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윤봉길 의사의 생애 (1908.6.21.~1932.12.19.)
윤봉길 의사는 본명이 윤우의(尹禹儀)이다.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에서 아버지 윤황(尹墴)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의 5남 2녀 중 첫 아이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파평(坡平)인데 고려의 명장 윤관(尹瓘)의 후손이다.
큰아버지 윤경(尹坰)에게 글을 배우고, 1918년에 덕산보통학교(德山)에 입학했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자퇴를 하고,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했다. 1921년에 유학자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경서와 시문을 공부했다.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하였다. 1923년에 오치서숙 춘추시회에서 장원을 하고, 1928년에 시집《오추 嗚推》《옥수 玉睡》《임추 壬椎》등을 발간했다. 오치서숙을 수료하며 스승에게서 매헌(梅軒)이라는 호를 받았다.
청년시절에는 농민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6년부터 농촌 계몽활동에 힘썼는데, 1927년에는 3권의《농민독본》을 저술하고, 독서회와 야학을 열어 청소년들을 교육했다. 1928년 2월 5일에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펴고, 월진회(月進會, 1929.4.23.)와 수암체육회(修巖)․위친계(爲親契, 1929.2.22.)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에 헌신했다.
1929년 음력 정초인 2월 10일부터 다음해 1월 19일까지 쓴 기사일기(己巳日記)는 보물 568호로 지정되었다. 2월 28일 부흥원 낙성을 기념하여 촌극〈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여 격찬을 받자, 일제 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1930년 3월 6일 23세 때,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니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라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가려고 집을 떠났다. 열차에서 일본 경찰의 검문으로 평안도 선천(宣川)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고 풀려나, 바로 만주로 가서 대련(大連)과 청도(靑島)에서 잠시 지냈다.

“… 두 주먹으로 방바닥을 두드려 가며 혼자 항상 부르짖기를,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이상은 무엇이냐? 목적의 성공자이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가 맺는다. 만물주 되는 나도 이상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하였다. 그리고 우리 청년 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었다.’…”
중국 청도(靑島)에서 어머니한테 보낸 편지 중의 일부이다. 국가를 위해 세월과 고국 강산과 부모 처자식도 버리고 떠난 강한 의지와 결심이 담겨 있다.
윤 의사는 1931년 6월 23일(음력 5월 8일) 상해에 도착하여 프랑스 조계지인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의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숙소를 정했다. 교포 사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중국채품공사에 직공으로 일했다. 김구(金九) 선생을 가끔 만나다가, 11월에 이봉창 의사의 파견과 폭탄 제공 사실을 들었다.
당시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차지하고,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을 일으켜 중국 본토 침략을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 선생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비밀리에 결성하고, 요인 암살과 시설 폭파 등 혁명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일왕을 폭사시키고자 이봉창을 동경에 보냈으나 1932년 1월 8일 거사가 실패했다.
윤 의사는 1932년 3월 중순에 공장을 그만두고, 일본인이 많은 홍구에 소채업을 개업했다. 4월 15일에 윤 의사는 교민단장 이유필과 함께, 4월 24일에 홍구공원에서 열릴 일본군의 군인칙유50주년 기념식에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4월 20일 소채상을 폐업했다. 그러나 이유필이 폭탄을 준비하지 못하여 포기했다.
그런데 그날 일본군의 천장절 기념행사를 4월 29일에 거행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이봉창 의사에게 폭탄을 마련해 준 김구 선생을 찾아가 거사 의지를 밝혔다. 윤 의사는 4월 26일 김구 단장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윤 의사는 4월 27일 선서식을 거행하고 홍구공원을 답사한 뒤, 거처를 동방공우(東方公寓)로 이전하고, 거기서 김구 선생의 요청으로 이력서와 두 아들 및 조국의 청년들에게 남기는 유촉(遺囑)을 썼다. 김구 선생과 김해산(金海山)의 집으로 가서 폭탄 실물을 보며 사용법을 익혔다. 4월 28일 YMCA 회관에서 김구 선생과 점심을 함께하고, 오후 5시까지 홍구공원을 답사한 뒤, 이유필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4월 20일 김해산의 집으로 가서 김구 선생과 아침을 먹고, 오전 8시 가까이에 홍구공원에 무사히 입장하고, 11시 50분경에 거사를 결행했다.
“처처(萋萋)한 방초(芳草)여.
명년에 춘색(春色)이 이르거든
왕손(王孫)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청청(靑靑)한 방초(芳草)여.
명년에 춘색(春色)이 이르거든
고려(高麗) 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芳草)여.
금년 4월 29일에
방포일성(放砲一聲)으로 맹세하세.“
거사 전에 홍구공원을 미리 둘러보고 쓴 시이다. 조선 해방을 기원하며 29일에 함께 이루자고 다짐하는 뜻을 읊었다. 한결같은 애국의 의지가 시종 일관하고 있다.
윤 의사가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시 형무소에서 순국한 당시 유가족으로는,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동생 윤성의(尹聖儀)과 윤남의(尹南儀, 1915~2003), 부인 배용순(1907~1988), 장남 윤종(尹淙, 1929~1984), 차남 윤담(尹淡)이 있었다.

2. 윤봉길 의사 추모 활동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바로 윤봉길 의사의 유골을 봉환하려는 모임이 있었고, 11월에 김구 선생이 환국한 뒤에 유해봉환을 임정이 주관하기로 하였다.
1947년 12월 21일에 월진회를 재건하고, 다음해에 예산에서 매헌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가 발족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와해되었다가 휴전 후에 다시 조직되었다.
1965년 6월 29일 광복회 회의실에서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확대강화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1967년에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충의사(忠義祠)를 건립하였다. 1972년부터 매년 4월 29일에 덕산에서 <매헌문화제>가 열리고, 1982년부터는 배용순 효부상이 시상되고 있다.
(1) 충의사 (忠義祠)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충의사는 예산에서 서북쪽으로 23㎞쯤에 있다. 1975년에 윤봉길 의사 동상이 건립되고, 1978년에 사당과 삼문을 증축하였다. 1985년에 생가에 매헌악강유허비(梅軒嶽降遺墟碑)가, 2000년에 매헌 어록탑(語錄塔)이 세워지고, 2001년에는 충의사 경내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유물관의 유품(12종 26점)은 1972년에, 개인 소유(윤주)의 유품(18종 32점)은 1976년에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었고, 광현당․저한당․부흥원 및 충의사 경역은 1972년에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충의사는 본전 지역, 기념관 지역, 성장가 지역, 생가 지역의 4개 구역으로 나뉜다. 본전 지역에는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의사기념관, 어록탑, 보부상 전시관이 있으며, 성장가 지역은 윤봉길 의사가 4세 때부터 살던 망명전, 1911년 봄부터 1930년 봄 망명길에 오를 때까지 살았고 1972년 8월까지 유족이 살았던 저한당(抯韓堂), 매헌악강유허비, 의거기념탑, 윤봉길의사 동상이 있다. 생가 지역은 생가인 광현당(光顯堂), 농촌부흥운동을 하던 부흥원 등이 있다.
(2) 매헌기념관 (윤봉길 의사 기념관) ― 서울 서초구 양재시민의숲
매헌기념관(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1987년 윤 의사 의거 55주년을 기념하여 국민의 성금으로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시민의숲’에 세워, 1988년 12월 1일에 개관되었다.
1층 유물전시실에는 윤봉길 의사의 생애를 수학기, 농민운동기, 상하이의거기로 구분하여, 친필《명심보감》, 서책류와 문방구류, 저서《기사년일기(己巳年日記)》《월진회 창립취지서》《농민독본》, 의거 당시의 소지품류, 1962년에 추서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층의 독립운동사진 전시실에는 독립운동 관련 사진 120여 점과, 의병전쟁, 3·1운동, 임시정부 활동, 독립군 전쟁, 의열 투쟁, 광복군 활동 등의 주제별로 구분하여 전시되어 있다. 영상실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전기 및 교육용 VTR과 영화 필름을 상영한다.
기념관 앞에는 윤봉길 의사 의거 60주년을 맞아 1992년에 세운 높이 9.2m의 윤봉길 의사상과 높이 2.14m의 윤봉길 의사 숭모비가 있다. 지하철 ‘양재시민의숲’ 역에서 가까운데, 부역명은 ‘매헌역’이다.
이 밖에, 천안 독립기념관에 윤 의사 동상과 어록비가 있고, 대전 공설운동장에 윤 의사 동상이 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윤 의사 흉상이 있고, 농협중앙회관에 윤 의사 농민운동기념비가 있다.
상해 루쉰공원(옛 홍구공원)에는 1994년에 건립한 2층으로 된 기념정자 매정(梅亭)이 있고, 매정 안에 자료전시관과 2003년에 안치한 윤 의사 흉상이 있다. 그 옆에는 1998년에 의거 일자를 넣어 세운 ‘윤봉길의거현장’ 표석과 윤봉길 의사의 사적을 간략하게 소개한 ‘윤봉길생평사적간개(尹奉吉生平事迹簡介)’ 비석이 있다.
일본 가나자와 순국지에는 순국기념비와 1992년에 세운 암장지적비가 있다.

10대 때부터 농촌부흥운동과 청소년 교육에 힘쓰고, 23살에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집을 나선 청년 윤봉길.
젊은 세월과 조국 강산과 부모 처자식을 버리고서라도 국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열사 윤봉길.
마침내 상해 홍구공원에서 의로운 포탄으로, 대한의 독립과 인류 평화를 만방에 진동시키며 깨우쳐 준 매헌 윤봉길 의사.
만 25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생애였으나 천추에 빛나는 삶을 살았다. 이 어찌 감격하고 본받지 않을런가. 만민의 스승이요, 만대의 충의(忠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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