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이도 안 나고 콩밥 먹었다. 개가 사람을 물었다면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거꾸로 사람이 개를 물었다면 특종뉴스거리가 된다. 왜일까? 우리는 상식이라는 개념의 틀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요, 사람이 개를 문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을 벗어난 행위이기 때문이다.
같은 도리로 이가 나야 콩밥 먹는 것이 상식이요, 이가 안 나고 콩밥 먹는다면 지극히 비상식적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엔 가끔씩 상식을 뛰어넘는 행위가 종종 나타나곤 하는 법이다. 그래서 ‘세상에 이런 일이?’란 TV프로그램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세상이 놀랄 만큼의 일을 해낸 것은 아니나 아무튼 이도 안 나고 콩밥 먹는 상식을 뛰어넘었다고 자부할 만한 일을 했다고 생각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사연은 이렇다. 지난 10월 10일 나의 장편역사소설 <황제와 소녀>가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5천 년 전 黃弟와 素女의 사랑이야기를 스토리로 구성하여 성을 위주로 다룬 것이며 그 당시 샤머니즘을 포함한 역사문화이야기를 많이 담았다.
이 책은 단순한 성 가이드북을 뛰어넘어 재미있는 스토리와 함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성의 의미와 기술을 들려준다. 주인공인 황제 헌원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또 그의 파트너인 소녀(아소)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통해 원시 인류가 어떻게 성에 눈뜨고 즐기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아울러 농사와 의학의 발견, 결혼제도의 창시와 부족 간의 충돌, 헌원의 중원 평정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렇듯 방대한 내용을 한 편의 소설에 담아내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나는 과거 칼럼을 많이 썼을 뿐 문학엔 까막눈이었기 때문에 소설을 펴낸다는 것이, 그것도 단편이 아니고 장편소설을 짓는다는 것이 어지간히 벅찬 일이 아니었다. 우리 속담으로 쉽게 말해서 이도 안 난 녀석이 콩밥 먹으려 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2005년 여름 한국에서 유명한 서점인 교보문고에서 중국고전 <황제소녀경> 한국어번역본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책을 펼쳐보니 번역이 영 말이 아니게 오류투성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국도교학회 회장 최창학 교수가 번역하였는데 이를 테면 ‘立刻’을 ‘세워서 조각하다’는 천자문식으로 직역하다보니 번역이 영 엉터리다. 출판사 사장과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 “내가 다시 번역하겠노라.”고 제안했다. 사장 왈, “이미 최교수한테 번역비를 600만원 지출했는데 자그마한 출판사로서 다시 번역비를 지출하기가 버거우니 험한 곳만 손을 봐 달라.” “알았다. 그럼 그렇게 하자.” 이렇게 되어 600여 곳을 손을 보아 재판에 ‘김정룡 정정’으로 시중에 발간되었다.
2011년 3월경 한국 그린나래출판사 사장과 우연한 자리에서 위 이야기를 했더니 다시 번역을 하라고 제안을 해왔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그 이유로서 중국고전 <황제소녀경>은 서술과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어 영 딱딱해 시장성(상품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럼 스토리를 구성하여 재미가 있는 소설로 만들어보라.”고 사장이 걸고넘어지는 것이었다. 욕심이 났지만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설을 써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 이도 안 나고 콩밥 먹으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세상엔 처음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다음이란 것이 있지 않겠느냐. 옛다, 모르겠다. 한 번 시도해 보자. 이렇게 해서 나의 장편역사소설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일단 한국 작가 분들이 나의 소설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내타내고 있어 시장성이 있어 보인다.
사람은 흔히 청소년시기에 꿈을 갖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정열을 쏟아 붙는 것이고 성인이 되어 그것을 밥통으로 삼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 공식이고 상식이다. 그러나 문화혁명이란 세상에서 보기 드문 특이한 시대가 낳은 나와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인생 공식과 상식으로 살 수가 없었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는 나의 50여 년의 생애를 돌아보면 엉뚱하게 복잡하게 흘러왔고 때론 전혀 나의 인생족보에 없을 듯한 일들을 해온 것에 나 자신도 영 ‘딴짓거리’로 여겨질 때가 많았다.
소학교2학년 때 문화혁명을 맞아 하루건너 농사일을 지원했고 문예선전대에서 딴따라로 허송세월을 보내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게다가 시골학교라 학년이 다른 학생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복식반을 꾸려 수업하였으니 공부를 제대로 했을 리가 만무하였고 조선반과 한족반을 왔다갔다하느라 어느 한쪽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렇게 얼렁뚱땅 명색이 고등학교졸업이란 렛델을 달고 사회에 진출했다.
졸업 2년 후 1977년 10월 대학입시가 회복되었으나 배운 것이 너무 한심해 해마다 낙방되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대학입시에 매달렸다. 그 과정은 정말 힘들었고 심지어 처절했다. 명색이 고등학교졸업생이지만 역사 과목은 진시황을 배우다 말고 지리과목은 한 페이지 구경도 하지 못했다. 외국어를 배우면 반동이라 한마디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과로 시험을 보았고 외국어를 독학하여 일본어전공과에 붙었다. 가히 이도 안 나고 콩밥 먹었다고 말해도 조금도 과분하지 않을 것이다.
대학시험을 7년 봤다면 머리가 아둔하다고 평가할지 모르겠으나 나에겐 크나큰 자본이 되었다. 뭐든지 포기하지 않고 하면 된다는 것이 나의 신념으로 자리를 굳게 잡았다. 그 신념은 8급 태풍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건한 것이다.
나는 이런 믿음을 갖고 49세에 글쓰기에 뛰어들었는데 처음엔 나의 주변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할 만큼 황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세운 목적은 꼭 달성한다는 신념을 갖고 흔들리지 않고 집요하게 매진해왔다. 그런고로 불과 5년 남짓한 사이에 신문과 잡지에 200여 편의 글을 발표하여 이름을 조금 날리게 되었다.
글은 나름대로 많이 발표했고 조금 특색이 있어 일정한 독자층도 확보하고 있었으나 너무 딱딱한 글만 써왔기에 기분이 조금 따분했다. 그래서 부드럽고 재미가 있는 글, 즉 문학작품을 써보고 싶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나의 처녀작 <황제와 소녀>이다.
많은 조선족작가들이 한국에서 책을 발표해보고 싶어 한다. 심지어 자비로 책을 내려고 하는 분들도 있다. 나는 운이 좋게도 나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장편소설을 써본 것이었지만 멋지게 계약금까지 미리 받고 집필을 시작하였다. 거금은 아니었으나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문혁을 거친 사람들의 다수가 사회경력이 특이한 것과 같이 나의 삶도 인생족보에 전혀 없을 듯한 일들이 엉뚱하게 펼쳐지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양치기를 해보고, 맨발의사를 해보고, 민반교사도 해보았다. 후엔 연변일중 교사를 하다가 그 좋은 직업을 때려치우고 여행사 사장을 했고 정부관리 맛도 보았다. 40대에 한국에 와서 나름대로 ‘土法煉鋼’을 통해 많은 공부를 했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역사문화이야기를 비롯해 묵직한 글들도 많이 발표하였다. 한국에서 연구소를 만들어 조선족으로는 처음으로 학술포럼을 개최해보았다. 교사출신이라 재한조선족교사모임을 만들어 회장을 맡고 있고, 동네장기수준 주제에 재한조선족장기협회를 만들어 100여명 선수가 참가한 장기대회도 개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의 성격은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스타일이다. 지금까지 상기 여러모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해왔다. 그 가운데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이다. 즉 글쓰기와 재한조선족장기대회를 한해 두 차례씩 개최하는 것이다.
공자님께서 40이면 불혹이라 했다. 이미 지천명이 한창인 나는 앞으로 나의 인생에서 또 어떤 딴짓거리로 엉뚱한 일을 저지를지 나 스스로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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