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월트 디즈니는 현대 미국문화의 아이콘이자 미국문화를 창조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만화영화, 에니메이션, 텔레비전, 비디오, 음악, 케릭터 산업, 출판, 유통, 테마공원, 호텔, 외식산업 등 현대 산업의 많은 부분을 개척하며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공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월트는 교회 목수로 일하는 아버지의 4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여러 번 이사를 다녔다. 아버지의 강요로 9살 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월급을 주면서도 월트에게는 먹여 주고 재워 주니 준 셈이라며 주지 않았다.
월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는데, 7살 때 그림을 이웃 사람들에게 팔기도 했다. 학교에 다닐 때 신문배달로 자주 졸았으나 미술 시간만은 열심이었다. 그가 그린 동물그림을 친구들은 다 좋아하였지만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다. 동물 그림들이 실제 모습과 다르다는 것이다. 월트는 동물들을 상상력을 더하여 창의적으로 그린 것이다.
1917년 시카고로 돌아와서, 교지의 미술편집을 맡고, 예술아카데미에 다니며 만화가의 꿈을 키워 광고만화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만화영화로 만드는 광고회사에 근무하면서, 그는 셀룰로이드 막에 등장인물의 동작을 한 컷씩 그린 뒤 사진으로 찍어 잇따라 보여주는 방식을 창안하여 만화를 생동감 있게 하였다. 이 방법으로 만화영화를 만들어 반응이 좋자 영화사를 차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시리즈를 만들었다. 그러나 작품을 사겠다던 사람들이 돈을 주지 않아 빚더미에 묻혔다.
그는 헐리우드로 가서 앨리스 시리즈를 완성하여 팔았다. <행운의 토끼 오즈월드>는 큰 인기를 끌었으나 매입자는 적은 돈을 주었다. ‘미키 마우스’를 창안한 그는 1928년 11월 18일 세계 최초의 유성 에니메이션인 <증기선 윌리>를 개봉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이후 많은 만화영화들을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2년에는 에니메이션 <꽃과 나무들>로 아카데미상을 처음으로 받았는데, 그는 평생에 아카데미상 29회, 에미상 4회를 수상하였다. 그 후 <백설공주, 1937> <피노키오, 1940> <신데렐라, 1950> <메리포핀스, 1964> <인어공주, 1989> <미녀와 야수, 1991> <알라딘, 1992> 등을 제작하여, 관객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고 즐거움을 주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디즈니사는 영화, TV, 홈비디오 제작 및 출판과 음악과 캐릭터 상품, 유통업 등으로 계속 영역을 넓히고, 죽은 뒤에도 사업은 확장되어 미국과 파리, 도쿄 등에 테마 파크《디즈니 랜드》를 건립하고, 호텔, 외식산업 등에도 진출하였다.
좋아한 만화를 가지고 그는 ‘단편만화→ 유성 만화영화→ 컬러 만화영화→ 에니메이션 결합 영화→ 디즈니 랜드 건립’ 등으로 끊임없이 변신하고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오늘날 디즈니사가 캐릭터 산업으로 벌어들이는 한 해 수입은 우리나라가 자동차 100만 대를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 규모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직원들이 파업하기도 하고 배신도 했다. 개중에는 회사를 떠나 경쟁 상대가 되는 경우도 여러 번 겪었다. 파플리셔 같은 사람은 핵심 직원을 빼돌려서 두 차례나 거의 망하게 될 번하기도 하였다.
월트 디즈니가 디즈니 랜드를 꿈꾸게 된 것은, 가족들과 놀러가서 회전목마를 보고 감탄하였다가 정지된 뒤의 조잡한 모습을 보고는 실망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는 살아있는 말들이 뛰노는 놀이공원을 상상했다.
“모두들 말도 안 된다고 했지요.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반대를 하면 할수록, ‘내가 뭔가 큰 것을 건졌구나’ 하고 확신했어요. 그러고는 곧장 그것을 향해 전력질주를 했지요.”
수많은 구상과 설계를 10여 년간 반복한 끝에, 1955년 캘리포니아에 놀이동산《디즈니 랜드》를 만들어 개관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겠다는 꿈을 이룩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사업가로 큰 성공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신경쇠약에 자주 시달리며 살았다. 한 때는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외따로 떨어진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모형 기차와 씨름하기도 하였다. 폐암으로 투병하면서도, “내 상상력이 내 현실을 만들어 낸다”며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꿈을 펴 나아갔다. 디즈니랜드를 개장하기 전까지 그는 늘 돈에 쪼들렸다. 모든 수입을 새로운 꿈에 계속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디즈니는 사후 한때 속류 상업주의자, 미국 문화제국주의의 앞잡이,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자 등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멀티미디어 기업을 개척하여 현대문화를 활짝 열어 오늘날과 같은 문화 세상을 만들어 놓았음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당신이 별에게 소원을 빌 때, 당신이 누구인지는 상관없어요. 당신의 마음이 원하는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가 가장 좋아했다는 노래, 애니메이션 <피노키오>의 주제가 「당신이 별에게 소원을 빌 때」의 가사처럼, 월트 디즈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바꾸고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실천으로 보여 주었다. 소망 충족과 꿈의 실현, 그것을 월트 디즈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증명해 준 것이다. (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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