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달래 랭면’을 가리봉에 정착시키기까지
지금은 재한조선족동포사회에서 김숙자회장이라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이 성공인사로 알려져 있지만 1996년 친척방문으로 한국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그녀의 한국생활 체험 역시 어느 음식점에 들어가 고된 일을 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물론 한국에 들어올 때 음식점에서 일하며 돈을 벌려는 목적은 아니였지만 저도 초기에는 어쩔수 없이 그 행렬에 들어설수밖에 없었습니다. 허나 한 두어달 일하는 가운데서 음식점이 돌아가는 상황을 얼마간 료해할수 있었고 마침내는 나도 음식점즈음은 해낼수 있겠다는 신심이 생기더군요.”
무엇이든 나름의 판단이 선 후에는 반드시 해내고야마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한단계의 준비를 거쳐 서울시 왕십리에 ‘불타는 오겹살’ 한식점을 오픈,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와 몇달 안되는 사이에 음식점을 시작한데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해했다. 더우기 가까운 친구들이 조선족동포 출신으로 서울에서 한국인을 대상해 음식업을 시작한데 대해 도리머리를 짓기도 했지만 그녀는 끈질긴 집념으로 이미 벌여놓은 일을 무작정 끌고나갔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녀는 중국에 있을 때부터 한국인회사에 근무하면서 이미 한국인들의 입맛, 생활습관, 례절에 대해 익숙히 알고있는 터였다.어찌보면 적당한 시기에 어디에서든 한식점을 해볼려고 은근히 준비해온 상태라 할수도 있었다.그 당시 조선족동포로서 한국에 한식점을 경영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었던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며칠이나 지탱할것인가 반신반의 했지만 ‘불타는 오겹살’은 용케도 6년이란 시간을 견디여오면서 수많은 고객들속에 뿌리를 내렸다.
그녀는 한국인들을 대상한 음식점이 눈에 뜨이게 큰 호황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몇년 동안의 노력으로 얼마간의 자금을 장만할수 있었고 또 새로운 발전을 꾀하는데 도움이 될수 있는 보귀한 경험들을 축적할수 있어 만족했다고 회억했다.
“진달래랭면을 한국에 정착시켜 보려는 생각을 하게 된건 그후의 일이였습니다. 그 원조의 발명자가 저의 인척인 관계로 기술적인 면에서 도움을 받게 되였고 마침내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이 브랜드를 한국땅에 가져올 결심을 내리게 되였습니다.”
브랜드의 가치란 무궁무진했다. 2005년 4월에 ‘진달래랭면’1호점이 가리봉시장 입구에서 고고성을 울리자 대뜸 명품음식점으로 각광받아 전에없는 호황을 이루기 시작했다. 김숙자회장은 원조의 맛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연변에서 으뜸가는 기술자를 초빙해왔고 랭면제조에 수요되는 모든 재료를 100% 연길 ‘진달래랭면’의 수준에 맞추기에 알심을 들였다.
모든 랭면은 그 제조기술에서 나름의 비법이 있다. 상업적인 비밀이라 그 내막을 속속들이 알아낼수는 없지만 진달래랭면은 40킬로에 달하는 소고기국물에 진달래 나뭇가지와 대파, 계피 등 13가지 조미료를 넣어서 재차 달인다는 비법에 대해서는 감추지 않고있다. 진달래의 꽃잎과 어린 가지는 만성기관지염 치료에 좋으며 소고기육수 숙성에도 도움이 된다한다. 진달래랭면이 빛깔이 좋은 원인은 고명을 사용하기 때문이라 했다.
고향인 연길에 가야만 맛볼수 있었던 랭면을 머나먼 이국타향 가리봉에서 만나게 된 조선족동포들은 뜻밖의 행운이라면서 음식점에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간 연변을 다녀간 한국인들도 거의 모두가 진달래랭면이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간판을 피뜩 쳐다보고는 들려가군 했다. 그럴수록 김숙자회장은 맛으로부터 미감에 이르기까지 최상의 질을 추구하는 동시에 고객에 대한 서비스도 빈틈없이 하라고 일군들을 격려하였다.
그녀는 이듬해에 중국인들이 많이 집결되여있는 안산 원곡동에 ‘진달래랭면’ 2호점을 오픈, 둘째딸에게 맡겨 경영하였는데 역시 대박이였다. 그후 가리봉에 ‘진달래보신탕’, ‘진달래 양꼬치구이’를 련이어 오픈하여 진달래 계렬음식의 성세를 이루었다.
SBS 생방송 ‘투데이’와 KBS2’세상의 아침’그리고 ‘무한지대Q’에서는 전문 진달래랭면을 소개하는 프로를 제작하여 방송하기도 했다. 이로써 그녀는 연변의 랭면브랜드를 한국땅에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성공한 녀비즈니스맨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녀는 베풀며 사는 인간
한국 법무부의 방문취업제 정책이 출범하면서 한시기 무연고 조선족동포들이 대거 한국에 입국하였다. 대부분은 무연고라 의지가지없어 한동안은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김숙자회장은 자신은 이미 한국에 온지 여러해 되며 또 음식점라도 하나 차리고있기에 먹고사는데는 문제없다며 어려움을 겪고있는 그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베풀기 시작했다.
음식점은 원래 24시간 영업하기에 손님이 빌새 없었다. 허나 누구든 찾아와 어려운 사정을 말하면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 주었다. 하루는 17명이나 찾아와 영업에 지장이 많았지만 두말없이 모두 받아주었다. 시종일관하게 어진 성품과 착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온 그녀였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저도 한시기 객지생활을 한적이 있어요. 집을 떠나고보면 때시걱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자리가 불편해 고생이 막심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남보다 형편이 좋으니 힘자라는대로 도와주기로 하였지요. 모두 고향사람들이고 한번 잘 살아보자고 한국에 온거니 도와주기로 했어요.”
누구든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게 그녀의 인생좌우명이기도 했다. 영업을 하는 음식점에 처지가 딱한 사람들이 련속부절이 찾아오다보니 자리가 모자라 넘어날 정도가 되자 그녀는 아예 가리봉동의 한 2층 건물에 ‘재한동포 나눔의 쉼터’를 마련했다.이에 드는 가동자금 4000만원(한화)을 개인이 출자하고 매월 드는 200만원이란 비용도 자신이 부담했다. 대부분은 금방 한국에 들어와 일자리도 못찾은 상태라 숙식을 전부 무료로 제공했다.
재한 조선족대학생 축구단이 자금이 부족해 운동장소를 찾지 못하게 되자 그녀는 매년 수백만원이란 자금을 후원해주기로 하였다. 그외 재한동포련합총회 운영에 필요한 자금도 음식점수익금으로 충당하고있으며 조선족동포들을 위한 행사에도 후원을 아끼지않고있다.그 지출이 만만치가 않아 겨울 한시기 몇번인가 적자를 내기도했다.
“음식점을 개업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고객의 80% 이상이 조선족동포들이였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이일것입니다. 그러니 실상은 음식점의 돈은 고향사람들이 벌어준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 수익금의 일부를 그들을 위해 쓰는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녀는 이와 같이 봉사하게된 리유와 계기에 대해 스스럼없이 밝혔다. 항상 수수한 옷차림에 따뜻한 웃음으로 조선족동포들을 맞이하는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김숙자회장이야말로 우리 고향사람들의 어머니와 같은 분입니다”라고 감격해마지 않았다.그녀의 덕분에 무료로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일자리가 생겨 떠날 때면 모두 눈물이 글썽해 한다며 김숙자회장은 감명깊게 술회했다.
김숙자회장은 한국에 와서 자주 자원봉사 관련 소식을 들으면서 ‘나도 베풀며 살자’라는 삶의 신조를 굳히게 되였다고 한마디 덧붙혔다. 그녀는 한국의 여러 TV에서 반송되는 이웃돕기 프로를 즐겨 시청한다고 했다. 몇번인가 불우이웃 돕기 프로를 시청하면서 눈굽을 적신 일이 있다면서 한국의 봉사문화를 따라배울 필요가 있다고 진진하게 토로했다.

조선족동포사회 구심점 역할에 총력
료해에 의하면 재한 조선족동포사회에 10개나 되는 민간단체가 있다. 이러한 민간단체들은 동포들의 한국사회 정착 및 그들의 합법적인 권익을 위해 일정한 역할을 하고있지만 조직이 너무 분산되여 있는데다가 운영방식이 적절하지 못한 등 원인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한 조직들이 적지 않다. 동포사회 지명인사들이 이와 관련하여 수차 통합을 건의하였지만 여러가지 여건이 구비되지 않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질적인 역할이 없는 단체는 유명무실합니다. 경비와 인력만 랑비했지 동포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없는거지요. 허나 단체를 하나 설립한다는게 역시 쉬운게 아니라 그 자체를 포기한다는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심사숙로한 끝에 몇개의 조직을 하나로 통합할 구상을 하게 되였는데 통합된 새로운 단체를 내오는데 수개월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분산되여있는 조직을 하나로 묶는데는 극히 참을성있는 설복력과 교섭이 필요했다. 김숙자회장은 개인경비를 써가며 몇개 조직의 단체장들과 함께 수차 회의를 열어 통합의 필요성과 의의에 대해 조리있게 피력했다. 회의 후에는 또 여러 단체장들을 직접 찾아가거나 전화를 걸어 통합할수 있는 길을 상론하면서 의견을 충분히 나누었다. 그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2008년 11월 마침내 기존의 중국동포상인련합회, 귀국동포련합회, 동향친목회 등 3개 동포단체가 통합되여 재한동포련합총회(이하 총회로 략칭)가 새롭게 출범했다.
3개의 동포단체 통합은 조선족동포사회 새로운 구심점의 형성을 의미한다. 물론 동포사회의 응집력이 막대한 충전을 받아 전례없는, 단합된 힘을 얻게 된것이다. 그 과정에 김숙자회장은 뛰여난 조직력과 재치있는 민간외교의 능력을 인정받아 총회의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였다.
총회의 취지는 조선족동포들의 한국정착 및 그들의 합법적인 권익을 수호하며 동포사회의 단합과 친목을 도모하여 최대한의 응집력을 키우려는것이다. 한국사회와의 융합을 촉구하여 한중우의와 교류를 증진하려는것 역시 중요한 목표의 하나이다. 사회에 대한 봉사는 총회의 영원한 주제이다. 현재 총회에서는 조선족동포들의 고충상담, 체류업무대리, 손해배상 상담, 임금체불 상담 등 활동을 통해 한국생활 정착에서 봉착하는 어려운 점들을 접수하여 풀어주고있다.
동포사회를 위한 여러가지 행사도 정기적으로 벌이고있는데 이를테면 3.8국제녀성의 날 행사, 추석맞이 노래자랑, 예술단 공연, 년말 송년모인 등 행사들은 좋은 이미지와 영향력을 과시하고있다.그외 무연고 조선족을 위한 ‘재한동포 나눔의 쉼터’그리고 65세이상 조선족동포 로인들을 대상으로 경로당도 운영하고있어 동포사회를 위한 봉사척도를 높이고있다.
현재 총회는 서울시 구로, 금천, 영등포, 강동 지역과 경기도 안산, 충남 대전, 중국 연길과 산악회까지 8개 지회를 두고있으며 회원은 3800명이다. 김숙자회장과 그의 재한동포련합총회는 재한 조선족동포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하며 좋은 이미지를 심어가고있다.
조선족동포 및 한국사회 화제의 인물로 떠올라
재한동포련합총회 출범이 한국사회에 주는 영향도 충격적이였다. 몇개나 되는 매스컴에서 김숙자회장을 인터뷰하여 신문에 게재, 그녀는 일시에 화제의 인물로 떠올라 동포사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지대한 관심을 자아냈다. 특히 그녀는 ‘2011년 세계속의 한국인’ 단체부분 대상을 수상하면서 그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의 월간시사 ‘대한뉴스’에서는 전문 기자를 파견해 그녀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가운데 동포사회와 한국사회를 망라한 중요한 견해들이 있기에 그 일부를 추려 게제하기로 한다. 대담은 ‘대한뉴스’ 박현기자와 김숙자회장 사이에 이루어지고있다.
물음: 한국정부의 중국동포정책에 대해 대체로 어떻게 체감하고있습니까?
답: 동포들은 90년대 후반부터 많이 한국에 입국하기 시작해 현재 한국내에서 상당부분 혜택도 받고있지만 정부정책이 급속도로 바뀌는 등 일관성이 다소 부족한 경우를 종종 느낍니다. 따라서 저희 총회를 포함한 각 동포단체의 장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합심해서 동포들에 대한 정책과 각종 문제 해결을 당국에 건의하기도 합니다. 향후 통일된 련합체를 발족시키겠다는 의지도 표명하고있어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할수 있도록 다각적으로 노력하고 고민해야 할것으로 보입니다.
물음: 중국동포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시각을 어떻게 교정하는것이 바람직하겠습니까?
답: 지금은 많이 바뀐 상태입니다. 지난 세기 90년대 후반에는 물론 그 이후에도 한국인들이 중국동포들을 낮취보는 경향이 상당했었습니다. “중국에서 밥은 제대로 먹냐?”며 비하했던 적도 많았지요. 이젠 중국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늘어 그러한 발언은 대폭 줄어든 상태입니다. 물론 지금도 알게모르게 한국인들이 중국동포들을 차별시하는 시각이 남아있는것은 사실입니다.한 례로 재한 중국동포들은 집을 임대해 생활하는 경우가 많은데 집주인인 한국인과 생확방식의 차이 표출로 갈등을 겪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기도 합니다.또 정부에서도 귀화한 동포들의 경우 새로 발급된 주민등록증에 기존 한국인과는 달리 한자 병기 없이 한글만 표기해 ‘중국계 한국인’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는것도 지적되는 점입니다.
물음: 중국동포들이 보는 대한민국 현재의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답: 매우 부러워하며 흠모하는 편입니다. 각종 여건과 환경이 우수하며 특히 한국 공무원들은 매우 친절하다는 점을 첫 손으로 꼽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일반 시민들의 봉사활동이 대단하다고 여겨 중국동포들 사이에는 우리도 중국으로 돌아가면 본받아 해보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물음: 중국동포들이 한국사회에 융화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필요할가요?
답: 우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실 한국에 입국한지 10년 이상 된 사람들은 비교적 잘 적응하는 반면 5년 미만인 사람들은 사회적응에 대한 관심보다는 돈을 먼저 벌어야 되겠다는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또 귀화인과 비귀화인 사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귀화인은 한국인으로서의 의지를 가지고 일상에서 노력을 경주하는데 비해 비귀화인은 정해진 기한에 돈을 빨리 벌어 중국으로 돌아가려는 마인드를 지니고있는 경우가 많습니다.따라서 충분한 시간의 흐름속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여건을 천천히 개선해 나가려는 노력이 모두에게 필요할것으로 생각합니다.
물음: 회장님께서 총회를 이끌어가시면서 느끼는 보람과 어려움은 각각 무엇인가요?
답: 무엇보다 동포들이 어려움속에서 지내다가 뒤늦게 알고 와서 총회를 믿고 의지할 때,또 그들의 하소연을 받아주고 이야기와 애환을 들어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 가운데 불법체류자는 총회차원에서 중국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한국에 오고싶다면 충분한 자격을 취득해 오라고 당부하기도 해 총회가 동포사회를 정화하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어려운 점이라면 지금 회원들이 늘어나면서 자금과 경비 충당문제가 확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여 최근 외교통상부를 방문, 이런 고충을 전했더니 래년부터 예산지원을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대한뉴스’ 기자와의 대담내용에는 이외에도 향후 총회의 활동방향 및 조선족동포들의 거주와 일자리에 대한 질문 등이 있으나 지면관계로 이만쓴다.
김숙자회장은 고향이 길림성 연길, 젊었을 때 연변통신대학, 북경금융학원을 졸업하고 한시기 연변교육출판사,조선어문 교육잡지사에 근무한 적이 있다. 1994년에 직장에서 나와 북경에 진출, 한국인기업에서 통역으로 있었으며 그후 몇년동안 의약공사의 도매상으로 활동하면서 비즈니스경험을 쌓았다.
끈질긴 노력과 비범한 리드로 재한동포련합총회를 만들어낸 김숙자회장, 그녀는 오늘도 재한조선족동포들의 구심점역할에 총력을 기울이며 불철주야로 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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