 재산을 늘이기에 혈안이 되기도 하는 부인들.
그런 세상에,
좋은 집안과의 혼인을 권함에 사귀고 있는 비천한 신분의 여인을 도리(道理)를 내세워 끝내 결혼한 강수.
국가에서 대준 남편 장례비 중 쓰고 남은 것 모두를 불사(佛事)에 바치고, 끼니도 어려워지자 국가에서 내린 미곡 100섬을 이미 은혜를 많이 입었고 이제 홀로 사는 처지로 소용할 게 없다며 받지 않은 강수의 부인.
그 지아비에 어울린 그 지어미이다.
결혼은 두 사람의 일이며, 사랑과 믿음이 바탕이다.
삶은 의로움이 기준이며 그것이 훌륭한 삶을 만든다.
어떠한 삶보다 어떻게 사는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문장으로는 강수”라는 삼국사기의 평보다도
의리와 성실로 바르고 떳떳하게 산 그와 그 부인의 삶이 오늘날에 더욱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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