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와 소설《토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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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와 소설《토지》-1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2.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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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우의 수필 247>

1. 박경리의 삶

     박경리는 1927년 10월 28일 경남 충무시 명정리에서 박수영의 장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박금이이다. 4살이 더 많은 여자와 결혼한 14세의 아버지는 18살에 박경리가 태어나자 바로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진주여고를 다닐 때 학비를 보내주지 않자 찾아갔다. “여자가 공부하면 뭣하냐. 시집가면 그만이지” 하는 말에 “아버지가 공부시켰어요? 그만두라 마라 할 수 있습니까?”하고 대들었다가 뺨을 맞았다. 

“나의 출생은 불합리했다. … 그것은 부모들의 관계에서 온 나의 견해였다.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어머니에 대하여 타인이라기보다 오히려 적의에 찬 감정으로 일관했다. 어찌하여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게 미워한 여인에게 나를 낳게 했는가 싶다.

어머니는 말하기를 산신에게 빌어 꿈에 흰 용을 보고 너를 낳았으니, 비록 여자일망정 너는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나는 그 이야기를 시시하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산신에게 증오하고 학대하던 남자의 자식을 낳게 해 주십사고 애원을 한 어머니를 경멸했었다. 그것은 사랑의 강요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은 내게다가 결코 남성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못 박아주고야 말았다.” <「반항 정신의 소산」, 현대문학사,『창작실기론』, 어문각, 1962년

   이 일로 박경리는 1년 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憎惡)와, 어머니에 대한 경멸(輕蔑)과 연민(憐憫)의 감정 속에서 괴로워하며 고독하게 살았다. 그리고 “독서와 시 쓰는 일에 매달렸다”, “아궁이며, 이불 속이며 노트를 감추어 가면서 매일매일 일기같이 시를 썼다”, “시는 위안”이었으며,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여 살아남았고, 희망을 잃지 않게”해 주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행복하였더라면 아마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946년 20살에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인천 전매국에 근무하던 김행도를 만나 결혼하였다. 이듬해에 딸 김영주를 낳았다. 1949년에 서울 흑석동으로 이주하고, 다음해에 황해도 연안여중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남편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되고, 1950년 6․25때 월북하여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해에 갓 낳은 아들도 죽었다.

   박경리는 3살짜리 어린 딸을 기르며, 평화신문과 서울신문의 문화부 기자로 살았다. 기자가 적어서 취재부터 교정까지 혼자서 해야 했다. 격무에 시달리다가 1년 뒤에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집에 틀어박혀 다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6․25사변은 박경리에게 큰 충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고, 단란했던 가정은 맥없이 부숴지고 흩어졌다. 그런 체험은 자기의 출생부터의 개인적인 불행을 고민하며 살던 그를 크게 깨우쳐 주었다. 개개인의 삶이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사회와 역사와 서로 얽혀 있음을 절감하게 하였다.

   박경리는 김동리의 추천으로 1955년 8월에「계산(計算)」, 다음해 8월에「흑흑백백(黑黑白白)」으로 <현대문학>에 추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창작에만 힘썼다. 자신의 불행한 조건은 자기의 운명 때문만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과 사회 구조와 관련됨을 깨닫고, 그것을 삶의 문제에 확대시켜서 작품화하였다.

   1957년에는 단편「전도」「불신시대」「영주와 고양이」를 발표하고, 이 해에「불신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1959년에는 장편「표류도」를 현대문학(2~11월호)에 연재했는데, 이 작품으로 제3회 내성문학상을 받았다. 1960년에 장편「내 마음은 호수」를 조선일보에, 「성녀와 마녀」를 여원에 연재하였다.

   4․19도 그의 문학에 또 하나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개인보다 우리를 중시하고, 자신보다 애국과 진리를 사랑하는 큰 물결은 그의 세상보기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개인적인 불행의 시원(始原)을 보다 넓고 깊은 곳에서 찾게 하고, 고통의 뿌리를 개인적인 것에서 떠나 우리의 것에서 찾게 하였다.

   단편에서 장편으로 중심이 옮겨진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장편 『김약국의 딸들』이 1962년에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되고, 1964년에는 「파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장편 『시장과 전장』을 현암사에서 발간하였다. 1965년에 제2회 한국 여류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장편 「토지」는 43세 때인 1969년 9월에 제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하여 1972년 9월에 종료했다. 원래 『토지』는 지금처럼 방대한 대하소설로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얘기를 토대로 한 권 분량으로 써서 탈고까지 마친 후에야 세상에 공개하기로 작정했었다. 그래서 전화도, 신문도, 원고청탁도 일절 받지 않은 채 원고만 썼다. 그러나 어머니와 딸의 생계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한 것이다. 1972년에 『토지』제1부로 제7회 월탄문학상을 받았다.

   『토지』 제2부는 1972년 10월에 문학사상에 연재를 시작하여 1975년 10월에 마쳤다. 1974년에 『토지』제2부가 삼성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당시 딸의 남편인 김지하 시인은 독재를 규탄하는 항쟁시로 투옥되었고, 1975년에 무기징역을 받았다. 박경리 자신도 암을 앓아서 제2부는 심신이 매우 고통스런 속에서 썼다고 한다.

   『토지』 제3부는 1977년 1월부터 6월까지 독서생활과 한국문학에 연재되었다. 1978년에는 주부생활에 연재하고, 1979년에 완결되어, 1980년에 『토지』제3부를 삼성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박경리는 1980년에 사위 김지하의 옥바라지로 딸 가족과 함께 서울 정릉에서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토지』의 완결을 위해 두문불출하고 지필에만 매달렸다. “원주로 내려온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떠한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서 남은 불길을 태워보겠다는 내 문학적 소망이었다”(경향신문 83.12.2.)는 말처럼, 구설을 들으면서까지 기자나 친지의 방문도 거절하며 창작에만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제4부를 1983년 7월부터 12월에 정경문화에 연재하였다. 1988년에 『토지』1.2.3.4부를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토지』 제5부는 1991년 11월부터 문화일보에 연재를 시작하여, 68세 때인 1994년 8월 15일에 전16권으로 원주시 단구동 옛집(현 토지문학공원)에서 완료되었다. 40대부터 60대까지 집필 기간 25년에 원고지 4만장 분량의 대하소설을 완성한 것이다.

『토지』1.2.3.4.5부는 전체가 솔출판사에서 완간하였다. 『토지』는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학대표선집으로 지정되었다. 『토지』는 2002년 1월 1일에 나남출판사에서 전21권으로 발행하였다.

   그러므로 「토지」는 필생의 작업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작가 박경리의 삶과 정신의 집결체(集結體)이며 박경리 문학의 종합(綜合)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불행과 고난 속에서 살았기에 「토지」같은 대작을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삶을 통하여 그는 시대를 꿰뚫어보고 인간을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박경리는 이 방대한 「토지」를 쓰기 전에 몇몇의 습작도 하였다. “이제부터 나는 써야 할 작품이 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의 것을 모두 습작이라 한다. 그것을 쓰기 위해 나는 이삼년을 기다려야 할까 보다”고 밝힌 바 있다. (「창작의 주변」, 수필집 『Q씨에게』 1966)

   실제로 「약으로도 못 고치는 병」(월간문학 1968년 11월호)은 「토지」1부 2편 4장의 것과 대부분이 같은 내용이다. 강청댁에게 행패를 당한 뒤 월선이 주막을 떠나고, 이에 용이가 상사병이 난 사건이 중심인 이 단편소설은 1970년 5월호에 <현대문학>에 게재된 「토지」9회 연재분보다 더 밀도가 있는 구성일 뿐 거의 동일하다. 「김약국의 딸들」과「시장과 전장」도 습작으로 먼저 씌어진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지금 『토지』제4부와 제5부로 완성한 원주시 단구동 집은 《토지문학공원》으로 보존되었다. 1997년에 개발구역으로 헐리게 되자, 문화계와 지역인사들이 나서고 토지개발공사가 협조하여 3천평의 《토지문학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여기에는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집필하던 큼지막한 앉은뱅이 책상을 비롯하여 쓰던 여러 가구와 공간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집 주변에는 『토지』의 작품무대인 경남 하동의 평사리 마당, 홍이동산, 섬진강, 그리고 용정을 상징하는 용두레벌 등이 설비되어 있다.

   박경리는 1994년에 서울 유네스코협회의󰡒그해의 인물󰡓로 선정되고, 1995년에는 69세의 나이로 연세대 원주캠퍼스 국문학과 객원교수가 되었다. 70세가 되던 1996년 5월에 옛집과 땅의 보상금과 100만권 이상 팔린 『토지』 판매 이익금으로 《토지문화재단》을 창립하였다. 1997년에는 연세대 용재 석좌교수가 되고, (사단법인)토지문화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토지문화관》은 작가와 예술가, 지성인들의 토론장과 신진 작가 양성을 위한 창작 공간 제공을 목표로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건립하여 1999년에 개관하였다. 박경리는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570번지 토지문화관 옆에 따로 세운 별채에서 살았다.

   박경리는 2008년 5월 5일 작고하여, 고향인 경상남도 통영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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