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 1932년 4월 29일 11시 50분
중국 상하이(上海)의 홍커우(虹口)공원
“콰아앙――”
윤봉길 의사가 던진 물통 폭탄이 터졌다.
폭음은 천지를 진동시키고
단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행사장은 일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전승기념식장이 일거에 의거장이 되었다.
순간 일본 군경이 윤 의사의 몸을 덮쳤다.
단상의 일본 고관들은 혼비백산하였다.
상해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
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가 죽었다.
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
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공사 시게미쓰(重光葵)는 중상을 입었다.
총영사 무라이, 토모노 등도 부상을 당했다.
당시 홍구공원 안 행사장에는 한 길 높이의 중앙 식단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일본인, 학생과 일반 관중 등 2만여 명이 있었다. 일왕 생일날인 천장절과 상해점령 승전 축하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윤 의사는 후면 오른쪽으로 들어가 기회를 엿보다가, 일본 국가 연주가 끝날 무렵에 식단 쪽으로 달려 나가 단상 중앙으로 폭탄을 투척하여 폭발시켰다.
당시 국민당 총통 장제스(蔣介石)는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사실을 전해 듣고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그 동안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장제스는 이때부터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기 시작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 총통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하게 한 것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연유가 있다고 하였다.
독립운동가 장건상도 이렇게 말했다.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는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개석이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 푼도 도우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
윤 의사는 의거의 동기를 묻는 수사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 피폐(疲弊)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물론이고 각 민족이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상하이에서의 윤봉길 폭탄사건 전말」에 적혀 있는 말이다. 1932년(소화 7년) 7월 일본 내무성 보안과가 헌병대의 조서를 바탕으로 재작성한 것이다.
윤 의사는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될 것을 굳게 믿었다. 그래서 하루속히 일본이 멸망되게 하려고 의거한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윤 의사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 확실하였고, 자신의 의거 목표와 신념이 뚜렷했다. 이 진술이 있은 뒤 7년 뒤인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13년 뒤인 1945년에 윤 의사의 예측대로 일본은 패망하고 우리는 광복이 되었다
윤 의사의 상해의거는 다음과 같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상해 승전을 계기로 중국 내륙까지 침탈하려는 일본의 의지를 크게 위축시켰다.
둘째, 만주와 상해에서 연패하여 위축된 중국인들에게 항일 의지와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셋째,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한중 연대 투쟁을 강화시켰다.
넷째,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지지와 지원을 이끌어내어 독립운동이 활성화 되었다.
다섯째, 한국인들에게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를 펴 해이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여섯째, 국제적으로 한국인의 강한 독립의지를 인식시켜 장차 독립을 지지하게 하였다.
한 마디로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는 한국의 독립은 물론, 동아시아의 정세를 바꾸게 하고 세계의 여론을 불러 일으켜, 일본제국주의의 몰락을 가져오게 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2. 상해의거의 준비와 거사
상해 홍커우(虹口)공원 의거가 있기 전,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은 일본 왕을 폭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1932년 1월 8일에 일본 동경에서 일본 왕에게 폭탄을 투척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1월 28일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빌미로 상해사변을 일으켜 시라카와 대장의 일본군이 승리하여 상해를 점령하였다.
4월 15일 윤 의사는, 일본군의 군인칙유50주년 기념식을 4월 24일에 홍커우공원에서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유필과 폭파 계획을 세웠다. 4월 20일 소채상을 정리하고, 홍커우공원을 답사하며 계획을 추진했으나, 24일까지 이유필이 폭탄을 준비하지 못하여 포기했다.
그런데 그날 윤 의사는 일본군의 천장절(天長節) 행사를 4월 29일 역시 홍커우공원에서 거행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이봉창 의사에게 폭탄을 마련해 준 김구 선생을 찾아가 거사 의지를 밝혔다. 이에 김구 선생은 임정 요인들과 협의하여 윤봉길이 포탄을 투척하기로 결정하였다.
2005년 12월 18일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가 순국 73주기를 맞아 공개한 유언 친필 사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윤 의사는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에 공원을 사전 답사하고, 숙소인 동방공우(東方公寓)에 돌아와 오후 6시 반부터 백범 김구 선생의 요청에 따라 2시간 반 동안 유언을 작성했다. 이 자리에서 윤 의사는 자필 이력서와 김구 단장에게 드리는 시, 홍구공원 사전답사 감상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시 등을 지었다.
이때 쓴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을 회복(回復)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중국을 침략하는 적(敵)의 장교(將校)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언인 윤봉길 / 한인애국단 앞“
윤 의사는, 자신의 일본 장교들을 도륙하는 행동이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뚜렷한 목표와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아들 종(淙)과 담(淡)에게 조선을 위하여 투사가 되라는 유언의 시를 남겼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나(김구)는 아침 6시쯤에 윤봉길과 함께 김해산(金海山)의 집에 가서 마지막 아침밥을 먹으면서 윤봉길의 기색을 유심히 살폈다. 윤봉길은 마치 농부가 아침 일찍 힘든 밭일을 나가기 위해 밥을 먹듯이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 윤 군은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나를 주며 내 시계와 상환하기를 요하면서, '자기 시계는 작일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의하여 6원을 주고 매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인즉 나에게는 1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주었다.
윤 군은 입장(入場)의 길을 떠나는데 자동차를 타면서 소지(所持) 금전을 꺼내어 나의 손에 들려준다. ‘왜 약간의 돈을 가지는데 무슨 방해가 있는가.’ ‘아닙니다. 자동차세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즈음에 자동차는 움직인다.
나는 목멘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 군은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자 자동차는 소리를 높이 지르고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을 향하고 질치(疾馳,달려가다)해 버렸다.“
폭탄은 물통형과 도시락형 두 개였다. 물통 폭탄은 알루미늄 물통 속에 폭탄을 넣고 물통 입구에 신관을 장치한 것으로, 가죽끈을 붙여 어깨에 걸메도록 하였고, 도시락 폭탄은 알루미늄 도시락에 폭탄을 넣고 구멍을 뚫어 발화용 끈을 내고 보자기로 싼 것이었다.
당시 홍커우공원 기념행사에는 일본측이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하게 하였었다. 그래서 폭탄을 위장하여 도시락형과 물통형으로 김구 선생이 상해 병공창 병기주임 김홍일(金弘一, 後日에 장군)의 주선으로 창장 송식표(宋式驫)에게 부탁하여 기사 왕백수(王伯修)가 제작한 것이다. 윤 의사는 물통을 메고 도시락을 든 모습으로 철통 같은 경비에도 무사히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행사장에는 일본인 1만명과 일본군 1만명, 각국 사절과 각계 초청자, 동원된 학생들과 일반인 등 2만여 명이 모였다. 중앙의 높다란 식단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일본 관민에 이어 학생들이 도열하고, 좌우에는 열병에 참가한 일본 군대가 있었다. 식단 뒤쪽에는 기마 헌병과 경비 병력이 호위하고 일반 군중들이 자리했다. 식단은 9자(2.7미터) 높이로 약 4평 정도였다.
행사는 11시에 관병식이 끝나고 잠시 휴식시간이 있었다. 외교관과 내빈들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서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이 이어졌다. 축하식은 11시 30분에 시작되어 개회사와 축사가 있은 뒤 국가 제창이 이어졌다. 윤 의사는 식단의 뒤 왼쪽 일반관람석에서 기회를 노리다가, 11시 50분경 일본 국가가 끝나갈 무렵에 식단 쪽으로 달려 나가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던졌다. 폭탄은 터지면서 굉음과 함께 천지를 진동시키고, 허연 연기가 퍼지면서 단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은 24개처에 파편을 맞아 5월 26일에 죽고, 가와바다 민단장은 창자 파열로 다음날 사망했다.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은 발목이 절단되고, 시게미쓰 공사는 다리를 절단 당했다.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고,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은 오른쪽 어깨에, 토모노(友野盛) 거류민단 서기장은 오른발과 엉덩이에 많은 파면이 박히는 중상이었다. 그 밖에 기자와 일본인 다수가 부상을 당했다. 실로 아비규환을 연상케 하였다. 이 내용들은 윤 의사의 판결서(判決書)에 적혀 있다.
윤 의사는 자폭하려고 땅에 놓았던 도시락 폭탄을 집는 순간 일본 군경들의 구타 폭행으로 쓰러지고, 곧 체포되어 헌병대로 끌려갔다. 의거 전말과 배후를 추궁하며 거듭되는 혹독한 고문과 심문에도 윤 의사는 일관되게 이유필과 함께 했다고 진술했을 뿐, 김구 선생이 진상을 발표하여 알려질 때까지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한인애국단장으로 5월 10일자 <상해실보(上海實報>에 「홍구공원 작탄(炸彈) 진상」의 글을 실어,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탄 투척과, 4월 29일 홍구공원 폭탄 투척의 의거 계획과 과정, 윤봉길 의사 약력, 한인애국단의 목적과 활동, 김구의 약력 등을 발표했다. 그런 뒤 발악적인 일제의 검거와 보복을 피하여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요인들은 13년간 활동했던 상해를 떠났다. 김구는 1932년 12월 1일 중문(中文)으로, 홍구공원 의거의 전말과 의의 및 관련 자료들을 실어 『도왜일기(屠倭日記)』를 발간하였다.
윤 의사는 1932년 5월 25일 상해파견군 일본 군법회의에서 ‘살인 및 살인미수 폭발물위반’의 죄명으로 단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1월 18일 일제 군함 대양환으로 후송되어 20일에 일본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에 현재의 가나자와시 교외 이시카와현(石川縣) 우지가와무라(內川村字) 미고우지(三小牛地) 가나자와 육군작업장 관내 서북쪽 산골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25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천추에 빛나는 영광의 삶을 살았다.
시신은 가나자와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 북쪽 길바닥에 평장으로 암매장되었다.
윤 의사의 유해는 1946년 3월 2일부터 유해발굴단(단장 徐相漢)의 노력으로 3월 6일에 찾아내어, 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의사와 함께, 삼의사 국민장(三義士國民葬)으로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46년 6월 30일 안장 계획이 폭우로 인하여 7월 7일에 10만여 명의 인파가 참석한 가운데 엄수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이었다.
정부는 윤 의사에게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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