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문화대혁명 이후 90년대 전까지 중국 조선족 서예계를 주도한 대표 서예가들은 田靑松, 金正松, 林蒼春, 朴明俊, 南國山 등이다.

田靑松은 1945년 12월 26일에 吉林省 圖們市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62년 8월에 龍井第一中學校를 졸업하고 1965년 1월까지 龍井 工藝美術工場, 龍井木器工場에서 美工 일을 하고 1966년부터 1974년 10월까지는 龍井縣의 영화계통에서 미술사로 재직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화가 金太星한테서 영화포스터 창작과 서예를 배움으로서 1980년대에 興行한 이른바 延邊書體를 創造하는 基礎를 닦았다. 1980년 6월까지 延邊話劇團에서 舞臺美術설계사로 있었다.
재직 당시 商標, 영화포스터, 舞臺設計를 하면서 동시에 한글서예를 결부하여 창작함으로써 가장 일찍 한글서예를 활용한 서예가 중의 한사람이다.

1983년에 創作한 <농가의 새 노래>는 延邊 自治州美術展覽會의 1등상을 수여 받았고 1984년에는 吉林省 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1990년에 田靑松은 서울에서 個人畵展을 개최하였다.
그는 화가인 동시에 서예가이다. 그는 延邊日報 美術編輯으로 재직하기 시작한 1981년부터 수많은 신문과 잡지의 표지글씨를 써왔는데 <연변일보> 표제 역시 그가 쓴 글이며, <연변소년보>, <길림신문>, <도라지>, <장백산>등 중국의 대부분의 조선글신문, 잡지의 표지글씨는 그의 필적이다. 그는 북한의 청봉체를 스스로 습득하여 연변특유의 서체를 形成하는데 튼 공헌한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또한 서예자료가 없던 1980년대의 조선글 서예애호가들은 그가 쓴 신문이나 잡지의 제목글씨를 오려 모아두고 체본으로 삼았다.
田靑松의 그림은 自然에 대한 자세한 관찰을 통하여 화가의 평온한 內心世界와 섬세한 붓놀림이 어우러져 화려하면서도 아늑한 기법으로 朝鮮民族의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民族性을 반영하고 있다. 글씨 또한 강약의 조화가 잘 어우러져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필획으로 外柔內剛의 民族性을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書體이다.
金正松은 1964년에 延邊大學 朝鮮語文學部를 卒業하고 多年間 延邊第一師範學校의 朝鮮語學 교원으로 재직하던 중 1987년에 書藝科目 開設을 推進하고 書藝敎師로 變身하였다. 그는 조선어학자로서 북한의 語學資料들을 접하면서 북한 서체인 靑峰體와 平壤體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어 습득하였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교재가 없었기에 북한의 화보나 잡지의 글씨를 본떠서 교재로 삼았다. 그리하여 靑峰體 위주의 한글서예를 普及하였으며 그가 배양한 학생들은 卒業 후 중국의 朝鮮民族 중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서예서클을 조직하고 서예과목을 개설하여 수없이 많은 서예 후계자를 양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弟子들은 중국 朝鮮民族 서단에서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林蒼春은 1969년에 延邊大學 中文學部를 卒業하고 延邊博物館 副館長을 歷任하였다. 그는 일찍 1977년 한국 東方硏書會와 吉林省書法家協會에서 주최한 韓中交流展에 유일한 朝鮮民族書藝家로 출품하여 그 이름을 알렸다.
그는 1990년 延邊朝鮮族書畵家學會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선출 되어 2005년까지 15년간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90년과 1991년에 걸쳐 두 차례의 延邊朝鮮族書畵展覽을 개최하였다. 1992年에는 李坤이 이끄는 韓國書學會와 姉妹結緣을 맺고 그 해 서울에서 있었던 ‘오늘의 한글서예작품초대전’과 1993년에 있었던 ‘한글서예큰잔치’에 林蒼春, 吳明南, 金浩根, 朱永日, 許日春 등 중국의 10명 朝鮮族 서예가의 작품을 출품시켜 朝鮮族書藝家들의 한국 진출 문호를 열었다. 1994년에는 韓國書學會와 연합으로 ‘아름다운 한글서예 中韓 聯合展’을 개최하여 延邊書藝愛好家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한국의 한글서예를 접하게 하여 그들의 안광을 넓혀 주었다. 그 때 한국의 서예교육가 朴炳千은 朝鮮族 서예가들에게 보기 힘든 한글서예자료를 보여주었고, 한글서예가 金玉順은 한글 宮體 실기를 보여주어 연변에서의 한글 전통서예의 씨앗이 싹트게 하였다.
1995년에는 韓中書藝交流 濟州展과 海外同胞書藝展을 開催하여 延邊朝鮮族書藝家들의 열정적인 호응을 얻었다. 1996년에도 韓中書藝交流 延邊展을 개최하여 延邊朝鮮族書藝家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現場에서 한국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그는 또 <周德海記念碑>, <李旭詩碑> 등 碑文을 남겨 朝鮮族 서단과 후학들에게 훌륭한 한글서예자료를 남겼다.
이처럼 林蒼春은 중국 朝鮮民族의 서예 보급과 발전, 그리고 韓中書藝交流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의 작품은 風格이 다양하다. 한문은 행초서와 예서 작품이 위주이고, 한글은 延邊書風의 서체와 漢文 隸書의 필법과 結構法을 구사한 板本體와 유사한 서예작품을 많이 출품하였다.

朴明俊은 1964년 延邊藝術學校를 졸업하고 선후로 琿春縣 第4小學校, 和龍縣 新東小學校, 和龍縣 敎員進修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美術敎員, 교장직을 맡아서 일을 하다가 1984년 9월에 東北朝鮮民族敎育出版社에 전근하여 美術編輯室 부주임을 역임하고 주임으로 정년퇴임하였다.
출판사에 재직하는 동안 그는 朝鮮族 미술교과서를 편찬하였는데 전국 朝鮮族 소학교 교재로 사용되었다. 미술 교과서에는 서예부분도 포함시켜 편찬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예관련 서적들도 出版하였는데 그가 편집하여 1992년에 출판한 『조선글 서예』는 중국 朝鮮族 서단에서는 최초의 한글서예관련 도서이었으므로 교재가 없었던 朝鮮族 서단에서 書藝愛好家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朴明俊은 東北朝鮮族敎育出版社 미술교과서 편집실에 재직하면서 『조선글 서예』(1992)외에도 『中小學校敎員學生書藝作品集』, 『小學校 高級學年 書法』(1996), 『朝鮮族師範 專科學校 書藝敎科書』(2002)등 서예관련 책자를 편집 출판하여 한글 서예 기초자료를 제공하였다. 다른 한글 서예자료를 구할 수 없는 중국의 현실에서 그 책들은 소중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朴明俊의 한글 글씨 또한 一品인데 東北朝鮮民族出版社에서 出版하는 圖書의 표지 글씨는 大部分 그의 필체였다. 朴明俊의 필체는 朝鮮의 靑峰體의 전투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부드러우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필획과 흐트러지지 않는 결구로 朝鮮民族의 강하고도 부드러운 民族性을 잘 나타내 朝鮮族 書藝愛好家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서체 중의 하나이다. 朴明俊은 池升元, 田靑松과 더불어 延邊書體를 굳히는데 공헌한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南國山은 中國朝鮮族 서단의 공백인 篆刻부분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1984년에 南國山은 23세의 젊은 나이로 中國書法家協會가 上海에서 개최한 제1차 全國書法篆刻展覽에서 <藝海>라는 篆刻作品을 출품, 영광스럽게 입선하여 朝鮮族으로는 최초로 전국급 작가로 인정받았다. 동시에 吉林省 第1次 書法篆刻展에서 영예의 1등상을 수상하면서 朝鮮族으로는 최초로 中國書法家協會 會員이 되었다. 1984년 延邊書法家協會가 創立되자 朝鮮族으로는 林蒼春과 함께 당당하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89년에는 延邊共靑團 州委의 業務 指導 下에 延邊靑年書法家協會 창립하여 수년간 활동하였다. 1991년에는 한국의 如初 金膺顯의 초청으로 서울에서 個人篆刻展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4년 이후 書藝, 篆刻방면에서의 활동을 중단하여 그의 篆刻作品을 다시 보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延邊靑年書法家協會도 자동 해체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琿春에서 생활하다가 40세 초반에 아깝게도 卒하였다.
南國山의 篆刻作品을 살펴보면 快劍斷蛟와 單入刀法으로 거침없이 單刀直入적으로 새겨나간 運刀法은 모두 齊白石의 篆刻 風格과 유사하다.
이 시기의 서예를 귀납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文化大革命 종결 이후 民族 교육이 정상화되어 습자교육이 재개되었는데 붓글씨보다 硬筆글씨 쓰기를 중요시하였다. 師範學校에도 서예과목이 개설되어 서예교육이 활성화되었고, 민족자치지역에서의 한글과 漢文의 겸용 법안이 반포되어 서예는 看板, 碑石, 字幕 등 여러 방면에서 실용화 되었다. 林蒼春에 의하여 한중 교류의 물꼬가 트일 조짐이 보였고, 김정송에 의하여 서예교육이 진행되었으며, 南國山의 國展 입선으로 전국급 서예가가 탄생하여 朝鮮族 서단에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田靑松, 朴明俊 등에 의하여 延邊書體는 外柔內剛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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